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무능으로 망한 조선③
외교 무능으로 망한 조선③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0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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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러일전쟁 전후, 격동의 동북아 정세

英·美가 러일전쟁을 부추긴 이유 

영일동맹은 일본이 개전을 결심하게 만드는 중요 계기였다.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고, 광범위한 첩보망을 이용하여 러시아가 극동지역에서 전쟁준비 상태가 허술하다는 점을 파악한 일본은 조속한 개전에 착수했다. 

영국과 미국이 러일전쟁을 부추긴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양 교전국 모두가 탈진할 것이며, 두 장애물을 제거할 수 없다 해도 아시아를 수탈함에 있어 위험한 두 경쟁자를 심각할 정도로 약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미 양국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시장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노골적인 방해 공작을 펴기 위해 일본을 이용한 것이다. 

▲ 여순 전투에서 러시아 요새를 향해 포탄을 발사하는 일본군 28인치 유탄포와 포탄들. 도쿄만에 설치도어 있던 것을 급히 이동시킨 이 거포는 여순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고종은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온건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영국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은 외교관례에 따라 한국 측 문서를 수교했다. 고종은 이것을 영국이 한국의 중립을 보장한 것이라고 감사해 하며 중립 선언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영국의 충고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어 고종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영국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조던 공사에게 타진했다. 말하자면 고종은 1896년의 아관파천과 동일하게 영관파천(英館播遷)을 통해 영국에 의지하고, 영국을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고종의 기대와는 달리 영국 정부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러시아가 청국과 북경의정서를 조인한 후에도 러시아는 철도 보호를 명목으로 만주에 계속 군대를 주둔하자 열강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러시아는 1902년 4월 8일 청국과 단계적 만주 철병에 관한 협약을 맺고 러시아군을 6개월마다 세 개 지역에서 철병키로 약속했다.

10월 8일 제1차 철병은 이뤄졌으나 1903년 4월 8일이 기한인 제2차 철병부터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목단강 남부와 길림성 전역을 재점령했다. 5월에는 압록강 삼림 채벌을 한다면서 조선의 용암포를 무력 점령했다. 

심상치 않은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고무라 주타로 외상 등 주요 인사가 회의를 열어 일본은 한국에 대한 충분한 권리를 요구하고, 이에 대한 교환 조건으로 만주에 대해서는 러시아가 현재 경영에 착수한 범위에 한해서 우세하다는 점을 인정키로 결정했다. 이것이 만한(滿韓) 교환론이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은 일본의 한국 통할권은 인정하되 만주에 대한 군사 점령을 계속하여 만주 병합을 도모하고, 만주 문제는 한국 문제와 별개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제3차 철병기간인 10월 8일이 지나도 러시아가 철병을 하지 않자 일본에서는 ‘개전 불가피론’ 여론이 격렬하게 일었다.

러일 양국은 10월부터 12월까지 협상을 계속했으나 ‘만주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기로 한 러시아와 ‘만한교환론’의 일본 입장은 계속 헛돌기만 했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본 지도부는 극비 회의를 열고 참석한 회의에서 일본에 유리한 만한교환론(만주에서 러시아의 권리를 제약)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최후의 수단’, 즉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결정이었다. 

이 회의 직후인 1903년 12월 일본은 ‘군자 보충을 위한 임시 지출 실행의 건’ ‘경부철도 속성의 건’ 등 4건의 긴급 칙령이 공포되었다. 전쟁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자 니콜라이 2세 황제도 극동 지역에 동원령을 내렸고, 1904년 1월 8일 만주 등에 계엄령이 시행되었다. 

조선은 승전한 일본이 차지 

1904년 2월 4일 어전회의에서 개전이 결정됐고, 2월 6일, 구리노 주러 공사는 러시아 정부에 국교 단절 공문을 제출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여순에서 러시아 극동함대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2월 10일 선전포고를 했다. 

개전 2주일을 앞둔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은 열강에 대해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하여 엄정 중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친러시아적 성향이 짙은 벨기에 출신 고문 델코뉴의 도움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제물포를 기지로 활용했고, 대한제국의 3000명 군대를 일본군에 예속시켰으며, 고종 황제는 황궁 내 연금 상태나 다름없었다. 

일본은 1904년 5월 31일 각의에서 ‘제국에 대한 방침’과 ‘대한(對韓) 시설강령’을 결정하면서 “한국은 도저히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고 밝힘으로써 보호국화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서울의 치안을 일본군이 장악한 가운데 제1차 한일협약을 맺어 한국 정부가 고용한 외국인 고문을 대거 정리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임명했다. 그 결과 1905년 11월에는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고문이 188명에 이르게 되었다. 

1905년 5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압승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일본이 22만7000명이라는 인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얻어낸 포츠머스 강화조약 제2조는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우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일본 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도, 보호, 감리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러시아 국민들은 타열강의 국민들처럼 최혜국 국민으로서 그들과 대등하게 대우받는다는 데 합의한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기도 전인 1905년 7월 29일 일본은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어 일본 제국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키로 했다. 

▲ 러일전쟁을 종결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주역들. 왼쪽부터 러시아 대표인 비테와 로젠, 가운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우측에 일본 대표인 고무라 주타로와 다카히라 고고로.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은 러시아의 영향을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고 남사할린까지 장악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해 11월 18일 새벽 1시, 제2차 한일협약(이른바 을사늑약)을 맺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일본 정부가 접수했다.

이에 반발하여 고종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린 제2차 만국평의회에 밀사 세 명을 파견하자 일본 정부는 7월 19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 이척을 황제(순종)에 즉위시키고, 5일 후인 7월 24일에는 제3차 한일협약을 맺어 외교권 박탈, 군대 해산, 내정권 박탈, 일본인을 중앙과 지방의 요직에 임명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지 못한 이유는 러시아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3차 한일협약이 조인된 지 6일 후인 7월 30일, 러일 양국은 협약 체결에 성공했다. 이때 부속된 비밀 협약을 통해 일본은 한국 병합을 추진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제2차 러일전쟁 방지와 북부 만주와 외몽고를 세력 범위로 삼는 것에 대한 일본의 동의를 받아냈다. 

심상치 않은 대한민국 외교전선 

러일 양국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비밀 협약을 체결하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한국 군대의 해산을 명령하는 순종의 조칙이 내려오자 의병들이 봉기했다.

일본 보고서(조선주차군사령부의 ‘조선폭도토벌지’)에 의하면 1910년 한국 병합까지 일본군과 의병 사이의 전투 횟수는 2819차례, 전투에 나선 의병 수는 14만1603명, 의병 사망자 수는 17만7688명이었다. 

일본 정부는 1909년 4월 한국 병합계획을 시작하여 7월에 가쓰라 수상과 고무라 외상이 만든 ‘한국병합에 관한 건’이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1910년 4월 이즈볼스키 러시아 외상은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주러 공사와의 회담에서 “사실상 한국 병합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육군대신이 제3대 한국통감으로 임명됐다. 6월 3일 열린 각의는 한국 병합 방침을 심의하고 “조선에는 당분간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이를 통치한다”는 등 13개조를 결정했다.

말하자면 군정을 결정한 것이다. 헌법을 시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천황의 대권을 통한 통치가 이뤄지면 조선은 일본의  군부통치로서 제국 의회는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데라우치는 한국 주차군을 서울에 집중시킨 다음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합조약 조인식을 가졌다. 이 조약은 8월 29일 양국의 <관보(官報)>를 통해 동시 공포되었다.

청국의 상해에서 발간되는 일간신문 ‘신보(申報)’는 9월 1일, “아아, 한국이 멸망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러일전쟁을 미화한 <전운여록(戰雲餘錄)>을 쓴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9월 9일 ‘지도 위 조선국에 검게 먹을 칠하며 추풍(秋風)을 듣는다’는 시를 발표했다. 조선은 그렇게 망했다. 

구한말 조선의 멸망은 외교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패권국 영국은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러시아를 상대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봉쇄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동북아에서 러시아 봉쇄 역할을 일본에 위탁했는데, 국제 정세에 둔감했던 조선의 지도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한다는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을 추진하자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했다. 

영국을 미국으로, 러시아를 중국으로 바꾸면 현재의 동북아 정황이 명쾌하게 그려진다. 미국은 자신들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은 반일친중(反日親中)의 외교 노선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은 구한말 인아거일의 복사판이 아닌가 하여 모골이 송연해진다. 대한민국 외교전선, 정말 아무 문제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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