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운동, 그 反체제의 약사(略史)
한국 노동운동, 그 反체제의 약사(略史)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9.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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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한국 노동운동의 뿌리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뿌리를 1945년 11월 설립된 ‘전평’에서 찾으려 노력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1848년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로 단결하는 대신 ‘민족’으로 단결해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유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이 집을 갖고 재산을 가진 중산층이 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에게는 사회주의 공산당이 아니라, 재산을 지킬 국가가 필요했다. 

<공산당 선언>이 출간된 지 꼭 100년 만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그렇게 또 67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해방 당시 45달러에서 약 420배가 늘어 2만 달러에 이르렀다.

아울러 144개국 가운데 세계경제규모 13위에 마크됐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는 내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외치며 반(反)자본, 반(反)체제, 반미(反美)투쟁을 전개해 온 단체가 있었다. 대한민국 노조가 그 주인공이다. 

1953년 戰時 하에서 노동법 제정

대한민국 노조의 DNA는 단순히 노동주의나 계급투쟁에 입각한 반자본 투쟁이라는 전통적 해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노동운동의 기원이 일제 식민지배에 맞서는 양상을 띤 반(反)외세 민족주의와 함께 반(反)자본 성격을 띠면서 생활개선 투쟁을 넘어 체제 변혁의 이념을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1920년대 식민조선의 노동운동은 원산 총파업에서 드러나듯이 소련 인터내셔널의 국제노동운동과 연계한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을 띠었다. 동시에 일본의 산업자본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항일운동의 명분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대의명분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1951년 6·25 부산 피난 시절에도 계속됐다. 특히 국영기업이었던 부산 조선방직에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사장이 임명되고 20명의 숙련자가 해고된다는 이유로 6000명이 집단 파업에 나섰던 부산 조선방직 쟁의 사건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는 치열한 전시(戰時) 상황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수도 부산에서 1953년 노동법을 제정하게 된다. 해방 이후 국내 노동세력의 힘과 방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이때 제정된 노동법은 일본의 노동법을 그대로 베낀 것이어서 대부분의 조항이 일본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낮은 한국 근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법이었다. 

▲ 생활 개선을 넘어 反체제·反자본 성격을 견지한 한국의 노동운동은 6·25 전쟁의 부산 시절에도 대규모 파업을 감행했을 정도로 정치적이었다. 이때 노조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이후 노사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당시 기업들로서는 무리하게 제정된 근로기준법을 지키기 어려웠고, 이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노사 간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한국 노동쟁의는 1970년 11월, 전태일 분신 사태를 맞아 본격적인 반체제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때를 한국 노동운동에서 자생적 공산주의 잉태 시기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후 박정희의 10월 유신 단행으로 노동운동은 변화를 맞게 된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노동법 개정을 통해 개별 노동을 보호하는 대신 노조의 단체행동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노동개혁을 실시했다. 이로써 산별노조는 사업장 단위의 노조로 재편되고, 국가 비상시의 노동파업의 경우 사전 주무관청의 신고와 조정을 받도록 했으며, 외국투자자본의 기업과 공익사업체 및 국영기업 내에서의 파업을 법률로 제한했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성과는 경제 발전에 협력적인 방향으로 한국 노조를 유인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성과는 이제까지의 노동운동이 생활개선의 문제를 넘어 반체제 이념을 견지해 왔던 면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현재 진보진영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저임금을 고수하기 위해 노동계를 탄압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즉 1960~70년대 경제개발 시기에 근로자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착취당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시대에 왜 사람들은 ‘저임금’에 목숨을 걸고 일을 하려고 했다는 건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시골 농촌에서 젊은이들이 무작정 상경해 공장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려고 했을까. 

진보적 학자들 가운데는 당시 저임금 수준이 생계비의 50%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면 더 의문이 생긴다. 생계비의 반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고 어떻게 박정희 시대 산업 근로자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떻게 자녀들을 키우고 부모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도 설명할 수 없다. 심지어 왜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 든다. 

박정희 시대는 정말로 ‘저임금’ 시대였나?

박기성 성신여대 교수와 박덕제 낙성대경제연구소 교수가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1963~2000년 시기에 노동자의 임금은 1988년 이전까지,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적정임금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진보학자들이 주장하는 생계비의 50% 저임금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문제는 이 생계비라는 것이 대단히 정치적으로 집계될 뿐만 아니라, 정해진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떤 근거로 생계비로 하느냐에 따라 생계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1984년 광공업의 평균 임금은 24.9만 원이었다. 당시 한국노총이 발표한 생계비는 46.6만 원인데 비해, 당시 학계에서 계산한 생계비는 26.8만 원이었다. 

이 문제를 연구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만약 임금이 생계비의 절반 수준이었다면 노동자 가계의 재생산은 불가능하며, 빈곤을 세대 간에 물림하는 현상이 구조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나 지난 한 세대 간 한국경제에 이런 현상은 관찰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1971년 전태일은 왜 분신했다는 것인가.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당시 전태일은 “인간은 노동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을 지켜라”라고 주장하며 분신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박정희 당시의 노동법은 부산 피난 시절 6.25 전쟁 통에 이승만 정부가 노동쟁의를 진정시키고자 일본의 노동법을 베낀 것이어서 국내 기업들의 생산성으로는 그 노동법을 지키기 어려웠다. 그러한 노동법은 박정희 시대에 전태일로 하여금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임금이 그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한 것이지, 생존 임금을 올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 당시,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은 이미 노동 생산성을 웃돌고 있었고, 그렇기에 서로들 잔업을 하려고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잔업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 불이익을 받기 쉬웠다. 기업들로서도 잔업을 해야 납품을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정희 시대의 노동운동은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급속하게 우리 사회에 반체제 이념을 띠며 부활하게 된다. 87체제 노동운동의 거점은 부천이었다. 당시 부천에는 300여 개가 넘는 중소기업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자연히 구직과 해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6·29 선언 이후 노동운동 폭발 

19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1980년대 전반기에 위축되었던 노동운동은 다시 활력을 띠면서 노동조합 수, 노동조합원 수, 노동조합 조직률, 산별연맹 수가 급격히 늘었다. 동시에 노총에 소속되지 않은 사무금융노련이 법적 지위를 획득한 독립산별노련으로 1987년 8월에 발족되었고 한국노총이나 단일노동세력에 속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취하는 지역별·업종별 노조협의회도 결성되었다. 

6·29 선언 후 자연발생적, 폭발적인 대규모 노동쟁의가 일어났는데 1987년에는 총쟁의는 3749건이나 되었다. 노동쟁의는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처음에 창원, 울산 등 경남지역에서 제조업 특히 중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노동쟁의가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경인지구에서는 제조공업 분야에서, 호남·충남지역에서는 주로 버스·택시 등 운수업 분야에서, 강원지역에서는 탄광업 분야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 시기를 지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 역시 민주노총 설립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다. 1995년 11월 11일 창립한 민주노총은 창립 당시 가입 조합원 수가 42만여 명이었다.

창립 당시에는 비합법 조직이었으나 1997년 노동관계법 개정과 함께 합법 조직이 되었고 IMF 사태를 맞아 1998년 무렵 가입 조합원수가 52만여 명으로 증가하면서 한국노총과 더불어 노동조합의 양대 전국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듯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한 민주노총은 내부적으로 자신들의 뿌리를 1945년 11월 설립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로부터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수행되지 않았으나 민주노총 이념가들의 글 속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흔히 줄여서 ‘전평’이라 불리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조선공산당 산하의 노동운동기구로 출발했다. 박헌영, 김일성, 레닌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전평은 미군정하에서 활동의 한계를 가졌고 사라지게 된다. 그러한 전평의 전통을 민주노총이 암묵적으로 계승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들에서 보이지만, 민주노총은 공식적으로 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의 종북 논란

하지만 민주노총의 관련자들이 보여준 행동들은 민주노총의 노선에 대한 친북적 성향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노조와 관계없는 행사에서 ‘주한미군 철수’나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가 하면 2012년에는 ‘북한 주민들이 고난의 행군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한다.’, 

‘북한 인권에 대한 오해는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거나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라는 내용이 담긴 ‘통일교과서’를 제작 배포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런 주장들은 북한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어서 계속 ‘종북’(從北) 논란을 빚기도 했다. 

민주노총의 정체성 문제와 비타협적 투쟁방식에 불만을 품은 인천지하철공사노조, 인천국제공항공사 노조 등이 2009년 민주노총을 탈퇴하자 같은 해 9월 통합공무원노조가 새로운 출범과 함께 민노총에 가입했다. 또 우체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공공노조)에 우편지부를 만들어 가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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