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무능으로 망한 조선②
외교 무능으로 망한 조선②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0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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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러일전쟁 전후, 격동의 동북아 정세

인아거일(引俄拒日)의 몸통, 민비 시해 

1891년 5월, 러시아의 제위 후계자 니콜라이는 러시아 해군 함정을 타고 지중해-인도양을 거쳐 일본에 도착, 오쓰(大津) 시를 방문 중 정신이상 증세가 있는 사무라이의 공격을 받았다.

사무라이가 휘두른 검에 머리를 얻어맞은 니콜라이는 일본에 대해 지울 수 없는 증오와 복수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머리에 붕대를 맨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891년 5월 31일,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을 거행했다. 

시베리아 철도가 본격 착공되자 이익선 방어를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먼저 청국과의 전쟁을 서둘렀다. 이 와중에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이 발생했다. 농민 봉기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진압하지 못한 조선 조정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고, 천진조약에 의거 양국 군대가 동시에 파병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목표는 대만을 빼앗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이익선(조선)의 확보였다. 그런데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 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선 왕실은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이번에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외교전략으로 돌아섰다.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청국과 싸웠지만 조선이 러시아와 밀착하여 러시아가 조선을 넘보는 상황이 되자 특단의 조치를 강구한다. 인아거일 정책의 몸통인 민비를 시해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물리적으로 차단코자 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1895년 7월 13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소환하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후임 주한 일본 공사로 임명했다. 서울에 부임한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수십 명의 일본 자객을 비롯, 일본군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쳐들어갔다. 자객들은 민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민비 시해에 동원된 일본의 군국주의 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 소속원들은 깡패나 부랑자가 아니라 고도의 지적 능력을 보유한 엘리트들이었다. 미우라 고로 공사와 함께 조선에 건너와 민비 시해의 주역을 맡은 시바 시로(柴四郞)는 하버드대학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892년에는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행동대원으로 참가했던 낭인 출신의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는 도쿄제대 법학부 출신으로 후에 브라질, 루마니아 전권공사를 역임했다.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라는 저서에서 민비

시해 사건은 러시아와 일본이 즉각 전면전으로 돌입할 수 없는 형편에서 일본이 민비를 제거한 조치였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이 사건은 개인 차원이나 낭인들의 우발적인 살인사건이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의 국익이 걸린 대결이었다는 것이다. 

민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국과 일본을 배척하려 할 때마다 청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비를 견제한 것이 두 사람 대결의 큰 구도다. 따라서 민비와 대원군의 대결은 청·일과 민비의 대결이었고, 대원군은 민비 견제를 위한 청국과 일본의 도구였을 뿐이다. 

고종, 러시아 대사관으로 탈출 

을미사변으로 권력을 잡은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 등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왕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인한 반일감정이 폭발해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왕비를 참혹하게 잃고 친일파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시피 하던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세자와 함께 궁궐에서 탈출하여 서울시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俄館播遷). 

고종의 아관파천은 본인 의지라기보다는 러시아 수병들의 지원 하에 주한 러시아 공사 스페에르와 베베르가 치밀하게 계획한 작전이었다. 일본이 민비 시해로 도전하자 러시아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응전한 셈이다. 국왕을 볼모로 잡으면서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가장 먼저 친일 내각의 각료 처단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군중에게 타살되었고, 10여 명의 대신들은 일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조선 국왕이 졸지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자 일본은 충격에 빠졌다. 고무라 주타로(小忖壽太郞) 외상은 “만사는 끝장났다. 조선에서의 우리 세력은 급전직하해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았다”고 허탈해 했다. 

아관파천 기간 중인 1896년 5월 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조선 대표로 파견하여 인아거일의 의사를 러시아에 전달했다. 민영환은 베베르 공사의 주선으로 러시아 요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모스크바로 가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삼을 것을 요구해 약속 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외무대신 로바노프, 재무대신 비테를 만나 러시아 군대의 조선 국왕 보호, 러시아 군사고문관 파견 등을 요청했다. 

이 무렵 일본과 러시아는 상호 충돌 자제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1896년 5월 4일 일러 양국은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하여 800명 수준의 양국 군대 조선 주둔에 합의했다. 러시아는 한반도에 한 명의 경비병조차 발붙일 수 없었는데, 아관파천을 계기로 일본과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체류시킬 수 있게 되었다. 

또 야마가타 아리토모 특명전권대사가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기회로 1896년 6월 9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체결, 한반도에서 양국의 권익을 대등하게 하기로 합의했다. 야마가타는 러일이 한반도를 분할하자고 제안했으나 로바노프는 이를 거부했다. 

두 달 후인 7월 29일 러시아는 푸차타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러시아 교관단은 조선의 궁성호위대를 훈련시켰고, 이 경비대는 1897년 5월, 환궁한 고종이 지켜보는 앞에서 러시아식 사열을 했다. 

▲ 러일전쟁 중 여순 전투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러시아군 보병이 행군하는 모습이다.

제국주의 맹수 앞에 먹이로 던져진 중국 

베베르를 대신하여 주조선 공사로 부임한 스페에르는 부산 앞 절영도에 러시아 해군 석탄기지 건설 추진, 러시아 목재·광산·철도회사 추진, 모든 미국인 고문관들을 해임하고 러시아인 고문관을 채용하도록 했다.

스페에르는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대해 “반러 활동을 전개하는 일본과 영국 공사관의 괴뢰”라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고종이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 기도를 무산시킨 이면에는 러시아 측의 암묵적인 작용도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1897년 8월에는 13명의 러시아 장교가 추가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며, 10월에는 알렉세에프가 조선의 재정고문 및 총세무사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조선이 일사천리로 친러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지켜본 주조선 미국공사 알렌은 “조선 문제는 다 끝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궁성호위대를 훈련시킨 데 힘을 얻어 러시아군의 지휘를 받는 6000여 명의 조러 연합군 결성을 시도했다. 

그러나 비테의 주도 하에 추진되던 러시아의 한국 진출 정책은 만주 침투를 주장하는 외무대신 무라비요프와 육군대신 반노프스키가 득세하면서 만주 진출로 선회하게 된다.

게다가 1897년 12월 18일 러시아가 일본이 반환한 요동반도의 요충인 여순과 대련항을 조차하면서 극동 지역에서의 부동항 확보에 성공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전략적 관심이 크게 줄었고, 이 와중에 조러 연합군 계획은 폐기됐다. 

청일전쟁은 1880년대 아프리카 분할을 끝낸 구미 열강의 눈을 아시아로 돌리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청국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아프리카 분할 경쟁에서 뒤처졌던 독일이었다. 독일은 1897년 11월 산동반도에서 두 명의 선교사가 살해되자 청도(靑島)와 교주만을 점령했다.

독일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유는 석탄층과 철광석 등 부존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1898년 3월 영국과 독일이 공동 차관 1600만 파운드를 제공하는 대가로 독일은 교주만을 99년 간 조차하는 조약에 서명하고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 이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행동이 선례가 되어 다른 열강들도 중국에서 이권 쟁탈을 시작하면서 중국은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삼국 간섭의 주역인 러시아도 여순·대련항을 25년 간 조차하고 동청철도의 남만선(南滿線) 부설권을 가져갔다.

프랑스는 1898년 4월 광주만 조차, 운남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다 2주 후 광주만을 점령했다. 영국도 6월에 홍콩 섬의 맞은편 구룡반도를 99년 간 조차하고, 7월에는 일본이 점령했던 위해위(威海衛)와 유공도를 포함한 전 항만을 25년 간 조차했다. 

러시아, 의화단 사건 핑계로 만주 점령 

미국도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을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장악했다. 이어 미국은 1899년 청국의 ‘문호 개방’을 각국에 통지하여 미국도 동아시아 분할 경쟁에 참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유럽 열강이 무력을 이용하여 중국 영토를 빼앗았다면, 미국은 경제적 팽창이라는 방식을 앞세운 점이 특징이다. 

서양 열강들이 앞 다퉈 청국의 이권을 뜯어가자 청국의 개혁파 강유위(康有爲) 등은 하루빨리 개혁을 해야 한다는 상소를 황제(光緖帝)에게 올렸다. 1898년 6월 광서제는 ‘변법자강’을 선포하고 개혁에 돌입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은 반동을 몰고 오는 법. 불과 3개월이 못 되어 서태후(西太后)를 비롯한 수구파의 반격을 받아 100일 만에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민중들이 “외국인에게 죽음을(滅洋)”이란 기치를 내걸고 폭동을 일으켜 외국인 선교사를 죽이고 공장과 교회 등을 파괴했다. 폭동은 중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 여순 전투에서 러시아 요새를 향해 참호를 파고 돌격전을 벌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본군(일본 유미우리 신문사 제작 사진집에서).

특히 일본이 청일전쟁 배상금 보장을 위해 3년 간 군사 점령을 했고, 이어 독일과 영국이 이권을 차지한 산동성(山東省) 일대에서 1899년 3월 의화단이 봉기했다. 의화단의 봉기는 다음해에는 수도로 번져 6월부터 8월까지 북경(北京)의 공사관 거리가 의화단에 의해 봉쇄됐다. 

실력 행사에 나선 서양 열강들은 7월에 8개국이 2만 병력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천진(天津)을 공격했고, 8월 14일 북경에 돌입하여 의화단을 진압했다.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탈출하여 서안으로 달아났고, 연합군은 사흘 간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락하여 북경은 무법천지로 변했다. 

의화단의 봉기가 만주까지 번지면서 동청철도가 파괴되고, 철도 수비 병력인 러시아 병사들과 충돌하자 러시아는 7월에 만주에 파병을 개시, 10월에 전 만주 지역을 군사 점령했다.

1901년 청국은 서양 열강 11개국과 북경의정서(辛丑조약)를 체결하여 열국에 사죄사 파견, 배상금 4억5000만 냥 지불, 공사관 방위를 위한 각국 군대 배치 등 12개 조항을 허용했다. 

러시아의 만주 침공으로 일본은 비상이 걸렸다. 1901년 6월 이토 내각이 사퇴하고 등장한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은 ▲재정 강화 ▲해군 확장 ▲구주 1국과의 협약 체결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네 가지 주요 정책을 수립했다. 

그 결과 다음해인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이 조인되었다. 영일동맹은 사실상의 군사 동맹이었고, 한국에 특수 권익을 갖는다는 점을 영국에게 승인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왜 당대의 패권국 영국은 극동의 일본과 동맹을 맺었을까. 전 지구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봉쇄하느라 노심초사하던 영국은 의화단 사건을 통해 일본군이 ‘팍스 브리태니카’를 위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러시아가 동청철도 보호를 구실로 만주를 무력 점령하자 영국은 동북아에서 러시아 견제 역할을 일본이 대신 수행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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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영 2015-09-08 19:43:00
반성을 모르는 민족에게
그 필요성을 알려주신것에 감사합니다
남을 고치기 보다 자신을 고쳐야 미래가 긍정적임을 역설하신것으로 이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