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 대 1의 도박’ 멋지게 성공
‘5000 대 1의 도박’ 멋지게 성공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1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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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한국을 구한 인천상륙작전

“내가 바라는 승리란 오직 공산국 섬멸 한 마디뿐. 인천상륙은 기필코 결행한다. 공산군을 깡그리 섬멸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기 때문”(맥아더 장군)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 7합동기동부대 소속의 항공모함과 순양함, 구축함과 10군단 병력 및 한국군 등 7만여 명이 탑승한 대규모 선단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했다.

이날 동원된 유엔군 소속 해군 세력은 8개국에서 참전한 총 261척. 미 5해병연대 3대대의 선봉 공격대가 인천 수로에 진입하자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일제히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이 단행된 것이다.

▲ 인천상륙작전은 성공 확률이 5000 대 1이었던 어려운 작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감행, 멋지게 성공시켰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 측에 인천상륙을 위한 계획을 설명한 것은 한미 연합군이 낙동강 방어전을 준비하고 있던 7월 27일이다.

이날 도쿄에 있던 맥아더 장군이 예고도 없이 대구로 날아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알먼드 장군, 워커 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설명하고, 그 때까지 낙동강 전선 방어를 위한 용전분투를 부탁했다. 이날 맥아더 장군의 발언 내용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의 자서전(<정일권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북괴군은 스탈린의 용병(傭兵)”

“내가 바라는 승리란 오직 공산국 섬멸 한 마디뿐이다. 전번의 한강 시찰에서 이 결의를 굳히고,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알먼드에게 계획을 지시한 바 있다.

바로 인천상륙이다. 하나 전국(戰局)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작전 결행을 늦추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 계획은 ‘블루 하트’(Blue heart, 파란 심장)였다. 1기병사단을 상륙시키려 했다.

D데이는 7월 22일이었다. 그러나 딘 사단의 대전 방어가 위태로워서 포항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2안을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하여 미 본토로부터 2사단과 1해병여단으로 결행하려 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의 급박해진 방어에 또다시 돌릴 수밖에 없다. 인천상륙의 두 번째 연기다. 2사단과 해병여단, 하와이의 5연대 전투단 및 5개 전차대대가 8월 중순까지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천상륙은 기필코 결행한다. 공산군을 깡그리 섬멸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늦어도 앞으로 1개월 후로 잡고자 한다.

전국의 고비도 이 1개월간에 결산될 것이다. 그 때까지의 방어전에 특히 정 장군(정일권)의 한국군의 용전분투를 기대한다. 한국군은 장비나 보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으나 미군 GI(병사)들에겐 바랄 수 없는 반공 필승의 투지를 간직하고 있다. 나 역시, 이 신념을 갖고 있다….

나는 여기 낙동강 라인에 역사적인 이미지를 남기고자 한다. 즉 공산군을 막아낸 방어전의 라인으로서가 아니라, 데모크라시(민주주의)의 결집력으로써 공산 침략군을 섬멸해 나가는 반공의 스타트 라인으로 역사에 장식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은 지금 세계 적화를 노리고 있다. 그 첫 시도가 이 6·25이며, 북괴군은 스탈린의 용병(傭兵)이다.”

그러나 맥아더와 그 참모진을 제외한 미국의 거의 모든 군사전문가들은 “인천에 대군을 상륙시키는 작전은 미친 짓”이라며 반대했다.

수로가 좁아 대규모 선단의 진입에 어려움이 크고, 10m에 이르는 조수 간만의 차, 적이 좁은 수로에 기뢰를 매설할 경우 많은 피해가 예상되는 등 수많은 제약 요인으로 인해 성공 확률이 5000 대 1 정도로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5달러를 내고 5만 달러를 딸 수 있는 기회”라며 반대파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의 예언대로 5000 대 1이라는 희대의 도박은 멋지게 성공했다.

낙동강 전선의 돌파를 위해 비좁은 경상도 지역에 전력을 집중시켰던 공산군은 허리에 비수를 맞은 형국이 되었다.

중공의 수뇌부는 김일성의 인민군 남침 초기부터 미군의 한반도 서해안 지역 상륙 가능성에 대해 수차에 걸쳐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승리에 도취된 김일성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민군이 연승 행진을 하던 7~8월에 북·중 국경을 따라 중공군 최정예 부대인 4야전군에서 3개 군을 차출하여 36개 사단, 총 70만 병력과 7개 포병사단, 고사포부대를 배치했다.

인천상륙이 전격 단행되자 마오쩌둥은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가서 철의 장막을 쳐부수자”

정일권 총장은 9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천상륙작전의 D 데이가 내일이라고 보고했다. 당시 정황에 대한 정일권의 기록이다.


‘대통령은 감격어린 노안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 총반격은 언제 하게 되는가?”
16일부터라고 하자 노(老) 대통령은 “어디까지 반격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38선까지라고 답했다.


“아닙니다” 하고 대통령은 단호히 말했다. “미군은 그러할지 모르나, 우리 국군의 목표는 백두산이어야 합니다. 38선을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나의 이 결심을 명심해 주기 바랍니다!”

노 대통령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힘이 있었다.’

9월 15일 미 10군단은 상륙지점인 레드, 블루, 그린 해안에 병력과 장비를 양륙(揚陸)시키고 다음날 아침부터 서울을 향한 진격을 개시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던 국군과 유엔군도 진지를 박차고 나와 적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9월 20일 인천상륙작전 경축대회에서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가서 철의 장막을 쳐부수자”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 인천상륙작전의 선봉인 미 해병대원들이 상륙정에서 사다리를 놓고 항구에 오르고 있다.

“소련이 한국 내란에 참여하여 민주정부를 침략한 것은 민주세계를 토벌하려는 것이므로 연합군이 들어와서 공산군을 물리치며 우리와 협의하여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38선에 가서 정지할 리도 없고, 또 정지할 수도 없는 것이니, 지금부터는 이북 공산도배를 다 소탕하고 38선을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가서 철의 장막을 쳐부술 것이니….”

이날 이승만의 “38선을 두만강, 압록강까지 밀고 간다”는 발언은 미국이나 유엔과 전혀 상의 없이 발표된 것으로서, 38선 이북 지역까지 밀고 올라가 북한 지역을 수복하여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공개석상에서 최초로 밝힌 것이다.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8군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상하여 서울 외곽에서 인천상륙군과 합류한 것은 9월 27일이었다. 인민군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고 권총 하나만 들고 산으로 도망갔으며, 살아남은 인민군은 죽을힘을 다해 태백산 줄기를 타고 북한으로 가든지, 아니면 빨치산이 되기 위해 지리산, 회문산, 백운산으로 흩어졌다.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한 북한군은 7만여 명이었는데 그 중 38선 이북에 도달한 병력은 3만 명이 채 안됐다. 북한이 잃은 병력 가운데 1만여 명은 사살 혹은 사망, 1만2000여 명은 포로, 2만여 명은 게릴라가 되었다.

미국 정부 뜻 어기고 맥아더가 수도 서울 반환

알먼드 장군이 지휘하는 10군단이 서울을 탈환한 것은 인천 상륙 13일 만인 9월 28일이었다.

이 무렵 맥아더 사령부는 미 국무부로부터 “서울을 점령하더라도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복시키는 일은 국무부가 처리하겠다”는 긴급 전문을 받았다.

맥아더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유엔결의안에 의해 침략자를 물리치라는 명령을 받은 유엔군사령관이었다.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침략자를 물리쳤으면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를 복귀시킬 권한이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9월 29일 맥아더는 도쿄에서 서울로 날아와 중앙청에서 수도 서울 반환식을 가졌다. 9월 29일 이승만 일행은 항공편으로 부산을 출발, 김포 비행장에 도착했다. 비행장에는 맥아더 장군이 영접을 나와 감격의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서울 환도(還都) 기념식이 열리는 중앙청으로 이동하기 위해 출발 준비를 했다. 맥아더 장군이 대통령의 차를 앞세우도록 지시하자 이승만은 “오늘은 개선장군이 먼저 환영을 받아야 하오. 장군의 차를 앞세우시오. 이것은 한국 국민 전체의 뜻이오” 하고 먼저 출발하도록 했다.

한참을 달려 한강이 나타나자 이승만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정오부터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 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연단에 올라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가호로, 인류의 최대의 희망과 열망의 상징인 우리 유엔군은 여기 대한민국의 오랜 수도 서울을 수복하였습니다. 이제 서울은 잔학한 공산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존엄성을 누리게 되었으며,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 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들의 힘으로 되찾게 해주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충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대통령 각하. 저와 저희 장교 일동은 이 순간부터는 군무에 전념하여, 민사(民事)의 모든 것은 각하와 각하의 정부에 맡기고자 합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에 대하여 승리를 획득한 귀관의 탁월한 지휘에 심심한 사의를 표명하는 동시에 영원히 감사의 뜻을 잊지 않을 것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라는 치사와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수복 기념식이 끝난 직후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국군의 북진을 통보한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유엔이 38선을 넘도록 자기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서울 수복 기념식이 열린 다음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경무대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당시 정황에 대한 정일권의 기록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이 대통령은 첫 마디부터 여느 때와 달랐다.
“우리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에 도달했는데도 어찌하여 북진 명령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38선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자 노(老) 대통령의 노기 띤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38선이 어찌 되었다는 것인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것인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것인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다는 것인가?”

나로서는 처음 겪는 노 대통령의 노여움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잠시 후 다시 말이 떨어졌다.
“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황헌친 대령은 주저 없이 명쾌하게 답했다. “각하의 명령이면 언제라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일행 모두에게 같은 질문이 떨어졌다. 대답은 모두 하나였다. 특히 강문봉 대령은 유엔이 북괴군을 침략자로 낙인찍은 이상, 도망치는 침략자를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최경록 대령은 38선은 이미 북괴군이 짓밟은 것이니 우리 국군만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비로소 노기를 풀어 만족할 때의 얼굴로 나의 결심을 물었다.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의 군인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희들은 각하의 명령을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지키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명령을 내리신다면, 제가 현장에 가서 책임지고 결정하겠습니다.”
잠시 후 이 대통령이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우리 국군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에도 내 뜻대로 할 것입니다. 지휘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즉, 대한민국 군인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입니다.”
하고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어 나에게 주었다.

“이것은 나의 결심이오, 나의 명령입니다.” 종이에는 붓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즉시 북진하라. 1950년 9월 30일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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