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치명적 실수 병력을 여러 곳으로 분산
북한군의 치명적 실수 병력을 여러 곳으로 분산
  • 미래한국
  • 승인 2015.09.23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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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 방어전·인천상륙작전 북한은 왜 낙동강 전투에서 실패했나?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

맥아더 원수, “한국에서 ‘제2의  케르크’는 없다” 선언.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 “사수하라, 아니면 죽음이다!(Stand or Die)”

낙동강 방어전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이었다. 앞에는 총부리를 겨눈 북한군이 ‘승리를 향해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밀려오고 있었고, 뒤에는 넘실대는 푸른 동·남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서 선택의 폭은 크지 않았다. 대한민국과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군과 끝까지 싸우다 바다 속에 수장(水葬)되든가, 아니면 일본으로 철수하든가, 그도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한판 승부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싸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국도 낙동강에서의 불리한 전황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만 참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미군이 참전하고도 한 달 간을 밀린 끝에 겨우 낙동강에서 팽팽히 대치하게 됐다. 

한반도 작전에 대한 총책임을 지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에게 최대의 수모를 안겨줬던 영·프랑스 연합군의 케르크 철수를 상기하며, ‘한국에서의 제2의 케르크’는 없다고 예하 지휘관들에게 거듭 강조했다.

한국에서 유엔 지상군 작전을 총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도 “사수하라. 아니면 죽음이다!(Stand or Die)”를 외치며 불퇴전(不退戰)으로 맞섰다. 그런 점에서 낙동강 방어전은 6·25 전쟁 최대의 분수령이었다. 

처음 낙동강의 전세는 북한군에게 유리해 보였다. 남침 이후 북한은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고 공격하는 입장에 있었고, 한미 연합군은 수세(守勢)로 맞서며 방어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침 이후 북한군은 공세(攻勢)를 늦추지 않았다.

그 결과 남침 개시 40일도 못돼 북한군은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 지역을 석권하며,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최후의 교두보로 설정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들의 최종 전쟁 목표인 부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김일성이 서울 함락 이후 더딘 공격을 질타하며 북한군에게 강력히 지시했던 8월 15일까지, 남한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라는 명령이 곧 완수될 단계에 이르렀다. 이른바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인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은 매번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을 종결지을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다.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진 꼴이었다. 그 결과 낙동강 방어전에서 북한군은 승리를 목전(目前)에 두고 퇴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북한군은 국군과 미군이 구축한 낙동강 방어선 전체 전선에 병력을 투입해 소모적인 공세를 벌임으로써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전력이 급격하게 약화된 북한군은 한미연합군의 반격에 모든 부대의 지휘 첵계가 무너져 후퇴했다.

병력의 집중 원칙이 무시된 반복적 소모 공세

낙동강 방어전에서 북한군에게는 ‘결정적 승리 전략’이 없었다. 북한군이 판단하기에 낙동강방어선에서 부산에 이르는 길목은 모두 다섯 곳이었다.

▲마산에서 부산에 이르는 길 ▲창녕에서 밀양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길 ▲왜관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길 ▲영천에서 경주 또는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길 ▲포항에서 울산을 거쳐 부산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중 미군이 담당한 곳은 마산-부산 축선, 창녕-밀양-부산 축선, 왜관-대구-부산 축선 등 세 곳이었고, 국군이 담당한 곳은 영천-경주 또는 부산 축선과 포항-울산-부산 축선 등 두 곳이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뚫려 부산이 점령되면,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나게 돼 있었다. 북한군은 이 다섯 곳에 대해 반복적으로 계속 공격했다. 

북한군은 전력의 집중과 분산의 원칙을 무시한 채, 전 축선에 병력을 투입해 소모적인 공세를 펼쳤다. 계속되는 공세에 북한군의 전력은 점차 고갈됐다. 그런 상태에서 한 곳을 돌파해도 전과 확대를 위한 전략 예비가 없어 이를 승리로 연결 짓지 못했다.

기껏 돌파구를 확장해 놓고도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마산 -부산 축선에서 그랬고, 창녕-밀양 축선에서 그랬고, 영천-경주 축선에서 그랬고, 포항-경주 축선에서 그랬다. 

과도하게 늘어진 병참선 문제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매번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결전이 강요된 지역에서 적보다 항상 전력의 절대 우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적의 주력이 배치된 지역에는 최소한의 병력으로 견제한 후, 적의 약한 지점을 골라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이용해 승세를 굳혔다. 그리고 적의 주력이 지향된 곳을 집중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낙동강에서 북한군은 그렇지를 못했다. 모든 축선에 병력을 균등하게 투입하여 공격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 논리였다. 여기에는 전략도 전술도 없었다. 무조건 힘으로 한 번 밀어붙인다는 식이었다.

덕분에 운 좋게 어느 한 곳이 뚫려도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승리를 굳힐 후속의 전략예비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그렇게 낙동강에서 점차 전력이 소진돼 갔다. 

맥아더가 ‘세기의 도박’이라 알려진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한 가장 큰 이유는 병참선 차단이었다. 세계 전쟁사에 정통한 맥아더는 인류 역사상 전쟁 승패의 80%가 병참선 차단에 의해 결판난 것으로 인식했다. 맥아더는 소련 국경에서 서울을 거쳐 낙동강으로 길게 이어진 북한군 병참선의 허리에 해당하는 수도 서울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 작전이 바로 인천 상륙작전이다. 

낙동강 방어전에서 북한군에게 가장 불리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과도한 병참선의 신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의 병참선은 유엔 공군에 의해 곳곳에서 차단돼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 전투에 필요한 탄약과 유류, 식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북한군은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추수(秋收) 이전이라 현지에서의 식량 조달도 만만치 않았다. 낙동강에서 북한군 병사들은 하루 두 끼 식사로 만족해야 했다. 영천을 돌파하여 경주로 진출했던 북한군 전차들이 경주 북방에서 유류가 고갈돼 멈춰 섰다.

북한군 보급의 한계를 드러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은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군대’로 변해갔다. 그런 북한군에게 승리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독일군 제6군이 전원 소련군에게 항복한 것도 결국은 보급품 부족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원수(元帥)는 명예를 소중히 여겨 자결할지언정 항복하지 않는다”며, 사령관 파울루스 장군을 부랴부랴 원수로 진급시키며 달랬지만, 혹한에 보급품 지원 없이 싸울 수밖에 없었던 파울루스 사령관은 결국 항복을 선택했다.

북한군 사단 참모장(이학구 총좌)과 포병 연대장(정봉욱 중좌)이 잇달아 투항한 것도, 북한군의 그런 문제점과 한계를 여실히 드려낸 경우에 해당된다. 
 
제공권과 제해권의 상실 

낙동강에서 북한군은 극심한 병력 및 물자 부족을 겪었다. 전쟁 초기부터 북한은 제공권(制空權)과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북한군의 전투물자는 대부분 소련으로부터 북한으로 유입됐다. 이들 보급품은 주로 육로로 수송됐기 때문에 곧 한계에 부딪쳤다. 미국의 우세한 공군력에 의해 병참선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유엔 공군의 폭격을 피해 밤중을 이용해 인력과 가축을 이용하여 보급품을 운반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잃은 상태에서 낙동강까지 진출한 북한군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라는 긴 자루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한미 연합군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보급품은 유엔 공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기 때문이다. 

대구를 공략하기 위해 왜관에 병력과 물자를 집중하자, 유엔 공군은 98대의 B-29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그곳을 초토화시켰다.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북한군은 기겁을 했다. 이후 북한군은 병력과 물자를 집중하지 못했고, 어느 한 곳에 집중하여 공격할 수도 없었다. 

이렇듯 낙동강에서 북한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백했다. 전쟁 초기에 비해 전장 환경이 크게 변화됐는데도 북한군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보급체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군이 참전하고, 제공권과 제해권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인 소모 공세만을 펼쳤다.

그 이면에는 김일성의 전쟁에 대한 ‘낙관적 기대(그러다 이기겠지?)’와 스탈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바라는 소극적인 자세(소련 지원 없이 북한 단독의 승리 희망)’도 크게 작용했다. 

전쟁의 승패는 ‘낙관과 희망’이 아니라 전력의 우위에 따라 결정된다.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라는 미국의 철저한 전쟁수행방식이 마침내 낙동강의 승리를 가져왔다.

여기에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의 구국(救國)을 향한 총력전도 크게 한몫 했다. 그 결과 한미 연합군은 ‘살얼음판 같은 낙동강의 혈전(血戰)’을 극복하고,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총반격의 기치를 올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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