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력 총동원, 단기결전에서 승리①
국력 총동원, 단기결전에서 승리①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09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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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유

“일본은 국가방위를 위해서라면 여자까지도 총을 들 수 있는 4700만 명의 병영국가”(쿠로파트킨 장군)

러일전쟁은 아시아 국가가 유럽 열강과 싸워 이긴 최초의 전쟁이다. 그리고 승자와 패자의 역사와 운명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1945년까지 동북아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민족적 자긍심이 하늘을 찔렀다. 반면 패배한 러시아는 혁명을 불러와 공산주의라는 악성종양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존재로 전락했다. 

1903년 당시 러시아는 인구는 일본보다 세 배나 많았고, 철과 철강 생산은 60배, 국방비도 일본의 세 배나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 규모는 일본보다 6배나 많은 113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예비군과 국민군이 350만 명이었다. 러시아는 1902년부터 막심 기관총을 보유하여 화력이 증대되었으나, 신식 산악포·중포·유탄포 등을 갖추지 못해 러시아 야전포대의 무장설비 등급은 유럽 최하위였다. 

당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본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다. 쿠로파트킨 장군(당시 국방장관)은 1903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만주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러시아가 만주를 합병할 경우 일본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면서 “일본은 국가방위를 위해서라면 여자까지도 총을 들 수 있는 4700만 명의 병영국가이며, 일본은 평시에는 40만, 전시에는 10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쿠로파트킨 장군은 또 1903년 12월 9일, 전쟁을 피하기 위해 여순(旅順)을 중국에 반환하고 만주 북부에 대한 약간의 권리보상을 받으면서 중국 동부철도의 남쪽 부분을 매각할 것을 제안했다. 

보고를 받은 러시아 황제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어떤 양보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쟁을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 러일전쟁 중 철옹성 같은 러시아의 여순 요새를 향해 돌격 준비를 하고 있는 일본군. 일본군은 여순에서 참혹한 인명 피해를 당했다.

일본의 와신상담 

러일전쟁 당시 만주 주둔 육군사령관 및 극동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러시아군을 지휘했던 쿠로파트킨 장군은 <러일전쟁>이라는 회고록에서 러시아군의 패전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일본은 1867년만 해도 상비군이 보병대대 9개, 기병중대 2개, 포병중대 8개 등 총 1만 명을 넘지 않았다. 1872년 보불전쟁 이후 일본은 국민병제를 도입하여 독일식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7개 보병사단을 유지했다. 

청일전쟁에서 피의 대가로 차지한 요동반도를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으로 반환한 이후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급격한 군비 증강을 추진했다. 그 결과 청일전쟁 발발 7년 만인 1903년 일본은 육·해군을 두 배로 증강했는데 러시아는 이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러시아 참모본부는 전쟁 전 일본의 정규군과 예비군을 합쳐 40만 정도로 확신했다. 그런데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사상자와 병자는 55만4885명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150만 병력을 투입했음을 러시아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알았다. 일본은 예상했던 것보다 거의 4배의 병력을 동원한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후 10년 동안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와신상담하며 만주 지역을 샅샅이 연구했다. 만주 각 지역에 육군 참모본부 소속의 최정예 장교들을 간첩으로 파견하여 극동지역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회사에서 막노동 등 천한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일본은 극동지역의 러시아 육해군을 연구하는 수 백 명의 비밀결사 첩보대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그들을 돕는 비밀공작원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간절히 원했던 군국주의 단체 흑룡회(黑龍會·고쿠류카이)도 야쓰다 상사의 재정 지원을 받아 만주에서 후방 교란 및 스파이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그들은 러시아 극동 시베리아 지역의 상세 지도를 제작하고 연해주, 흑룡강, 동부 바이칼 지역에 수백 명의 첩보원을 파견했다. 

일본군에 대한 존경과 경의 느낀 쿠로파트킨 장군 

반면에 러시아는 일본의 전쟁 준비에 관해 정보 수집 임무를 맡은 참모본부 소속 장교는 단 한 명뿐이었다. 1904년 러시아 육군 전체에 일본어 통역관이 11명이었는데, 그 중 일본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고 한다.

쿠로파트킨 장군은 청일전쟁을 연구한 후 일본군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발전이 극도로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자신의 회고록 <러일전쟁>에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학교에선 조국을 숭배하고 사나이라면 진정한 영웅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전 국민은 일본군에 대해 존경과 애정을 느꼈으며, 젊은이들은 군복무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중국군과의 전쟁에서 승리의 결실을 빼앗은 러시아군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었다.

쿠로파트킨 장군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애국심과, 장군부터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느끼고 있던 군에 대한 존경심과 명예심 때문이었다고 분석한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회고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원치 않을 때 일본 국민들은 무기를 잡는 첫 번째 소식에 쇄도했다. 많은 일본인 어머니들은 능력검사에서 자기 자식들이 병약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자살하기도 했다. 또 많은 수의 장교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표시로 그들 자신의 장례를 치렀다.

전쟁 초기에는 포로가 된 장교들 중 많은 수가 자살했으며, 이름 있는 가문의 청년들은 군에 입대하기 위해 서로 앞을 다투었고, 조국에 헌신할 수 없는 자들은 국가의 공익을 위해 돈을 헌납했다.…

그들은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진격하기 위해 전사자들의 시신이 참호를 메웠다. 반면에 우리 군대는 혁명 선전에 물들어 있었으며, 게다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인기 없는 전쟁에서 열정도 없이 싸워야만 했다.’ 

개전 직전 러시아의 사회 분위기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혁명 전야였다. 전쟁이 진행될 때 러시아 내부에서는 니콜라이 2세 정부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전투를 위해 일선으로 떠나는 군인들에게 “항복하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생각을 하지 말라”고 선동했다.

러시아의 많은 일간지의 종군기자들은 아군의 전투작전에 대해 그릇된 보도를 했고, 적군의 작전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과장된 소식을 보내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회고다. 

‘언론은 국민의 사기를 고양하기는커녕 우리의 참패에 관한 이야기를 하여 아군의 사기를 현저히 저하시켰고, 적의 총탄으로 인한 전상자들을 충원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언론은 대중에 대하여 경계심을 심어주지 못했고 장교에 대한 신뢰를 더럽히고, 병력을 지휘하는 장교들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국민들에게는 두려움을 싹트게 했고, 전쟁에 대해 증오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내부 분위기로 인해 초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자 러시아 군인들은 총을 내던지고 “내가 왜 이 전쟁에서 몸 바쳐 싸워야 하는가? 러시아로 가는 길이 어디냐?”면서 반항하는 병사들이 상당수에 달했으며, 그들은 장교들을 비판하고 동료들을 반항심으로 물들였다. 쿠로파트킨 장군은 결론적으로 “우리 군대는 군인정신이 부족했고, 군부대 간에 퍼지고 있던 전쟁 반대 선동의 영향을 받아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고 지적한다. 

무력한 시베리아 철도, 혁명의 불온한 기운… 

쿠로파트킨 장군이 전쟁 지휘관으로서 가장 아쉬워했던 것은 수송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유럽 지역에서 극동 지역으로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했는데, 단선으로 운행되는 데다, 군데군데가 미개통이어서 효율이 엉망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수송 환경으로 인해 전쟁 발발 직전 유럽 지역에서 여순 요새로 4개의 보병중대, 2개 포병중대 및 1700톤의 실탄을 수송하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수송 수단의 한계로 인해 러시아군은 극심한 병력과 군수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그 결과 제대로 전쟁 수행을 할 수 없었다. 쿠로파트킨 장군은 “무력한 철도는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안겨 줬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부대에 합세하도록 지원병을 보내줄 수도 없었고, 사상자와 병자들을 후송할 수도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러시아군이 100만 명의 육군을 만주에 집결하여 기관총, 현대식 대포를 비롯한 보급을 받아 재정비를 완료한 것은 1905년 9월이다. 그제서야 러시아군이 결정적인 작전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가 완료됐을 때 일본은 병력과 자원이 완전 고갈되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일본군 중에는 노인과 어린 병사들도 많았다. 일본은 개전 당시 단기간에 화려한 성과를 올린 후 계기를 포착해서 평화로 유도한다는 것이 전쟁 방침이었다. 때문에 목표로 하는 결전장에 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적보다 많은 병력을 집결시켜 공격했다. 

러시아는 여순 요새 방어군이 항복한 직후인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8시간 노동, 국회 소집, 시민적 자유 등의 요구를 내걸고 평화 시위를 벌이던 군중에게 군대가 사격을 가해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고 2000여 명이 다쳤다.

이어 많은 공장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거의 모든 대학과 학교들이 폐쇄되었다. 농민들도 폭동에 가담하여 곳곳에서 테러, 스트라이크, 폭동이 이어졌다. 러시아는 만주에 집결하여 전투 준비를 완료한 100만 대군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급히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끝나버렸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회고다. 

‘일본의 육군 병력이 우리 육군을 무찔렀다고 말할 수 없다. 요양, 사하, 봉천(현재의 심양) 전투에서 8월과 9월까지 우리 군대의 일부가 전 일본 군대와 싸웠다.…

우리의 함대는 여순항과 쓰시마 전투에서 거의 전멸 당했다. 그러나 우리의 극동부대는 전멸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원부대를 받아들여 상당히 증강되어 있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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