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계로 열린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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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5.09.1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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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의 이승만탐구] 이승만과 기독교⑤

‘감옥’으로 변한 조선이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숨통은 기독교였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이다. 세계가 일본인의 선전만 듣고 우리를 판단했지만 이제 우리가 우리 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다. 우리 정부와 백성은 해외 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직후 1908년 12명의 젊은이가 미국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가운데 홍승국의 증언을 들어본다. 

3재8란의 시대 

“일본 관리들은 여권 발급을 거절했다. 한인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수 없다는 법규가 새로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국제항인 원산으로 가서 외국으로 가는 선편을 살폈으나 곧 일본 경찰의 추격 대상이 되었고 절반은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우리들은 시골뜨기로 변장을 했다. 원산을 빠져나올 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높은 산길을 넘고 황량한 들판을 건널 때 귀는 얼고 손은 감각을 잃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강만 건너면 유럽행 기차를 탈 수 있는 북방 국경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도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우리들은 다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일행 가운데 3명이 체포되었다. … 1909년 3월에 우리는 여러 번 도강을 시도했으나 5월이 되어서야 밤중에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홍승국은 마침내 미국에 가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이것이 이른바 일제 통치하의 3재8난이다. 3재란 인재, 지재, 관재이고 8난이란 생활난, 취업난, 입학난, 어학난, 여행난, 언론난, 기업난, 금융난의 민생난이다.

이 가운데 여행난은 여권을 주지 않는 것이다. 조선은 거대한 감옥이 되었다. 이것이 이승만이 취임사에서 말하는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단 하나 예외 창구가 있었다. 기독교였다. 

존 모트가 각국의 기독청년회를 모아 세계학생기독연합을 조직한 것은 여기에 속한 작은 나라에게 대외 창구를 제공한 예이다. 그는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국제적십자가 또 하나의 좋은 예이며, 국제연맹에 위치한 국제노동기구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국제기구가 1922년 현재 487개에 이르렀음을 관찰한 마사리크는 이런 현상이 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라고 크게 환영했다. 소수민족의 국가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의지하는 대외창구가 확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이 지적한 바 있는데, 그도 그 회원의 자격을 논하고 있다. 

▲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 기독교회를 발판으로 독립된 교단을 육성해나갈 뜻이 있었다. 이를 통해 세계로 나가는 대외 창구를 만들어 독립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사진은 1907년 하와이 한인 기도교회 교인들.

이승만이 한국 교회 독립을 추구한 이유 

황성기독청년회를 일본기독청년회에 귀속시키려는 일본의 음모에 이상재가 그토록 저항하여 마침내 저지한 이유나, 이승만이 귀국 후 황성기독청년회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 그리고 각종 반대와 어려움을 물리치고 하와이에 독립된 한국 교회와 독립된 한인 학교를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여겨진다.

책임 있는 독립된 조직으로 육성하여 때가 오면 세계적 연합체에 대등하게 가입하여 세계로 향한 간섭 없는 창구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숨겨진 염원에 대한 간접적 증거를 하나 들면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미국감리교단에서 독립하여 설립한 한인기독교회의 영문이름을 The Korean Christian Church에서 Korean Missions라고 바꾸고 자신을 창립자 내지 선교부장이라고 불렀다는 점이다. 미국 감리교단에 속한 하와이 감리교회들이 Hawaii Mission이라고 칭하는데 대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현재 하나에 불과한 한인기독교회를 발판으로 독립된 교단을 육성할 뜻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 장래 교단에 속하는 하나의 지체로서 Korean Missions를 이제 막 시작했고, 자신은 그 사명의 일꾼인 선교부장을 겸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는 이승만이 한국을 동양에서 처음 되는 기독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착수한 길게 준비하는 사업”으로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추측컨대 외로우면 위태롭다며 이웃과 외교를 평생토록 강조하는 이승만이었기에 한인기독교회를 한국 내의 교회와 어떤 형식으로 연계시키려는 계획을 흉중에 가졌다고 여겨진다.

그 이유는? 이승만은 “종교상 독립 자유의 근본 서지 못하고 국가의 독립 자유를 도모하는 자 없나니 … 마틴 루터가 천주교회의 속박을 타파한 후 유럽 열강의 독립사상이 발달했으며 영[국]왕 헨리 8세가 영국 교회를 세운 후로 독립 국권을 완전케 했다”라고 교회와 독립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한다. 

이승만이 마사리크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독립 교회를 세운 사실을 알았다면 이 목록에 추가했을 것이다. 또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턴대학이 중심이 되어 미국 땅에서 영국 교회 대신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번성하고 겸하여 미국이 독립한 것도 추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독립에 선행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독립이라는 점을 이승만은 앞세운다. 

“우리 한인도 조만간 장차 이와 같이 되어야 교회도 우리 교회가 완전히 서겠고 그 결과로 장차 국가적 독립도 새로 기초가 잡힐지니 … 오늘 대한 형편을 보면 내지에서는 이런 형편을 할 처지도 못 되었고 본국 교회가 아직 준비도 완전히 못 되었다 하겠으나 하와이 형편으로는 능히 교회도 자치할 만치 된지라.” 

기독교 봉쇄 획책한 일본

그 독립된 자치교회가 한인기독교회 곧 한국 선교이다. 일제는 조선을 거대한 감옥으로 만든 후 하나 남은 기독교 창구마저 봉쇄하려고 획책했다. 그것이 한국 감리교회를 일본 감리교회에 병합시키려는 음모였다. 

주한(駐韓) 선교사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국 교회를 북중국 교회와 통합시키는 일을 추진했다. 이승만은 이를 사전에 탐지했다. 독립정신이 강하고 중국에 속국이 되기를 싫어하는 이승만은 독립된 교회를 원했다. 그것이 하와이 교회가 중심이 되는 Korean Missions이다. 

“그런즉 하와이에 온 교인들은 이 기회를 가지고 한번 이용하여 스스로 한인의 만세 복리 될 기초를 세워 차차 그 영향이 미치는 대로 대세를 회복하는 것이 곧 이때에 있으니 모든 장원한 길을 보시는 이들은 이에 합동함이 가하도다.” 

이승만의 시야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 대외 창구를 세우고 이를 독립의 기초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조선에 예수교 퍼지는 것을 일본이 극히 슬퍼하는지라. 이 교가 정치와 도덕과 사회개량에 큰 기초도 되려니와 각국 인이 조선과 이렇듯 교회 상 친밀한 관계를 주는 것이 일[본]인이 제일 혐의하는 바라.” 

교회가 세계를 향한 중요한 창구라는 점을 깨달은 독립지사는 이승만 뿐이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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