‘잘못 맺은’ 한일협정이 한일관계 파탄의 주범(主犯)
‘잘못 맺은’ 한일협정이 한일관계 파탄의 주범(主犯)
  • 미래한국
  • 승인 2015.08.1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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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제기] 국제법 관점에서 본 한일 외교 갈등 내막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관계조약’과 1998년 체결한 ‘한일어업협정’이 존재하는 한 韓日 간 정상 외교관계는 불가능

▲ 김영구 여해연구소 소장·전 해양대 교수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이 최근 한국외교협회가 발간하는 <외교> 잡지(2015년 7월 발간, 제114호)에 ‘수교 50년, 한일 관계 전망과 해법’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공 전(前)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1994~1996)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우리나라 외교 분야 원로로서 건강하고 합리적인 견해를 가진 분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 잡지 서두에 수록된 그의 글 역시 온건하고 일견, 합리적(?)인 논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의 논조를 대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어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국익에 입각한 한일 관계의 운영을 위해서는, 되도록 국민감정에서 자유로운 입장에서 사안에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일본과 생각이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사사건건 대립 투쟁하는 자세에서 물러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협력적인 한일 관계 유지는 보다 큰 국익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 입장에 입각하여 공 전 장관은 몇 가지 중요한 한일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있다. 

공로명 장관의 제언 

첫째 이번 8월 15일, 종전 70주년을 기해서 나올 ‘아베 담화’에 관해. 
그는 아베 총리의 담화에 지난 세기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인접 국가에 대한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대한 겸허한 반성과 사죄가 없는 경우에도, 한국 정부나 한국 언론이 이 담화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논평과 사설을 게재하는 것을 자제하고, 더 이상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한다.

이런 제의를 하는 근거는, 아베가 정치적으로 일본 국내에서 탄탄한 보수 우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일본 총리 자신이 일본 국가의 역사적 무결점(無缺点)에 대한 확고한 이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역사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아베와 대결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아베의 건강이 유지되는 한 2018년까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아베 정국’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 정권과 담을 쌓고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독도 문제다. 

공 전 장관은 백충현 서울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어떤 경우든지 한국 정부가 국민감정과 직결되는 영토 문제를 자발적으로 손대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조용히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처 방법이다.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쁠 이유는 없으며, 독도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뜨거운 이슈가 되지 않도록 관리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충고하고 있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일본이 전쟁 중에 조직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고도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한국을 비롯한 약소국가 여성들을 일본 군인들을 위한 성노예로 학대하여 그들의 인권을 명백하게 유린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일이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사죄만이 몇 안 남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다. 뒤늦은 금전적 배상과 같은 일은 이 문제의 안건으로 제기되어 있지도 않다. 

한국 정부는 제쳐두고라도 미국과 서구 선진국들이 일본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역사적 사실의 명백한 인정과 그 사죄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일본은 심각한 궁지에 몰려 있다.

對日 외교가 계속 겉돈 진짜 이유

일본 정부로서는 그 동안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 등으로 조금씩이나마 이 문제에 소극적 수용(受容)의 태도를 보여 왔지만,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아베가 역사적 사실의 인정이나 정부 차원의 사죄 등 더 이상의 양보를 할 의도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 전 장관은 일본이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서 역사적 사실의 명백한 인정과 사죄를 하는 경우에도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 동상 철거와 한국인 재일동포들이 국제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여론 환기운동 등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고 이를 종결시킬 것을 한국 정부가 먼저 “마중물”로 제안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선 공 전 장관의 글에서 제시한 제언과 권고 및 충고들에 관해 독자로서 객관적인 견해를 먼저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순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한국 정부가 한일 간 역사 인식 문제를 접근하면서 일본에 대해 지금까지 제기해온 모든 반론과 대결 자세가 결국 ‘비생산적’인 것으로 끝났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장관의 제안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제기해온 한국 측의 모든 반론과 대결 자세가 왜 ‘비생산적’으로 끝나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 반성하고 분석하기도 전에, 이번에도 “아베 총리의 소신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을 예상하기 때문에” 한국 측의 반론과 대결적인 논리 제기를 그만둬야 한다는 그의 제안은, 주권국가의 외교적 자세로는 비겁하고 논리에 합당하지도 않다. 

“아베가 일본 국내에서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일본 총리 자신이 일본 국가의 역사적 무결점(無缺点)에 대한 확고한 이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아베와 대결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라고 본다는 그의 견해는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대일(對日) 외교가 보여 온 전형적인 패배주의적 무정책(無政策)의 진수(眞髓)를 고백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아베의 건강이 유지되는 한 2018년까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아베 정국에서 “현실적으로 한국 정부가 일본 정권과 담을 쌓고 지낼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런 패배주의적 무정책(無政策)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구제불능의 노예근성에 분노의 감정이 치솟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과거 침략전쟁에서 한국을 강제로 병탄한 것, 우리 국토를 참절(僭竊)하고 인권을 유린한 사실들이 역사적으로 변명 가능하고 법적 또는 논리적으로 합리화할 수 있는 증거들로 결국 무결점한 것들이라면, 그가 종전 70주년 기념 담화에서 무슨 겸허한 반성과 사죄의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베 총리가 어떤 이념적 자세를 가지고 있든 우리는 일본 정부나 아베 총리에게 어떤 반성과 사죄의 말도 강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가가 과거 침략전쟁에서 한국을 강제 병탄한 것이, 그리고 우리 국토를 참절하고 인권을 유린한 사실들이 역사적으로 용서되지 않는 명백한 범죄 행위라면 아베 총리가 어떤 이념적 자세를 가지고 있든 우리는 일본 정부나 아베 총리에게 반성과 사죄를 기대하고 요구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일본 총리가 일본 국가의 무결점에 관하여 무슨 이념적 자세를 얼마만큼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관한 정의로운 판단의 문제다. 

▲ 한일 간 역사 인식에 대한 차이는 1910년 한일병합 조약의 적법성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은 지난 4월 미국을 방문해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있는 아베 총리.

구보다 망언의 배후에 숨어 있는 일본의 對韓 외교 논리

지난 4월 29일 아베 신조의 미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 대해 미국과 서구 학자 500여 명이 즉각 일본 정권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역사 왜곡이나 정치 쟁점화를 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은 이런 원칙적 판단의 문제 범주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그 역사적 범죄 행위의 직접 피해자이면서 왜 이런 당연한 원칙적 판단 문제의 범주 안에 동참하지 못하는가? 한국 정부가 한일 간 역사 인식 문제를 접근하면서 일본에 대해 제기해온 모든 반론과 대결의 자세가 언제나 ‘비생산적’인 것으로 끝난 데는 한국 정부가 이러한 원칙적 판단의 문제에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공로명 전 장관이 그의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1953년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을 돌아보자. 1953년 한일 회담에서 구보다 수석대표는 “한국이 ‘대일(對日)강화조약’ 체결 이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적법 유효한 조약으로서 그 체결로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명백하게 소멸한 것이라면, 대일강화조약이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되기 4년이나 앞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은 아닌 게 아니라 국제법 위반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대일강화조약의 발효 여부와 관계없이 4년이나 앞서 한반도에서 주권을 회복한 것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명백하게 소멸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국제사회 전체의 보편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이 조약이 적법 유효한 조약으로서 성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던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제국에 대해 ‘전시(戰時)중립 선언’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국제법을 위반하여’ 고종황제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2월 9일 대한제국의 수도를 무력으로 점거했다. 사실상 한반도는 그 이후 일본 군대에 의한 군사적 점령(belligerent occupation) 상태에 들어갔다. 일본 군대에 의한 이런 군사적 점령 상태는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날 때까지 약 41년 간 계속되었다. 

1905년 보호조약(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이 병합한 것으로 외형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이런 한일 간 일련의 유사조약(類似條約, quasi treaty)들은 조약법상 요건의 불비로 무효이거나, 부적법한 조약으로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은 조약들이다. 

멍청하고 한심한 한국 외교

그러니까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국제법상 적법한 권원(權原, legal title)’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일본 군대에 의한 군사적 점령(belligerent occupation)으로 유지되었던 것일 뿐이다.  

일본 제국 자신이 한국에 대한 지배 형식에 있어 ‘군사적 지배’라는 형식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일본의 한반도 강점 기간 동안 실제로 한국 영토와 한국 국민을 지배한 조선 총독들은 일본의 현역 육해군 대장들 중에서 임명되었으며, 이들의 한반도 지배는 일본 정부 내각의 정치 및 행정적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부적법(不適法)한 조약으로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은 조약이라는 주장을 일본 정부에게나 또는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한일 간의 역사 인식에 관한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해결할 수 없는 숙제’로 지금까지 거의 70년간을 계속 끌어 오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에 국제사회 전체가 보편적 인식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로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명백하게 소멸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를 남겨 줬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패배주의에 최면 된 노예근성의 한국 정부(특히 외교부)가 한일관계를 지금과 같은 딱한 모습으로 만들어 온 것이다. 

둘째, 독도 문제에 관한 공로명 장관의 충고를 살펴본다. “기본적으로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쁠 이유는 없다”라는 그의 법적인 논리가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부분이다. 

도서 영유권에 관한 분쟁 문제에 있어 누가 그 섬을 실효적으로 지배해 왔는가가 가장 핵심 논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국제사법 절차에 있어 이른바 ‘실효적 지배’라는 것이 대단히 전문적인 시각에서 예민하게 판단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국제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그런 ‘상식적인 점유’가 어떤 경우에는 국제법에서 말하는 ‘실효적 지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비근한 예를 들면, 많은 국민들이 한국 정부의 경찰 병력이 독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효적 지배’의 전형적인 증표로 오해하고 있지만, 캄보디아와 태국 간의 영유권 분쟁인 ‘프레야 비야 템플’ 사건에서,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캄보디아 측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하여, 12년간 이 절에 주둔하고 있던 태국 국경수비대를 쫓아낸 사례가 있다. 

독도 문제는 일반적인 해양법상의 도서 영유권 문제가 아니다 

독도 문제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해양법상 도서 영유권에 관한 분쟁’의 일반적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중요한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독도 문제는 한일 간 역사 인식의 괴리에서 연유된 ‘파행적인’ 영유권 분쟁 사례다. 다시 말해 아무런 법적 또는 역사적 근거도 없이 버젓한 한국의 영토를 느닷없이 자기네 영토라고 일본이 한국에 대해 일방적인 시비를 걸어서 발단된 영유권 분쟁이다. 

일본 제국이 한반도를 침탈하기 위한 침략전쟁의 지리적 전초기지가 독도였으며, 그런 침략 행위의 시작으로 점거했던 독도를, 단 한 번도 법적으로 성립된 적이 없는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적 권원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부적법성을 제대로 입증하거나 주장하지 못하고 한일 간에 역사 인식의 괴리(乖離)를 허용하고 있는 한, 과거 한반도에 대한 침략 행위의 시작으로 한 때나마 점거했던 독도에 대해 일본은 법적으로 충분히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만일 독도 문제가 일반적인 ‘해양법상의 도서 영유권 문제’라면, 많은 시간이 걸리는 외교적 협상과 복잡한 국제사법 절차를 수행해 나가면서 얼마든지 바쁘지 않게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독도 문제는 절대로 일반적인 해양법상의 도서 영유권 문제가 아니며, 일본이 그들의 한국에 대한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며,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정면에서 부인하고 있는 상징적인 문제다. 

때문에 한국으로서는 단 한 순간도 이를 유예하거나 참아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문제를 한일 간의 외교적 접촉이 시작된 지 5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방만하고 유치한 태도로 방치하고 유예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쁠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용서될 수 없는 무지(無知)이며, 실질적으로 국가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명백한 자기모멸 행위다. 

셋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공로명 전 장관의 권고를 생각해 보자.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아베가 지금 와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역사적 사실의 인정이나 정부적 차원의 사죄 등 더 이상의 양보를 하게 될 것인가? 아무리 아베에게 그럴 의도가 없다 해도 인권 문제를 중요하게 인식하는 국제 여론의 향배로 볼 때 일본 정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궁지로 몰릴 가능성도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이럴 경우 공로명 전 장관의 ‘친절한 권고’는 일본 측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적절하고 합리적인 절충안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국제법으로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들 

공로명 전 장관은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 동상을 철거할 것과 한국인 재일동포들이 국제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여론 환기운동 등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고 원초적으로 이를 종결시킬 것을 한국 정부가 먼저 “마중물”로 제안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이런 조치를 함으로써 일본 정부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역사적 사실의 인정이나 정부 차원의 사죄 등을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의 권고로 이해된다. 

그런데 사실상 그런 경우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사안의 논리적 순서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권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궁지에 몰려--그럴 의지는 추호도 없었지만--할 수 없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역사적 사실의 인정이나 정부 차원의 사죄 등을 하게 되는 경우, 사실상 한국 정부의 어떤 친절한 역할이 기대되거나, 일본 정부가 그것을 한국 정부에게 하나의 조건으로 요구할 명분도 근거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일본 정부 자신의 자업자득이며, 한국 정부가 거기에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것을 한국 정부가 자발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논리적으로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그런 모습은 일본 국민에게나 또는 제3국들이 보기에도 대단히 꼴사납고, 불명예스럽고, 굴욕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한일 수교가 벌써 50주년이 넘었다. 이제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오래 전부터 지적해 오고 있지만, 한일 간의 정상적 외교관계가 이뤄지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법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첫째, 1965년 6월 22일 한일 간에 체결된 ‘한일기본관계조약’이다. 그 조약 제2조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일단은 적법하게 성립되었던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결국 ‘대한제국은 당시 일제에 의해 “법적으로 멸망되었다”는 것을 한국이 인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이 당시의 법체제상 적법하게 성립된 것이었다는 이런 조약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국가적 계속성을 국가 정체성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우리 헌법상의 법적, 논리적인 전제에 모순될 뿐만 아니라, 이런 조약을 그대로 놓아두고는 한일 간의 정상적 외교관계는 불가능하게 된다. 

한일어업협정 새로 해야 

둘째, 1998년에 체결된 ‘한일어업협정’ 조약이다. 이 조약 제9조에서 동해 한가운데에 ‘중간수역’이라고 통칭되는 ‘잠정적 어업자원 관리조치수역’을 합의해 놓았는데, 아주 특이한 기하학적 다각형으로 된 이 수역이 합의되는 데는 독도 영유권에 관해 한국과 일본이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논리 필연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조약이 살아 있는 한, 한국은 절대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배제하거나 일본의 부당한 영토권 주장을 다투는 어떤 법적 추론도 효과적으로 관철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우선 이런 법적 장애부터 제거해야 한다. 아마 이 두 개의 조약을 수정하거나 폐지하는 것만 해도 외교 관례상 수월한 일은 아니다. 광복 이래 지금까지 인접 국가인 일본에 대해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관계를 이룩해 오지 못한 우리의 습관적 타성을 깨고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결연한 국가적 결의가 있어야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습관적 타성을 깨지 못한 주된 원인은, 대한민국이 법적인 원칙과 역사적인 진실에 철저하고 충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돌이켜 보면,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과 같은 견실하고 합리적인 사람들까지도 그 인습적 사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현실적인 국가적 이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적 원칙과 역사적인 진실들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끼리 편리한 대로 적당히 추구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국제 사회에서 법적 원칙과 역사적 진실들에서 벗어나는 순간, 아주 사소한 ‘현실적인 국가적 이익’조차도 우리는 누릴 수 없게 된다. 지난 50년 간의 좌절과 실패의 연속 속에서도 이런 교훈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면 우리는 구제할 수 없는 나락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해군사관학교(1962. 이학사) 
서울대 법대, 한양대 대학원(국제법 박사) 
해군대학 교수
대한국제법학회장

한국 외교 협회, 『외교』 제114호 2015년 7월. 공로명, “수교 50년, 한일 관계 전망과 해법’, pp.3~11.       

특히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조약체결권자의 흠결로 처음부터 성립된 적이 없는 부적법한 조약이라는 설명은, 졸저,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함』-(부산: 다솜출판사, 2012), “대한민국은 국제법상 일제에 의해서 멸망되지 않았다.” pp.25~42를 참조할 것.

군사적 점령(belligerent occupation)이라는 개념은 19세기 형성된 다분히 유럽적인 법 개념이며, 한일 병합 당시 서구의 국제법을 서둘러 계수(繼受)한 일본의 국제법 학자나, 해방 이후 한국의 국제법 학자들에게 이 개념은 제대로 소개되지도 않았다. 졸저, 『잘 몰랐던 한일 과거사 문제』 ·한일 과거사에 대한 국제법적 조명-(부산: 다솜출판사, 2010) pp.26~38. “국제법에서 말하는 이른바 군사적 점령이라는 개념”을 참조할 것.

한일 간의 외교문제들을 직접 다루고 있는 한국 정부의 외교 실무자들은 물론이고, 이 문제의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대부분의 한국 국제법 학자들조차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부적법(不適法)한 조약으로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았다는 점을 법적으로 명쾌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백충현 “국제법으로 본 1900년대 한일조약들의 문제점”.「한국 시민 강좌」, 제16집.(서울:일조각, 1996), pp. 76~78; 성재호, “조약법을 통해 본 1910년 병합 조약의 무효·강제에 의한 조약의 효력을 중심으로-, 동북아 역사 논총, 제29호. 2010년 9월. 동북아역사재단, pp.227~263.;  박배근 “한국병합관련조약 유무효론의 의의와 한계”,

『법학연구』(부산대), 제44권 제1호, 2003.; 박배근 “시제법적 관점에서 본 조약체결의 형식과 절차: 한국병합 관련 조약 유무효론 평가를 위한 일고,”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국제학술회의,『일본의 한국병합 효력에 관한 국제법적 재조명』, 2009년 6월 22일.

졸저, 『대한민국을 부탁해』-(부산: 다솜출판사, 2012), pp.31~33.; 졸저,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함』-(부산: 다솜출판사, 2012), pp.28~30.

Temple of Preah Vihear, Merits, Judgment, ICJ Reports(1962) 6~146.          
졸저, 『獨島 領土 主權의 危機』-(부산: 다솜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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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 2015-11-10 06:52:31
" 對日 외교가 계속 겉돈 진짜 이유
공노명 전 외무부장관의 잘못된 역사인식[역사관]관
역사란 지워 삭제 할 수 없는 영원성의 사료물이다 그래서 침략자 일제는 일찌기 후일 역사인식의 두려움을 회피하기위해 미리부터 본질을 흐리는 용어를 인용해 한반도 침략의 명분을 각본했던거다



이런 상황에서 공 전 장관은 일본이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서 역사적 사실의 명백한 인정과 사죄를 하는 경우에도 일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