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기독교의 힘’을 등에 업다
이승만, ‘기독교의 힘’을 등에 업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8.1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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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의 이승만 탐구] 이승만과 기독교③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 가운데 기독교와 독립을 연결한 유일한 인물

역사상 나라를 빼앗긴 민족은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다시 조국을 찾은 민족은 얼마이며 영원히 사라진 민족은 또 얼마나 될까.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유태인은 2000년을 유리방황했으나 그들은 조상의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체코 민족은 300년 동안 천주교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개신교, 글과 말, 토지를 빼앗겼지만 몰래 자신들의 하나님을 믿었다.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르메니아가 터키로부터 국가가 찢어지며 200만 명이 학살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르메니아 교회에 대한 믿음이었다. 700년 동안 개신교 영국의 지배를 받으며 글과 말과 천주교를 빼앗긴 아일랜드 민족을 갱생시킨 것은 성 패트릭이 가져온 천주교 믿음이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 민족이 공자의 유교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조선 민족이 그곳에서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개신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럼으로써 빼앗긴 조국을 찾는 힘을 길렀다. 그 길을 안내한 사람이 이승만이다. 

당시 미국은 세계 개신교의 중심이었다. 이승만은 그 힘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면 당시 개신교의 교세는 어떠했는가. 정말 그 힘은 의지할 만 했는가. 

1900년 4월 21일부터 5월 21일까지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한 인근 7개 대형교회에서 교파를 초월한 에큐메니컬 선교대회가 최초로 개최되었다. 미국 각 교파가 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 가운데 800여 명의 대표들이 뉴욕에 모여들었다. 

멀리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섬과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섬의 대표도 왔고, 보어전쟁 중의 남아프리카뿐만 아니라 레바논과 인도네시아 같은 회교국가에 파송된 대표도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에비슨(서울), 베어드(평양), 빈튼(서울), 리이드(개성), 밀러(서울), 해리슨(전주)이 참석했다. 

이 카네기홀의 연단 뒤에 커다란 세계지도가 걸렸는데 서반구에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동반구에는 “그러하매 가서 복음을 전하더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가운데에는 “세계가 선교의 땅일지니 좋은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다”라는 글귀로 장식되었다. 

기독교의 세계 복음화로 시작된 20세기 

연단에서 당시 뉴욕 주지사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환영사를 읽었고,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기조연설을 했으며, 대회 명예회장 벤저민 해리슨 전(前) 대통령이 답사를 했다.

글로버 클리블랜드 전 대통령은 명예회원으로 참석했고, 캐나다 수상과 총독도 참석했다. 당시 캐나다는 영국령이었으므로 총독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대리인이었다. 말하자면 미국과 영국의 최고 통치자가 참석하는 성대한 모임이 되었다. 

카네기홀에는 5000명의 청중으로 꽉 찼다. 인근의 다른 7개 교회까지 합쳐 모두 5만 명이 모였다. 이 대회를 위한 모금에 수많은 기업가가 참석했는데 록펠러, 세브란스, 워너메이커, 굴드도 있었다. 여기에 뉴욕 상공회의소 의장이 명예부회장이 되었다. 

에큐메니컬 선교대회를 준비하는 대표들은 1900년을 대회 개최의 해로 정한 배경을 알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부터 20세기에는 태평양이야말로 세계사의 중심이 되리라고 믿는다.” “선교대회는 유럽과 미국의 정치와 경제의 팽창이 기독교 정신을 땅 끝까지 채우는 때에 열어야만 한다. 미국은 필리핀 복속으로 아시아와 직접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에큐메니칼 대회가 열리던 이때(1900년 4월과 5월) 중국에서는 기독교와 외국인을 배척하는 의화단이 난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봉기의 구름이 어느 때보다 일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상관없이 기독교 정신의 범위는 확장되며 비기독교 지역의 상태의 이해를 돕게 되었고 인류의 발전이 기독교 선교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신념을 깊게 해준다.” 

북경을 비롯한 중국 북부, 특히 산동성에는 위험의 기운이 감돌았다. 뉴욕 5번가 156번 거리에 있는 장로교 선교본부는 중국에 전문을 보내 사정을 물었지만 아무 대답을 못 받자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어서 더 불안합니다.” 

드디어 이웃 5번가 150번 거리에 있는 감리교 본부에 전문이 도착했다. 

“북경. 1900년 6월 9일. 중국인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 외국인이 위험. 워싱턴에 압력.” 

감리교 선교본부 총무는 대통령의 친구였다. 그는 즉시 백악관에 중국에서 온 전문과 함께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중국의 전문)은 미국인이 매우 위급한 상태에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정부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드디어 6월 21일 서태후는 북경 주재 8개국 공사관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미 230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 많은 미국 선교사가 목숨을 잃었다.  그 해 8월에 8개국 군대가 북경에 입성하자 중국은 항복했다. 그럼에도 선교본부는 다음 사항을 의결했다. 

“선교사는 중국에서 철수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이 강제로 추방하면 한국으로 임시 피난시킨다.” 

‘세계 복음화’의 힘을 등에 업다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 선교의 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1905년 미 국무장관 헤이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문호개방정책을 한국에도 적용해줄 것을 요청했을 때 헤이는 러일전쟁 시에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철수하지 않은 데 대해 깊은 인상을 가졌노라고 대답했다. 이승만은 한국은 중국과 달라 개신교 선교사에 대한 박해가 없는 나라임을 강조했다. 

뉴욕 선교대회에 이어 1906년에는 평신도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는 1910년에 세계선교대회가 열렸다. 이때 미국 대통령이 보낸 편지를 본다. 

“악(惡)의 힘이 날로 증대되는 이때에 선(善)의 힘은 더 커지고 있다. 이 시대는 연합의 시대다. 우리가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신도 선교대회의 목표는 전 세계 15억 인구 가운데 5억 인구만이 기독교를 믿으므로 나머지 10억 인구에게 기독교를 선교하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20억 달러가 모금되었다. 다시 말하면 20세기 당대에 세계 복음화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목표가 완성되면 지상에서 그 힘을 능가할 세력은 없다. 

이승만은 20세기가 개신교 선교대회에서 시작하여 그 교세가 세계 복음화로 확장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하는 세계 기독교도의 동정을 구했다. 미국이 세계의 동정을 구하여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그 역시 그 가능성을 믿었다.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 가운데 기독교와 독립을 연결한 유일한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체코의 마사리크, 아일랜드의 드 바레라에 비견할 수 있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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