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親日)과 견제’ 절묘한 2중 외교
‘친일(親日)과 견제’ 절묘한 2중 외교
  • 미래한국
  • 승인 2015.09.0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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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러일전쟁과 루스벨트의 對日정책

루스벨트 대통령, 러시아 견제 위해 일본 지원,

戰後엔 일본 기 꺾기 위해 ‘백색함대’ 파견

19세기 말 미국은 건국 초기의 목표였던 이상적인 민주적 공화국의 모습과는 달리 유럽 열강들처럼 서서히 제국(帝國)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18세기 말부터 진행된 근대화와 산업혁명의 진척이 범세계적 규모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대량생산은 불가피하게 해외 시장의 확보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동양에 대한 진출 속도가 서구 열강에 비해 훨씬 늦었던 미국은 1853년 페리 제독으로 하여금 흑선(黑線)을 동원, 무력시위와 함포사격을 통해 일본을 개방시켰고, 1882년에는 조선과 조미(朝美)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대륙으로 향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1898년에는 마닐라를 침공하여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아 제국의 깃발을 꽂았다. 

1899년에는 헤이 국무장관이 중국의 영토 보존과 중국에서의 상업적 기회균등 등을 강조한 문호개방정책을 열강에 통고했다. 1900년경에 오면서 열강 대열에 오른 미국은 늦게나마 제국주의 열차에 편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진출 최종 목표는 만주였다. 

미국의 중국 진출은 결코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열강 간에 치열한 짜깁기, 즉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줄타기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장 걸림돌로 작용한 주적(主敵)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로 지목되었다. 미국이 러시아를 경계 대상으로 삼은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청일전쟁으로 거슬러 갈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 직후 일본의 요동 점령을 반대한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러시아·독일·프랑스)이 있었고, 독일이 3국 간섭의 대가로 교주만((膠州灣·자오저우만)을 조차하자, 러시아는 즉각 무라비요프 외상의 대(對)만주 집중정책에 따라 일본이 청에 반환한 여순, 대련을 점령하고 1896년 3월 이 지역을 조차했다(25년 간).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아시아 정책은 하와이-일본-필리핀을 통해 동양을 노크하는 미국과 상해 등 남중국 시장을 선점한 영국을 크게 경악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리하여 미국과 영국은 대러 견제에서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1901년 9월,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부통령이던 시오도어 루스벨트가 권력을 승계 받으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루스벨트는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을 졸업하는 등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풍부한 해외 경험을 통해 당시 미국의 어떤 정치인 보다 국제문제에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경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을 일본에 넘긴 루스벨트 

그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고립주의 정책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펴 나갔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898년 해군 차관 시절 해군장관이 병석으로 출타중임을 이용하여 홍콩에 정박 중이던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조지 듀이 제독에게 마닐라 만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함대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여 미서전쟁(American-Spanish War)을 승리로 이끌었던 호전적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유럽 열강이 각축을 벌이던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세력 균형을 기조로 삼았다. 만주에서 러일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과 협조하여 최대의 위협국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지원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일본을 지원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기려고 했다. 

이러한 루스벨트의 동아시아 정책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는 조지 케넌이나 아서 브라운과 같은 인물들의 부정적인 대한관(對韓觀)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윌리엄 록힐의 실무적인 도움을 받아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루스벨트야말로 철저하게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18세기 후반기 서구 사회에 만연된 다윈주의의 적자생존(適者生存) 논리와 인종주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백인이 인종적으로 열등한 인종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었기에, 아시아계 황인종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강한 백인 우월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루스벨트는 황인종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졌는데, 유독 일본인에 대해서만은 특별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계기는 베이징(北京)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이었다. 루스벨트는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된 일본군의 전투 능력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당시 일본은 아시아 민족이지만 영국을 모델로 입헌정부를 수립하여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실현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공교육을 도입하고, 개항 이후 기독교를 수용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앵글로 색슨 제도를 많이 수용함으로써 러시아에 비해 서구 문명국가에 더 가까워지려고 몸부림을 쳤다. 

일본인에 대한 인종적 재평가를 가장 잘 압축하여 설명한 인물은 당시 태평양-아시아로의 진출을 주창한 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이었다. 마한은 루스벨트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친근한 관계였고, 미국의 해양력을 통한 제국주의 정책 추진에 큰 영향력을 미친 전략가였다.

마한은 1867~69년에 이로퀘스 호를 타고 일본을 방문하여 직접 목격한 후 일본을 “유럽에 입양된 아시아 민족”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의 친일적 여론 형성에 일조했다. 

일본의 치열한 對美 로비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도 가만 있지 않았다. 미국 조야에서 일본에 대한 우호적 인식의 변화는 일본 정부의 집요한 대미(對美) 홍보와 치밀한 로비력이 뒷받침이 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한 이후 서구 열강과의 외교 강화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일본에 대한 인식을 바꾸도록 하기 위해 외교 활동과 홍보 공세에 총력을 경주했다. 일본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미국 내 유력 신문과 잡지에 근대화된 일본의 실상을 알리는 글을 파상적으로 게재했다. 특히 러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홍보전을 더 강화했다. 

일본에게 가장 큰 외교적 성과로는 1904년 일본 정부가 루스벨트와 하버드대학 동문인 가네코 켄타로(金子堅太郞)를 미국에 파견한 경우였다. 가네코는 언론 기고와 강연, 그리고 유력인사들과의 면담을 통해 국익 차원에서 미국과 일본이 얼마나 많은 공통점을 가졌으며, 반면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상반된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가네코 켄타로는 “일본은 만주에서 미국이 주장한 문호개방 정책을 충실히 지킬 것이지만, 러시아는 만주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킴으로써 만주를 독점할 것이다. 만약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경제 문제나 국익의 차원을 넘어 동아시아에 서구 문명이 전파될 기반이 없어질 것이다.” “일본이 승리한다면, 동아시아를 서구 문명에 편입시킬 것이지만, 절대 군주국가인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이 지역을 절대군주가 지배하는 암흑시대로 몰고 갈 것”이라고 선동했다.

루스벨트는 가네코의 추천으로 읽은 <무사도: 일본의 영혼(Bushido: The Soul of Japan·1899)>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가 영어로 출간한 이 책은 사무라이(무사계급) 세계에서 강조하는 덕목인 충의, 예절, 용기, 명예, 신의, 검약 등을 일본 사회를 상징하는 문화로 묘사했고, 나아가 일본인을 고결하고 용감한 무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민족으로 찬양, 미화했다. 

러일전쟁에 막 돌입한 시점에서 이 책의 발간은 친일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실제로 루스벨트가 가네코에게 보낸 서신(1904. 4. 23)에서 무사도를 통해 서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음을 발견했으며, 자신도 사무라이 정신에 큰 감명을 받았음을 밝혔다. 

러일전쟁에 임박했을 즈음 루스벨트는 일본인을 “높은 수준의 문명인”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기독교 국가도 아리안 민족도 아니지만, 핵심적인 가치 면에서 러시아보다는 미국과 동질성이 더 많은 나라라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일본인들을 존경하고 신뢰한다” 

러일전쟁을 목전에 둔 1904년 1월 12일, 루스벨트는 일본에게 “우호적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통고했다. 이는 일본에게 큰 용기를 줬고, 일본은 약 한 달 뒤인 2월 8일 여순항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루스벨트는 케넌에게 보낸 서신(1904. 5. 6)에서 다음과 같이 친일 발언을 노골화 했다. 

“나는 처음부터 일본을 선호해 왔고, 일본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국제법에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 왔다. 나는 일본인들을 전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한다.” 

러일전쟁 초기 단계에서부터 루스벨트는 일본의 승리 가능성을 높게 봤다. 심지어 존 헤이 국무장관에서 보낸 서신(1904. 7. 26)에서 “일본이 문명 세계를 대표하는 진영이며,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일본 편에 서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황화론(黃禍論)의 주체는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로 설정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지상전 승리가 냉혹하게 거듭되자, 루스벨트는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일본의 잠재력에 경계심을 가지면서, 향후 일본과의 분쟁을 우려하는 통찰력을 보인다. 1904년 6월, 그는 영국 친구 세실 스프링 라이스에게 말했다. 

“일본인들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만일 그들이 이긴다면,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장차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1905년 2월 초, 루스벨트는 점증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양국을 구출할 수단으로 두 적대국을 중재하려는 결심을 굳혔다. 그 전쟁은 러시아에게 군사적 재앙을 안겨줬고, 일본 경제에는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일본의 혁혁한 승리는 루스벨트가 예상한 기대치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에게 너무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일본의 지나친 승리는 일본의 국수주의적 자존심을 부추겨 남방으로 총부리를 돌려 필리핀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루스벨트는 최근에 태평양에서 확보한 영토(필리핀)가 더 이상 위협 받기를 원치 않았다. 마침 일본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 이후 전승에 만족을 느끼고, 엄청난 전비(戰費) 부담으로 인해 더 이상 전쟁 지속이 어렵다고 보고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 러시아와의 협상을 원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 실익을 챙긴 일본은 또 다시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에서 러시아 대표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여기에 루스벨트가 러시아의 입장에 동의했다.

즉 루스벨트는 비록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에서 개입하고 협상을 이끌어 갔지만, 일본으로 하여금 배상금을 포기하도록 종용하여 어느 정도 중재의 균형을 유지했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포기하는 대가로 사할린을 분할했다. 

이 중재 노력으로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것은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들에게 은밀하게 로비한 결과도 아니고, 달러 뇌물 제공을 한 것도 아닌, 순전히 자신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루스벨트는 일본의 해군력 위협이 점증해지는 점을 간파하고 이제는 대일 견제책에 골몰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1년 뒤인 1906년 8월, 일본과의 긴장을 예측하여 해군 제독 조지 듀이와 유명한 해양 전략가 마한과 같은 현역 및 예비역 장교로 구성된 대규모 기획 조직인 해군일반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다음해에는 아들에게 보낸 서신(1907. 6. 13)에서 향후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하고 있다. 

▲ 미 백색함대의 키어사지함.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쟁 후 일본 해군력을 견제하기 위해 백색함대를 창설, 전 세계 일주 위력 항해에 나섰다.

임기 마감에 임박하여 대일(對日) 견제를 위한 루스벨트의 마지막 카드는 해양력의 강화, 즉 백색함대(Great White Fleet)의 창설로 나타났다. 듀이 제독이 루스벨트에게 “전투함대를 집결시켜 가능한 한 빨리 동양으로 파견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1908년 10월 16일, 미국 백색함대 16척의 전함은 일본 함대 전함 16척의 안내를 받아 요코하마 항구에 나타났다. 루스벨트는 백색함대의 일본 파견을 통해 ①미일(美日) 협조(cooperation)와 ②대일(對日) 경고(warning)의 두 가지 무언(無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데 일본인들 중에서 이러한 미국의 백색함대 순항의 이중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한 전략가들은 많지 않았다. 일본의 외교관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 백작은 “루스벨트의 해군력 건설은 일본을 목적으로 지향된 것이며 서구 사회에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간파했지만, 그의 견해가 일본 여론을 대변한 것은 아니었던 점은 향후 태평양에서 벌어진 첨예한 미일 대립구조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백색함대란? 

1907년 말부터 1909년 초까지 전투함정을 흰색으로 칠하고 세계를 일주한 미국 함대의 명칭이다. 백색함대는 1만1520톤에서 1만6000톤급까지 대형 전함 16척(총톤수 22만4705톤), 보급함과 병원선, 구축함까지 합쳐 총 28척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 규모의 함대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해외 진출과 미국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백색함대 세계 일주를 내보냈다. 1907년 12월 16일 출항한 백색함대는 남미대륙 남단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간 후 일본과 호주, 수에즈 운하, 지브롤터 해협 등 6만9200㎞를 항해한 끝에 1909년 2월 22일 버지니아 주 햄턴로드 항으로 귀항했다. 

백색함대의 항해를 위해 하와이 진주만이 석탄 보급을 위한 군항으로 개발되었고, 흰색으로 도색된 함정은 멀리서 눈에 잘 띄기 때문에 회색 계열로 도색을 바꾼 점, 그리고 장거리 항해를 위한 냉장고의 개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한 파나마 운하 확보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일본의 일부 군국주의자들은 미국의 노골적인 동양인 차별정책에 항의하여 미국과 전쟁 불사를 외쳤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규모의 백색함대가 요코하마 항구에 나타나 위용을 보이자 대미(對美) 개전론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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