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무능으로 망한 조선①
외교 무능으로 망한 조선①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07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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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러일전쟁 전후, 격동의 동북아 정세

고종·민비의 인아거일(引俄拒日) 노선과

박근혜 정부의 반일친중(反日親中) 외교노선은 닮은꼴 

19세기에 세계 패권국은 영국이었고, 러시아는 영국의 패권에 대한 도전국이었다. 러시아는 영국에 도전하기 위해 발칸반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등으로 진출을 시도하면 영국은 이를 봉쇄 저지했다. 러시아는 자신들의 진출이 영국에 의해 좌절될 때마다 취약한 곳을 찾아 또 다시 진출을 시도하고, 영국은 이를 틀어막는 식이었다. 

러시아는 1858년 청국과 아이훈조약을 맺어 아무르강 좌안의 땅을 얻었고, 1860년 11월 14일 청국과 북경조약을 체결, 40만 평방마일의 광활한 영토를 획득했다. 이때 비로소 러시아는 조선·만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연해주에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건설했다. 

극동 지역에서의 영토 획득은 러시아에 큰 고민을 안겨줬다. 혹한의 날씨와 지형, 철도와 도로의 부재로 인해 9000㎞에 이르는 유럽 러시아와 극동 러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수단이 난감해진 것이다. 결국 바닷길을 통한 해운이 유일한 방안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가 겨울이면 얼어붙어 연중 이용이 가능한 부동항의 확보가 필수 과제로 대두됐다. 

영·러 양국은 중앙아시아에서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국력이 소진되자 1860년대에 동아시아 진출을 자제하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그 결과 잠시나마 동북아에 ‘힘의 공백’ 상황이 발생했다. 프랑스와 병인양요(1866), 미국과 신미양요(1871)가 발생한 것은 영러의 자중정책으로 인한 공백기에 한반도에서 발생한 국제적 마찰이었다. 

이러한 힘의 공백 상태는 조선 입장에서는 국력을 기르고 제도를 정비하며, 자생적 근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국가 지도부의 무능과 500여 년 이어온 사대주의 타성으로 인한 외세 의존 습성, 1870년경부터 격화된 고종·민비와 대원군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로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메이지유신으로 국가의 면모를 일신한 일본이 등장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자원과 식량 부족 현상에 직면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진출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러시아는 1871년 청령 투르키스탄(신강성 지역)을 점령하고 이리분쟁을 도발했다. 러시아는 이리분쟁을 치른 후에도 군대를 철군하지 않아 청국과 분쟁이 발생했다. 청국이 이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일본은 1874년 5월 대만을 침략했다.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인하라” 

▲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여순 공격 등으로 고경에 빠진 러시아를 비유한 삽화. 영국 주간잡지 1904년 9월 7일자.

일본이 대만을 공격하자 영국은 일본의 관심을 한반도로 유도하여 러시아의 남침을 방어하는 대항마 역할을 맡기고자 했다. 일본이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해역에서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켜 이듬해 2월 26일 강화도조약을 맺은 일, 유구왕국을 병합한 것은 영국의 심모원려에 따른 일본식 반응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모른 채 집안 싸움에 여념이 없는 조선을 위해 청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주도해 온 이홍장(李鴻章)은 묘안을 꾸며냈다. 조선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해 온 청국은 열강들과의 반복되는 마찰로 인해 조선을 독자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힘에 부치자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방(聯美邦)’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막는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것이 주일 청국공사관의 참찬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의 핵심 내용이다. 조선을 구미 열강과 수교시켜 열강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위협을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었다. 조선이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수교, 2주 후인 6월 6일 영국과 수교, 6월 28일 독일과 수교한 것은 모두 이홍장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바로 이 해 조선에서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임오군란). 구식 군대가 궁궐을 공격하자 민비는 충주로 피난하고 대원군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대원군의 권세는 한 달 만에 끝났다. 청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여 폭동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체포하여 중국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청국이 등을 떠미는 바람에 갑자기 조선과 수교한 영국은 관세가 너무 높다면서 관세율 인하를 요구했다. 영국 측의 집요한 압력에 시달리던 조선 조정은 1883년 11월 26일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도록 영국이 청국을 견제해 달라”는 조건으로 관세율을 파격적으로 인하하는 조영(朝英) 신조약을 체결했다.

아울러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에게도 동일한 관세율이 적용되었는데, 이로써 조선은 엄청난 관세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것이 구한말 조선의 재정을 극도로 악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영국이 약속했던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도록 청국을 견제한다”는 항목은 립 서비스로 끝났다. 

이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한탄하던 고종과 민비 앞에 수호천사처럼 나타난 존재가 러시아다. 청국의 실권자 이홍장의 요청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관으로 활동하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청국의 뜻과는 정반대로 극비리에 러시아와의 수교를 주선하여 조선은 1884년 7월, 러시아와 수교했다. 이 사건은 묄렌도르프가 독일 외무성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곰을 동아시아 목장으로 유인하라”는 지령을 받고 움직인 결과였다. 

조선의 대러 수교는 <조선책략> 외교노선의 전면 청산을 뜻했다. 그 해 12월 일본의 후원 하에 거행된 김옥균 일파의 갑신정변 쿠데타가 실패하고 청국의 간섭이 노골화되자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물리치기 위한 인아거청(引俄拒淸)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조선이 세계의 패권국 영국에 이어 그 패권에 도전하는 러시아와 수교하면서 조선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던 영·러 대립의 격랑에 휩싸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조선과의 수교로 자국(自國) 군함이 조선 항구에 입항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등 영국을 피해 동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를 얻었고, 만주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중국을 압박할 수 있게 됐다. 

고종은 1884년 12월 묄렌도르프를 통해 러시아에 “청일 간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조선을 보호해줄 것, 5만~6만 명 규모의 조러 연합군 구성”을 제안했다. 이것이 조·러 밀약설이다.

이와 관련, 심헌용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조러 연합군과 러일전쟁 전후 군사협력’이란 논문에서 “수교한 지 불과 몇 달 후 그 동안 위협국가로 인식되어 왔던 러시아에게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하게 되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나선 이유

조러 밀약설 정보가 새 나가자 눈에 쌍심지를 켠 영국은 1885년 4월 15일 도웰 제독이 자국 해군본부의 훈령에 따라 돌연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고 해밀튼 항이라고 명명했다.

영국군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887년 2월 27일에 가서야 러시아로부터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철수했다. 청국은 중국에 유폐시켰던 대원군을 귀국시켰고, 청국의 주 조선 외교 대표도 원세개(袁世凱)로 교체하여 친러 정책을 주도하는 민 씨 정권을 거세게 압박했다. 

조러 밀약설이 나돌자 일본은 1885년 1월 9일 조선과 한성조약을 체결(갑신정변 당시 불탄 일본 공사관과 거류민 희생에 대해 배상금 10만 원과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했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홍장과 만나 4월 18일 천진조약을 체결, 한반도에 대한 두 나라의 이견을 조정했다.

즉 청일 양군이 조선에서 동시 철병하고, 조선에 다시 군대를 파병할 필요가 있을 때는 상대방에게 사전에 문서로 통고하기로 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청국과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양국의 권리가 대등하게 조정되었다.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은 러시아에게 중대한 전략상의 변화를 요구했다. 강력한 영국 함대가 거문도에 주둔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해군기지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러시아는 해군력에 의한 자국의 극동 지역 방위가 위험하다고 판단, 모스크바와 극동 아시아를 육로로 연결하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계획을 내놓았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건설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일본은 비상이 걸렸다. 철도가 완성되면 유럽에서 극동까지 배로 45일 걸리던 기간이 철도로는 18일로 단축되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는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풀을 뜯던 기병대가 열차에 실려 3주 후면 흑룡강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면서 경악했다.

1889년 1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수상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면 러시아는 필연적으로 부동항을 조선 땅에서 구하게 될 것이니 철도 준공일이 러시아가 조선 침략을 시작하는 날”이라면서 일본은 이 위기에 대응해 군비 증강을 서둘러야 한다는 ‘군사의견서’를 발표했다. 

야마가타는 1890년 3월에는 <외교정략론>을 저술했는데, 주요 내용은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주권선(일본 국토) 방어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익선(적성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게 될 지역, 즉 조선)을 방호할 수 없다면 그 나라는 완전한 독립 국가이기를 바랄 수 없다’고 역설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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