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본고장' 눈물로 적신 사나이
'뮤지컬 본고장' 눈물로 적신 사나이
  • 김태민
  • 승인 2015.09.03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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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뮤지컬 '위안부' 만든 대한민국 청년 김현준씨

한국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렇다면 미국인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뮤지컬 '위안부(Comfort Women)'가 미국에서 '인기몰이'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알게 됐다. 미국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뮤지컬 위안부는 7월 31일부터 8월 9일까지 18차례에 걸쳐 미국 뉴욕의 맨해튼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펼쳐졌다. 22일 뮤지컬 '위안부'를 만든 청년 김현준 씨에게 1,200자 분량의 질문지를 보냈다. 다음날 그는 5,000자 분량으로 길게 답했다. 질문과 답변 모두 페이스북에서 쪽지로 이뤄졌다.


- 뮤지컬 '위안부'를 만들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기존 해외에 소개된 창작 뮤지컬처럼 애국주의에 기반을 둔 스토리라인을 만들기 싫었어요. 한국인이 만들었고 한국인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미국에서 현지에서 제대로 뚫어보고 싶었어요. 최대한 제3자의 시각으로, 한국의 스토리뿐만 아닌, 인류애를 다루려고 노력했어요.
 
일본은 악마고 한국인은 피해자라는 1차원적인 흑백 구조에서 벗어나, 제3자의 시각을 고려한 논리적인 캐릭터 배치를 추구했어요.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나쁘게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피해자로써 수동적인 것도 아니게, 그 상황(2차대전)에 맞게 변화해가는 ‘인간’을 담고 싶었습니다."

- 그게 참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스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특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엄청난 제약들을 같이 안고 가야 했습니다. 뮤지컬인데도 '러브스토리'를 넣을 수가 없었어요. 극우 일본 네티즌들은 여명의 눈동자를 예를 들며 '희생자들은 그 상황이 지옥이라고 했으면서 그 상황에서 사랑을 할 여유가 있다면 말이 안 되지 않느냐'고 트집을 잡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또한 할머니들의 의사를 모르고 진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러브스토리를 빼고 대본 작업을 시작했죠. 하지만 러브스토리, 업비트(Up beat)를 빼고 극을 진행하기는 정말 힘든 과정이었어요. 제가 읽어봐도 인터미션에 나갈 정도로 지루했거든요."

 
- 어떻게 극복하신 건가요?
 
"여러 번의 워크샵, 독회 과정을 겪으면서, 탈출이라는 소재를 이용하면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할머니들의 자유의지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 탈출기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이민식'이라는 한국인 일본군 캐릭터를 발전시켰죠. 사실 이민식이라는 캐릭터는 제가 '그 상황에서 할머니들을 구출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쓴 캐릭터입니다.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캐릭터죠. 그래서 러브스토리를 빼는 게 조금은 수월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민식은 손주 나이뻘인 저이고, 여주인공 고은은 어루만져야 할 할머니의 혼이라 여겼기 때문에, 쓰는 과정에서도 할머니의 구출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어요."

공연이 열리기 전 첫날 공연은 모두 매진됐다. 2∼3회차 공연표도 거의 다 팔렸다. 그 이후 표는 "참담할 정도로 팔리지 않았다"(김현준)고 한다. 그러나 공연이 열리고 난 뒤 입소문을 탄 끝에 '관객 몰이'를 이어갔고, 마지막 무대는 이례적으로 입석 관객까지 허용할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 성공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직접 느낀 미국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요?
 
"극 내내 우시던 관객도 많이 있었습니다. 역사에 대해서 미국인 관객들은 전혀 모르고 관람했기에, 굉장히 큰 쇼킹을 받았던 것 같아요. 모르던 역사적 사실을 갑자기 소화하려니 굉장한 충격을 받아 흐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시안들로만 이뤄진 48명의 배우들에 압도됐을 거라고 봅니다(※편집자 주: 미국에서 아시안 배우들이 캐스팅되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다).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 라인과 소녀들의 아픔을 공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뉴욕 연극계가 입소문이 워낙 빨라서 공연 2주차에는 이미 소개를 듣고 온 관객들이 많았습니다."

뮤지컬 '위안부'의 제작 비용은 미국인들과 한국 동포들 덕분에 충당할 수 있었다. 확보한 금액은 대략 1억 원. 그러나 뮤지컬 '위안부'는 한국 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 했다.
 
- 한국 기업의 지원 거부에 많이 놀라셨을 것 같은데 어떤 느낌이었는지요?
 
"사실,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 투자자들보다 투자를 유도하기 쉽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먼저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 대해 설명했어요. 라이센스 기반의 한국 뮤지컬 시장과, 티켓파워에 대해 설명드리고,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이 블루오션이라는 점을 강조했죠.
 
이어 이 뮤지컬이 최초로 오프브로드웨이에 올려지는 한국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을 어필했습니다. 향후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면 최초로 기록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슈를 끌 수 있다는 설명이었죠. 끝으로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시급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보통 3시간 정도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면 (미국 투자자는)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홀린 듯이 투자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개인 미국인 투자자들에게 받은 돈이 총 13만 불의 투자금의 80%를 넘습니다. 지난 3년은 미친 듯이 투자자들에게 브리핑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 200분과의 설전 끝에 18분이 도와주셨으니 9% 승률이었죠.
 
개인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투자 거부는, 실망스럽지만 현실인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서 저는 아직 어린 신인 연출이고, 기업들이 저를 믿고 리스크를 걸 이유는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제 꿈을 이루려면 우선 들이닥쳐보자는 게 제 방식이었습니다."

지난 21일 뮤지컬 '위안부'를 만든 청년 김현준씨가 페이스북 페이지 '뮤지컬코리아'에 공연 실황이 담긴 동영상 파일 링크를 보냈다. 페이지에 영상을 올려달라는 의미였다. 해당 영상을 올리자 그가 공유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가 보낸 영상을 다른 곳에도 공유하고자 페이스북에서 사람 좀 모인 뮤지컬 관련 그룹에는 다 들어가 봤다. 그 가운데 김씨는 몇몇 그룹에 다 가입돼 있었다. 국내 홍보에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 소재 자체가 소위 말해 '뜨기 힘든' 것 아니었나요? '망하지는 않을까' 겁나지는 않았어요?
 
"망하면 안 되니까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습니다. 사실 소재면에서, 미국 내에서는 더 비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인들은 이 스토리를 아예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미국인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내다봤습니다.  정작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 걱정이 돼요.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 어필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죠. 스토리에 더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 한국인이 뮤지컬 '위안부'를 보고 어떤 점을 느꼈으면 하나요?
 
"‘이집트의 왕자’, ‘쉰들러 리스트’ 처럼 스토리로 인류애에 대한 접근이 강력하다고 믿어요. 저희 작품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일을 넘어, 전 세계인이 본인의 딸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인류가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 하는 범죄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애국주의적으로 풀면 외국인에게 반감만 산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에서 선정성이 높은 강간, 고문, 폭행을 뺀 이유였죠. 외국인들에게 자극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스토리라인만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그들이 역사를 거부감 없이 이해하고,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게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무조건적인 반일감정으로 접근할 것이 아닌, 사실 살아계신 할머니들에게 더 포커스를 맞추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이 뒷전으로 밀리는 사례가 많아서 마음이 아프거든요."

 
- 뮤지컬 '위안부'의 다음 공연은 언제인가요?
 
"다음 공연은 현재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들과 논의 중입니다. 역시 브로드웨이 프로듀서들은 러브스토리를 넣기를 바라더라고요. 현실적으로 스토리라인의 수위를 조절할 생각입니다. 현재 한국의 몇몇 극단 및 기획사와 내년 초 한국어 라이센스 뮤지컬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중입니다."

- 차기 작품은 어떤 주제를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미국에 온 이유가 한국의 창작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아이러니하죠? 라이센스 뮤지컬 기반인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일은 정말 힘든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투자자, 프로듀서, 기획사가 라이센스에 치우쳐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창작 뮤지컬을 만드는 건, 젊은 저에게는 불가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 기획사들이 라이센스에 혈안이 되어있다면, 제가 미국에 가서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역수출로 라이센스를 한국에 되팔면, 한국 아티스트들에게 '우리도 창작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 '창작 뮤지컬이 주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나, 미국에 와보니 더 어두운 현실이 있었습니다. 미국 내 아시안 배우, 작가, 연출에게 기회는 없던 것입니다. 아시안 배우들은 전체 브로드웨이-오프브로드웨이 캐스팅된 배우중 2% 이하로 캐스팅될 정도로, 미국 프로듀서들은 아시안 배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이해가 되는 게, 아시안에 맞춰진 배역이 적기 때문이죠. 있는 배역도 스테레오 티피컬한 델리주인, 세탁소 주인, 북한군 이런 역할이 주어져요."
 
"이러한 현실을 마주한 후 제 꿈은 조금 더 커졌습니다. 한국뿐만 아닌 아시아인을 품을 수 있는 뮤지컬을 만들겠다고. 그래서 현재 많은 아시아인을 묶을 소재를 찾고 있으며, 다음 차기작은 3작품이 준비 중에 있습니다. 이번 겨울에 독회를 진행할 신작은 ‘그린카드’로 한국인 유학생이 비자 문제로 미국인 여자와 위장결혼을 하는 코미디입니다. 내년 봄 독회를 진행할 작품은 6.25전쟁을 다룬 작품이고, 그 이후 차기작은 아시안 뮤지컬 작곡가가 뉴욕에서 겪는 좌충우돌을 다룬 ‘아시안판’ 프로듀서스입니다."

- 어렸을 때부터 꿈이 뮤지컬 분야였습니까? 이번 뮤지컬을 보면 정치나 외교 사회 쪽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왜 다른 학과에 진학하지 않고?
 
"원래부터, 사람들을 동원해서 무엇을 꾸미는 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반장을 했습니다. 약간 나서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5살 때 캣츠를 보고 뮤지컬에 빠진 이후 줄곧 뮤지컬을 제작-연출하고 싶다는 꿈을 이어왔습니다. 주변에서 인문학, 사회학으로 진학해 뮤지컬 연출을 하라는 조언을 많이 해주셨지만 저는 제가 직접 경험하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해 연극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사회계몽극(Theatre for social change)에 관심이 많습니다. 뮤지컬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내에 아시안 연극인들이 받는 차별이 많기에, 아시안들을 위한 소재를 찾다 보니 위안부 문제를 한국인 뿐만 아닌 아시아인, 넘어서 전 세계인을 타겟으로 한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학교에서 교수나 친구들로부터 인정받는 학생이었나요?
 
"처음 뉴욕에 왔을 때는,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아시안이라 연극을 잘 모를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학을 온 이상 (비행기값, 생활비, 학비를 생각하면) 본전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의 교수님마다 일일이 찾아가 제 꿈에 대해 말씀드리고 조연출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학과장님도 제가 절실하게 말하는 것에 감명을 받으셨는지 곧바로 본인 조연출을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 작품 이후 다른 교수님들 조연출을 하면서 학교 내에서 인지도를 쌓았습니다. 이후에는 학교 외 작품에도 초청을 받아 점점 뉴욕 연극계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늘려 나갔습니다. 현재는 학교에서 연극부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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