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우아하게 협박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라
누군가를 우아하게 협박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어라
  • 미래한국
  • 승인 2015.09.0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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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문화코드로 본 세상]

국가는 초지일관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을 소홀히 한 나라가 살아남은 사례는 없다. 

사람을 겁박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책에는 사람이 사람을, 혹은 조직이나 집단을 협박하는 가장 우아한 방법에서부터 가장 ‘징한’ 방법까지가 총망라되어 있다. 가령 시작은 이런 식이다.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여러분이 눈앞의 현실에 근거하여 여러분의 도시를 구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장래에 관해 제멋대로 억측을 늘어놓기 위해 여기서 우리를 만난 것이라면 우리는 회담을 중단할 것이오.” 

말투가 거칠고 짧은 건 삼류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짜 위협은 예의바르고 점잖은 어조로 해야 폐부에 착착 박힌다. ‘눈앞의 현실’이란 상황 판단을 잘하라는 얘기다.

‘장래에 관한 억측’이란 상황을 무시한 채 나불대지 말라는 경고다. 장래에 대한 권리는 자기한테 있으니 함부로 주장하지 말라는 압박이다. 이어 문학적으로 완성도가 매우 높은 수사가 등장한다. 

“여러분은 우리 양쪽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감안하여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도록 해 보시오.” 

‘우리 양쪽’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방점은 ‘우리’에 찍힌다. ‘여러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마치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모쪼록 잘 생각해서 ‘알아서 길’ 것이며, 그기는 방법을 자기들에게 구체적으로 표현하라는 주문이다. 협박당하는 쪽은 그래서 항변하듯 이렇게 되묻는다. 

“여러분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듯 우리가 여러분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우리더러 정의는 말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 말하라고 하시니….”

마지막 문장은 살짝 울먹이는 것으로 보인다. 인내심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협박하는 쪽에서는 슬슬 말이 아까워지기 시작한다. 최후통첩의 순간이다.  

“여러분의 기대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여러분의 순진함에 감탄하면서도 여러분의 어리석음에 동정을 금할 수 없소. 여러분이 살아남기 위해 협상하겠다고 해 놓고는 이토록 긴 논의를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면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싶은 것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은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소.”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

복잡해 보이지만 이걸 양아치들의 말법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하, 그 새끼 말귀 진짜 못 알아듣네. 살려주겠다는데도 계속 딴 소리야. 얘들아, 묻어라.”  

이상은 기원 전 5세기 경 아테네 사절단과 멜로스 섬 의원(議員)들 사이에서 오고 간 대화다. 당시 아테네는 맞수인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는 등이 터진다. 멜로스는 새우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반드시 상호간 적대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힘을 과시하거나, 혹시 있을지 모를 화근에 대비해 미리 싹을 자를 때에도 전쟁은 유효하다. 

멜로스는 후자였다. 군대를 몰고 간 아테네는 공격을 개시하기 전 소국(小國)인 멜로스 의원들에게 항복을 타진했고 멜로스 섬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것이오. 지배할 수 있는 곳에서는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오. 이 법칙은 우리가 제정한 것도 아니고, 이 법칙이 만들어지고 나서 우리가 처음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오. 우리는 이 법칙을 하나의 사실로 물려받았고, 후세 사람들 사이에 영원히 존속하도록 하나의 사실로 물려줄 것이오.”

▲ 19세기 화가 보겔의 펠레폰네소스 전쟁 상상도.

자연의 법칙, 하나의 사실 그리고 그것을 후세 사람들에게 물려주겠다는 표현은 누구라도 같은 조건이라면 자신들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확신의 다른 표현이다. 멜로스인들은 마지막까지 아테네인들의 이성에 호소했다. 자기들을 중립국으로, 친구로 받아들이고 양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조약을 맺은 뒤 자기들 나라를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장래에 관해 제멋대로 억측을 늘어놓은’ 결과는 참혹했다. 성인 남자는 모조리 잡혀 죽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수사법(修辭法)의 나라, 소피스트들의 나라답게 아테네인들은 참 협박도 유려하게 하는구나 감탄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멜로스 회담’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국제정치에서 약자가 부르짖는 진실과 정의는 조소와 조롱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대, 정당한가? 그렇다면 그 정당함을 염라대왕 앞에 가서 읊어라”가 돌아오는 대답이다. 

조지프 나이의 꽤 유용한 책인 ‘국제 분쟁의 이해’는 우리에게 이 부분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준다. 들고 있는 사례들은 대체로 가해를 하는 쪽의 시각이다. 그 이야기는 다시 말해 국제 분쟁에서 약자의 입지가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약자에게는 입을 열 권리가 없는 것이 국제 분쟁의 본질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국익(國益)이라는 개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국익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좀 약하다. 해서 국가의 노골적인 이기주의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 국가는 항상 이기적으로 작동해야 하는가.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잘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들이 몰려온다. 네 아내와 아이들의 목을 베기 위해

아시다시피 프랑스 국가(國歌)는 가사가 살벌하기로 유명하다. “적들이 몰려온다. 네 아내와 아이의 목을 베기 위해” 뭐 이런 톤으로 진행된다. 죽을 때까지 항전하라는 독려다. 살짝 뒤집어 해석해보면 체제 수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라는 주문과도 같다. 

국가는 어떻게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최종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국민과 그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초지일관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타국(他國)은 물론 자국(自國)의 인권이나 절차적 민주주의도 일시적으로 유보시켜야 하는 것이 국가의 운명이자 역할이다. 국가의 어설픈 도덕주의나 평화주의가 위험한 이유다. 그리고 그것을 소홀히 한 나라가 살아남은 사례를 이제껏 듣지 못했다. 

세사(世事)의 흐름이 이상하다보니 국가의 목적과 역할이 자꾸만 흐트러진다. 망조(亡兆)는 급하게 오지 않는다. 석양처럼 자연스럽게 온다. 그리고 한 나라를 죽인다. 아참 이 책의 제목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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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기 2019-01-12 14:30:45
대단치도 않은 글 대게 억측스럽게 썼네요.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라는 한국에 책이 출판되기는 됐습니까? 정의라는 말의 의미좀 되새기고 다시 쓰시오. '정의란 무엇인가' 약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정의도 없습니다. 뭔놈의 정의가 강자 사이들에서나 통용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갖다붙여 어거지의 생각을 피력한 거지 이해가 안되군요. 차라리 제목을 '강자만이 가능한 겁박'이라는 짓지 그랬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