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에 대한 미국 입장 친일(親日)적 중립
청일전쟁에 대한 미국 입장 친일(親日)적 중립
  • 미래한국
  • 승인 2015.08.2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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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청일전쟁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청일전쟁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 즉 미국이 동아시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전, 다시 말해 동아시아 정책이 구체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당시 미국은 워싱턴, 제퍼슨, 그리고 몬로 등에 의해 제창된 고립주의 전통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영국을 필두로 해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 열강에 비해 동아시아의 개입에 대해 적극성이 부족했다. 

당시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이해는 오늘날처럼 안보라는 전략적 이해관계보다는 상업적, 무역적 이해관계의 비중이 매우 컸다. 대량의 잉여 생산품을 소비하기 위해 해외 시장을 개척, 상품을 팔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이다. 

1853년 미국은 페리 제독에 의해 일본을 개항시키면서 동아시아의 첫 관문을 열었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강압적으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들이 불을 질러 가라앉았고(신미양요), 이것이 오히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화시킨 빌미가 되었다. 

1876년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고, 그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입김이 날로 커지게 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청국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고,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 구미 여러 나라와의 수호 통상을 권고했고 1882년 조미(朝美)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우여곡절의 한미관계가 시작되었다. 

미국, 청일전쟁 내내 불개입·중립 고수 

조미 통상조약에서 청일전쟁 발발까지 12년 세월은 개혁개방과 부국강병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지만, 조선의 조정은 허송세월을 하고 말았다.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의존도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커져갔다. 그러나 ‘무관심한 친구’(미국)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냉철한 객관적 인식이 부족했으며, 내부의 힘든 개혁을 마다하고 쉬운 길을 택했다. 

즉 조선 조정은 러시아에 접근하여 이이제이(以夷第夷) 책략으로 외세의 침탈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그 와중에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신식 군대를 양성했으며 미국과 서구 열강으로부터 과학기술을 습득하여 부국강병의 길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노력들은 근본적이지 못했고, 지나치게 소규모였기에 형식상의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12년의 평화스런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청일전쟁 발발의 기미가 보이자 다급해진 고종은 미국에 대한 의존성을 보여준다. 전쟁 발발 한 달 반 전인 1894년 6월과 7월, 고종은 4차례에 걸쳐 청일 양군의 철군을 중재하도록 간청하는 탄원서를 미국에 보낸 점에서 고종의 답답한 심중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고종의 간청에 의해 청일전쟁에 대해 ‘원치 않는’ 마지못한 개입을 시작한다. 

▲ 1866년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지도를 보면서 작전 회의를 하는 미군 장교들. 이후 1882년 조선과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청일전쟁’에서 친일(親日)적 중립 태도를 견지했다.

미국은 왜 청일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미국은 청일전쟁 내내 철저하게 불개입과 중립적 원칙을 고수했다. 이 당시 재선 임기를 시작한 글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1893~1897)은 국내적으로는 경제공황(1893)과 풀만 노동자 파업(The Pullman Strike, 1894년 일리노이 주 풀만 시의 철도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으로, 이 파업으로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여 미 연방 휴일로 노동절이 제정됨-편집자 주 )으로 사회경제적 고통을 겪는 시절이었다. 

그는 대외정책에서 전통적인 고립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보수적 인물이었다. 이미 첫 번째 취임식에서 그는 독립, 평화, 중립을 정책의 키워드로 천명하면서 기조 핵심을 도덕성, 명예, 정의로 선정했다. 월터 그레셤 국무장관도 하와이의 병합을 반대할 만큼 반(反)제국주의 성향을 표명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1894년 한반도에 대한 적절한 개입에 실패했는가? 3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대군을 한반도에 파병했으며 조선의 구체적 개혁 의지를 보일 때까지 철병을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점이다. 

둘째, 일본은 서방 외세의 개입을 두려워했는데 이중에서 가장 두려워한 외세 개입은 영국과 러시아였지 미국이 아니었다. 실제로 청일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이 가장 의존하는 나라였다. 실례로 그레셤 국무장관은 도쿄의 주일 공사를 통해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동시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므로 개입할 필요성이 없음을 통고했다. 

만약 미국의 개입 시나리오가 있다면 1국 혹은 다자국의 강력한 군대로 개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미국의 동아시아 관계사 전문가인 타일러 데이트는 “그런 무력 행사는 유럽 열강들의 야심이 아시아를 약하게 할 공산이 크므로 극동에서의 미국의 전통적인 정책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이유를 더 첨가한다면, 보수적인 미국 여론과 한국에서 보잘 것 없는 미국의 이해관계, 그리고 동아시아에 파견할 수 있는 미국 군사력의 수준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도 대체로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을 원치 않는 논조였다. 전쟁 발발 약 3주 전인 7월 7일에서 9일 사이, 청국과 대영제국(청일전쟁 발발 당시 영국은 중국 편이었다) 측에서 워싱턴으로 한반도 위기에 대해 개입 요청이 들어왔다.

영국 측은 한 차례, 중국 측은 세 차례에 걸쳐 조선의 평화를 위해 외세 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부정적이었다. 그레셤 국무장관은 어떤 열강들의 합동 개입도 원치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7월 중순 외세 개입의 위험성이 없어졌고, 7월 25일 일본군은 한양의 왕궁(경복궁)을 점령했으며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이때 조선 조정은 다시 한 번 미국과 유럽 열강에게 개입을 간청했지만, 전쟁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종전까지, 미국 정부는 조선에 대한 불개입과 중립정책 유지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親日的 중립이 미국 입장 

미국은 청국과 일본 양 교전국들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중립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친일적 중립이었다. 실제로 그레셤은 주미 일본공사 쿠르노 신이치로(栗野愼一郞)에게 유럽 열강들의 대일(對日) 태도와 대일 정책에 대한 정보를 친절하게 전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레셤은 프랑스 측의 개입 요구에 대한 자세한 대화 내용을 쿠르노에게 알려줬다. 

그런데 전쟁의 양상은 이 전쟁을 동아시아 현장에서 자세히 관찰한 미국 외교관들의 기대치를 빗나가고 말았다. 소규모의 사기가 충천하고 효율적인 일본군이 대규모의 비효율적인 청국군을 초전부터 압도하면서 일본군이 쉽게 승리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평양전투 3주 후인 10월 6일, 영국의 주도하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4개국이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①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4개국이 함께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②중국이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 하에서 미국이 전쟁의 중재에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6일후 그레셤은 4대국의 간섭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대해 이틀 후, 영국은 그 개입이 단지 “외교적 조치”에 국한될 것이라는 설명을 추가한 답신을 보냈다. 영국조차 중국을 군사적 개입으로 적극 지원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고립무원의 한국

일본 정부는 외세 개입을 우려하여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하여 8월 중순과 10월 초에 걸쳐 유럽 열강들의 태도를 살피기 위해 외교 탐색전을 전개했는데, 여러 채널을 통해 외세 개입이 없음을 재확인했다. 즉 외세 개입을 주도한 영국이 미국과 독일의 미온적인 태도에 합동 개입 의사를 포기한 것이다. 

이에 자신을 얻은 일본은 전선을 만주로 확대했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미국 측에 “전황이 일본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 다자간 협조체제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 통고했고, 중국에게도 “화평을 원한다면 다른 나라 외교 채널을 거치지 말고 일본에 직접 통보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은 개전 명분을 쌓고 경복궁 점령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 정치 개혁을 강하게 압박했는데, 그것이 7월부터 시작된 갑오개혁이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불개입과 중립 원칙을 천명했지만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턱대고 조용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두 가지 차원에서 미국의 개입이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한양에 체류한 미국 공사를 통해 고종에게 은밀한 정책적 권고를 하는 것이었다. 

고립무원에 처한 고종은 갑오개혁의 진척에 대해 미국 공사의 견해를 자주 물었다. 미국 공사는 고종에게 자문회의를 둬 일본 측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되, 이미 조선에서 시행하려 했던 개혁조치지만 일본군의 강점 하에서는 민중들의 반발로 인해 시행하기 어려우니 우선 일본군 철수를 주장하라고 권고했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는 미국 내 여론을 통한 개입이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는 일본의 행위를 “극동에서 사회적, 정치적 개척자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고 극찬하면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과 복지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편승하여 미국 대중들은 전쟁 기간 내내 친일적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미국의 신문과 잡지들은 이구동성으로 “일본인들은 동양 문화에 저항한 문화전쟁에서 서양을 대변한다”라든가, “일본의 승리는 조선 독립과 복지에 득이 될 것”이라는 등 친일 논리를 양산하기 바빴다. 즉 청일전쟁은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충돌인데, 일본이 ‘서양의 대리인’으로 나섰기에 당연히 일본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친일적 사회 분위기는 “문명(일본)과 야만(중국)의 대결”이라는 논리적 비약과 아전인수적 해석을 이끌어 냈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조선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문명의 고속도로에 진입하느냐, 아니면 중국의 손아귀에서 옴짝도 못한 채 준(準)야만주의의 침체된 질곡 속에서 마냥 허둥댈 것인가의 문제로 비쳐졌다. 

믿을 것은 ‘자신의 힘’ 뿐

조선에 대한 미국인들의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신문과 잡지들의 기사와 칼럼 등의 논조가 워싱턴의 정책 입안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논조는 누가 어떤 배경에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썼는지 오늘날 한미 관계의 시점에서 연구 검토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여 20세기 초에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 일본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연승하고, 열강이 거미줄처럼 쳐 놓은 견제의 틈바구니를 헤쳐가면서 국제적 연대와 동맹을 통해 국력을 놀라운 속도로 신장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막강한 첩보력과 엄청난 로비력이 있었다. 

어쨌든, 미국은 베이징과 도쿄의 외교관들을 통해 막바지에 처한 청일전쟁의 중재에 심혈을 기울였다. 청국 정부는 대련 항 함락 이후 주중 미국공사 찰스 덴비를 통해 워싱턴의 중재를 요청했으며, 덴비는 조선 독립의 보장과 배상금 지불 등을 조건으로 일본 측에 종전을 제안했다. 

미국의 친일 분위기는 종전(終戰)까지 계속되었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선언된 날(4월 17일), 뉴욕 타임스 지는 “배상금 액수가 너무 적다”고 비판하면서 중국의 영토적 양보는 마치 “법적으로 정당한 것”처럼 주장했다.

청일전쟁은 조미 통상조약 이후 조선에 대해 별다른 흥미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던 미국이 과연 어느 정도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가의 바로미터였다. 미국은 점잖은 ‘대부(代父·godfather)’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과거 조선의 위기에서 여러 차례 보여준 것처럼, 앞으로 더 가중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서도 어떤 열의(eagerness)도 시연(試演)해 보여주지는 못했다. 1894년 여름 미국은 ‘대자(代子·godchild)’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척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의 요구대로 움직이도록 하기에는 힘이 부족했고, 가진 힘조차 충분히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일본은 강력한 무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득할 수 없는 막강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조선의 미래와 한미관계는 더 불확실한 시대로 접어들었다. 결국 조선이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대부(代父)’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힘(own strength)뿐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데 무려 36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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