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에서 영변까지 27일간 1000km 북진
다부동에서 영변까지 27일간 1000km 북진
  • 미래한국
  • 승인 2015.09.25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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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 방어전·인천상륙작전-낙동강 전투 참전 학도병의 수기

많은 참전자들이 인터뷰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하나같이 “배고프고 추운 것”이라는 대답을 한다. 왜 춥고 배고픈 때가 없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런 기억은 없다.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입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입었다. 

▲ 류형석 세무사(6·25 당시 육군 1사단 11연대 1대대)

밥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에는 진짜 주먹만 한 주먹밥을 주었는데, 반찬은 밥 속에 된장(공장에서 만든)을 손가락 두 마디 만큼 넣거나 소금으로 비벼서 주었다.

그러나 매일 건빵이 한 봉지씩 나왔고 1주일에 미군 전투식량 시레이션(C-Ration)이 한 박스씩 나왔다. 이것들은 내가 그때까지 구경은커녕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들이다. 틈만 나면 건빵을 먹었다. 시레이션은 영양가가 충분한 야전 식량이다. 배고플 여가가 없었다. 

북진을 시작하고부터 하루 한 끼는 갈비국이 나왔고 밥도 밥그릇에 담아 먹었다. 가끔 김치도 나왔다. 

9월 말이 되어 날씨가 쌀쌀해지자 야전 점퍼가 나왔다. 겨울이 되니까 내복이 나오고 외투가 나왔다. 이런 게 있는 줄은 알았지만 내가 이런 것을 입을 줄은 상상도 못해 본 것들이다. 훈련화도 나왔다. 농구화처럼 생겨서 농구화라고 했다. 전투화다. 

다부동에서 영변까지 강행군 

내가 전선에 있을 때 참호 입구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졸면 죽는다.’ 

전투하는 군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잠이다. 틈만 나면 잔다. 한 달간 강행군을 하다 보니 피로에 지쳐 잠자는 것 밖에 하고픈 것이 없었다. 행군 중에 1시간 정도마다 10분간 휴식을 한다. 길바닥에 벌렁 누워 배낭을 위로 치켜 올리면서 철모를 뒤로 재낀다. 이렇게 하면 자세가 아주 편안하다. 코를 골면서 잠에 빠진다. 가다가 앞사람에 막혀 서고 서서는 또 잔다. 

북진할 때는 밤에도 길에서, 아니면 길가의 밭이나 산비탈에서 잠을 잤다. 옷 입은 채로, 신을 신은 채로. 가까이 동네가 있으면 민가에 들어가서 자기도 했다. 눈만 감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잠을 잤다. 

내가 북진을 시작한 날은 9월 24일이다. 대구 북방 가산에서 동명(칠곡군 동명면)으로 내려와 25번 국도를 타고 북진의 길에 올랐다. 다부동-선산-상주-보은-청주-안성-수원-서울을 거쳐 38선을 넘었고, 개성-사리원-중화를 거쳐 평양에 입성했다.

다시 안주-박천을 거쳐 10월 25일 영변(평안북도 영변군)에서 중공군을 만나기까지 27일 간 강행군을 했는데, 그 거리는 도로를 기준으로 추산해서 약 800㎞가 넘었고, 실제 행군 거리는 1000㎞에 가까웠다. 

도중에 보은과 청주 사이에 있는 피발령에서 연대를 기습한 북한군을 소탕하느라 2박 3일, 서울에서 1박, 평양에서 1박 총 4일 밤을 뺀 나머지는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했다. 하루에 100리 씩 한 달 가까이 계속 걸었다. 

발바닥에는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기를 반복하여 성한 데가 없고, 양말이 진물에 엉켜 붙어 벗겨지지 않았다. 다리가 붓고 관절이 굳어져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발은 천근같이 무겁고 무릎은 굽혀지지 않고, 일어서기도 힘 드는데 계속 가야 했다. M-1 소총을 지팡이 삼고 엉덩이는 뒤로 쭉 빼서 엉금엉금 기어갔다. 

내가 입대한 것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1일이었다. 대구 7교육대에서 10일간 교육을 받고 9월 1일 팔공산에 있는 1사단 11연대 1대대 통신병으로 배치되었다. 내 나이 16세로 대구농림중 2학년이었다. 그때 내게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학생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중학교 이상의 학생 39만여 명 가운데 학도의용대(비정규군)로 활동한 학생이 27만 명, 학도병(정규군)으로 참전한 학생이 2만7000여 명이었다. 우리는 그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1사단은 8월 한 달 동안 다부동에서 대구 진격을 목표로 집중 공세를 취한 북한군 4개 사단(3·13·15사단·105기갑사단)을 맞아 6·25 전쟁 최대의 격전을 치르면서 북한군을 궤멸시켜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던 다부동 전투 현장 

다부동 전투의 참상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포격과 폭격으로 산은 한 껍질 벗겨져서 풀 한포기 살아남은 게 없었다. 진물이 나고 냄새가 진동하는 적의 시체를 쌓아 방벽을 삼았고 적의 시체에 걸터앉아 밥을 먹었다. 포탄이 터지면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의 살점과 창자가 범벅이 되어 사방으로 튄다. 밥 먹다가도 그것을 뒤집어 써야 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나뭇가지에 시체의 창자가 걸려 있기도 했다. 주먹밥을 받으면 순간 똥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먼저 먹는다. 그래도 파리를 쫓아가며 그 밥을 먹어야 한다. 핏물이 괴인 계곡물을 마셨고 오줌도 마셨다.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 8월 1일부터 30일까지 나온 북한군 전사자는 1만2557명이다. 국군 전사자가 얼마인지는 공식 기록이 없다. 얼마나 죽었는지, 누가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에서 확인한 아군(유엔군, 경찰관 포함) 전사자는 4090명이다. 

이 숫자는 피아 모두 정확하지 않다. 낙동강 물에 떠내려간 시체를 누가 확인했겠는가! 6·25 전쟁 중 쌍방이 모두 최다의 희생을 낸 전투다. 1사단 참모장 석주암 대령은 사단에서 하루 평균 7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했고, 백선엽 사단장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 소년병으로 자원입대한 류형석 씨가 속한 국군 제1사단은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를 마치고 쉬지 않고 북진, 한미연합군 가운데 처음으로 평양에 입성했다. 사진은 국군의 평양 시가전 장면.

8월 31일 국군 1사단은 다부동 전선을 미 1기병사단에 인계하고 우측 대구 북방 팔공산(달성군 공산면)과 가산(칠곡군 가산면)으로 이동하여 마지막 불씨를 사르고 있는 북한군과 최후의 공방전을 벌였다. 소년 학도병인 내가 참전한 첫 전투였다. 

내가 속한 11연대 1대대 OP는 팔공산 정상(1192m)에 있었다. 이곳은 서쪽으로 가산(902m)으로 연결되는 산악으로 제2의 다부동 전선이었다. 가산은 대구 시내가 북한군 122㎜ 포의 사정권에 드는 지근거리에 있다. 온 산이 폭격과 포격으로 초토화 되어 잿더미로 변했고, 곳곳에선 뿌연 연기와 화염이 솟아올랐다. 

잿더미로 변한 산에서 시체를 옆에 두고 밥을 먹었고, 시체가 담겨 있는 계곡물을 마셨다.  산 전체가 시체 썩는 냄새로 진동했다. 며칠이 지나니까 그 퀴퀴하고 고약한 냄새가 익숙해 져서 구수하게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갈증을 달랜 고사를 연상케 했다. 그 구수한 냄새는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와 도로가에 흩어져 있는 군용 장비의 잔해와 더불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두 발로 걸은 국군이 10개의 바퀴로 달린 미군을 이기다 

팔공산 전투 중에는 전투기가 쉴 새 없이 공중 공격을 했고, 야간에도 조명탄을 터트려 대낮 같이 밝혀 놓고 계곡 계곡을 찾아다니며 폭격을 했다. 전장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9월 23일 밤으로 기억한다. 나는 가산에 있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들려오던 포성과 총성이 멎고 풀벌레소리만 들려왔다.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정면의 적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음날 오전에 산에서 내려와 동명(칠곡군 동명면)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북진을 시작했다. 신작로 가에는 인민군 시체, 말 시체, 자동차 등 군용 장비가 널려 있었다. 여기서도 그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 1사단은 미 1군단에 예속되어 있었다. 미 24사단과 1기병사단이 선봉에 서고 우리 1사단은 후속하며 잔적 소탕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평양 출신으로 평소에 ‘내 고향은 내 손으로 수복하겠다’고 다짐했던 백선엽 1사단장은 크게 실망했다.

10월 5일 대전에 있는 군단 사령부로 밀번 군단장을 찾아가 1사단이 선봉에 서도록 강력하게 요청하여 미 24사단과 임무를 바꿨다. 결국 미 1기병사단과 평양 점령 경쟁을 했고,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보다 빨라야 했기에 도보로 가는 국군 병사들이 강행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1사단은 10월 19일 미군보다 한 발 앞서 평양을 점령했다. 두 발로 걸어간 한국군이 열 바퀴(미군 트럭 GMC는 바퀴가 열 개다) 차로 가는 미군을 이긴 것이다. 이 전과로 국군 1사단은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고,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했다. 나는 입대 2개월 만에 일등병이 되었다. 

우리 부대는 평양에서 하루를 쉬고 다시 북진을 하여 안주, 박천을 거쳐 10월 25일 영변에서 멈췄다. 중공군에 막힌 것이다. 중공군 대부대(약 30만 명으로 추산)가 10월 초부터 들어와서 포진하고 있었던 것을 유엔군 측은 모르고 있었다. 

다시 치열한 격전을 벌여야 했다. 약 50여 일 동안 공방전을 펴다가 중동부전선이 무너지면서 다시 옛 38선으로 물러나야 했다. 

‘싸우다 죽자’는 마음으로 자원 입대 

우리 집은 경북 선산군 고아면 낙동강 서쪽 3㎞ 지점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말 우리 가족은 낙동강을 건너 피난을 가야 했다. 6·25 개전 1개월 만에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밀렸는데, 어린 마음에 피난을 간다고 살아날 가망은 없어 보였다.

그때부터 무엇인가 내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낙동강 도선장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배를 먼저 타기 위한 또 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영천 방면으로 피난을 가고 있는데 신령 부근 산비탈에서 휴식을 취하던 일단의 병사들 속에서 학생 모자를 쓰고 총을 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군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피난을 떠나면서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죽을 바에야 군에 가서 싸우다 죽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막상 군에 가려고 해도 어린 나이에 절차와 방법을 몰라 차일피일하고 있던 터에 어느 날 아침 맏형님이 방위군에게 끌려갔다. 

나는 순간 ‘지금이다’라고 판단하여 방위군 초소로 달려가서 “내가 대신 가겠다”고 형님을 돌려보냈다. 전날 셋째 형님이 입대한 마당에 맏형님마저 입대하면 만약 수복했을 때 집안일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된다. 또 그때 맏형님 나이가 만 29세로 군에 가기는 늙은 나이였다. 나는 이미 입대를 결심하고 있었으므로 입대할 좋은 기회로 삼았다. 

나보다 하루 먼저 붙들려 입대한 셋째 형님은 6사단 소속으로 그해 10월 26일 평안북도 희천에서 전사(戰死)했다. 그 곳은 내가 진격했던 영변 동쪽에 인접해 있었는데, 그 무렵 나는 중공군을 만나 격전을 치르고 있을 때였다. 우리 대대도 중공군에게 백중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다행히 경험 많은 대대장이 지휘를 잘 해서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다. 

하마터면 형제가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함께 전사할 뻔했다. 좀 뒤의 일이지만 둘째 형님은 1952년에 입대하여 1953년 7월 14일 김화 전투에서 전사했다. 휴전협정 조인 10여 일 전이다. 1924년생이니 만 28세에 입대했다. 3사단 18연대 소속이었다. 

서울을 버리고 한강을 사수했다면…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적은 병력으로 넓은 전선을 맡다 보니까 거점 방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 곳이 뚫리면 전체 전선이 무너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다.  그 해결책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전선을 축소하고 방어 진지를 연결해 적의 공세를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병력이 증원되면 반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낙동강 방어선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전략이었다. 일반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낙동강 방어선의 반전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8월에 접어들면서 북한군의 전력 손실이 커져가고 있었다.  손실된 병력의 보충수단이 없는 데다 군수 보급이 되지 않아 장비 보충이 이뤄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먹을 식량도 없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은 하루 한 끼를 먹고 싸웠고, 소총과 탄약이 없어 수류탄만 가지고 싸웠다. 이 사정을 미 8군이 파악하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여세를 감안하여 북한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 무렵 아군은 미군이 참전하고 장비가 증강되어 전력이 크게 증강돼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북한군 전력은 거의 소진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궤멸할 집단이었다. 

그런데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성공을 감안할 때, 개전 초기에 낙동강 방어선이 아니라 한강 방어선에서 적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6월 25일 당일 서부전선 개성과 중서부 의정부 방면의 전세는 파탄이 났다. 상황을 제대로 판단했다면 차선책을 강구했어야 했다. 

6월 26일 늦어도 27일에 서울을 비우고 한강 방어선을 설정했어야 했다. 6월 26일 현재 병력 현황은 옹진의 17연대는 건재했고, 개성 방면 1사단은 12연대가 분산되었을 뿐 2개 연대는 건재했다. 1사단은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된지도 모르고 봉일천에서 반격전을 펴고 있었다.  

의정부 방면 7사단은 손실이 많아 1개 연대 정도의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춘천의 6사단과 동부의 8사단은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뒤에도 건재했다. 여기에 후방에서 증원되는 2, 3, 5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등 4개 사단을 온전하게 한강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적의 남진을 저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전력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다. 그러나 우리는 적도 모르고 나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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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열 2015-09-25 10:33:23
잘 읽었습니다
글솜씨가 좋으시군요

정석수학 2015-10-08 17:42:13
감사합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오늘 제가 여기에 있을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