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주체사상 세례받다
운동권, 주체사상 세례받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9.25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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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의 시대추적] 전향한 운동권 핵심인사의 참회록②

주체사상 받아들인 운동권, 극좌 성향의 투쟁에서 벗어나 대중과의 호흡 중시

1987년 6월 항쟁, ‘호헌 철폐’ ‘독재타도’ 내세워 광범위한 투쟁 역량 결집에 성공

▲ 이동호 캠페인전략연구소장·미래한국 편집위원

이 글은 한때 잘못된 사상과 인식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현대사를 흠집 내고자 했고, 잘못된 길로 가자고 주장했던 저에 대한 고백입니다. 과거의 학생운동 경력이 더 이상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우리 사회에 대한 부끄러운 기록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의 이러한 생각이 그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 동참했던 분들에 대한 흠집 내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한 마음을 이용하고자 했던 좌익운동권에 대한 저의 반성적 접근으로 헤아려 주십사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③주체사상 도입과 자민투-민민투에서 건국대 사태까지

1985년 말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이전까지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운동의 지도사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하고, 그 혁명노선을 학생운동에 적용한 것이다. 1985년까지 학생운동은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론자들이었으나, 이 시기부터 학생운동은 주사파가 장악하여 학생운동의 대세를 형성한다. 

주체사상의 학생운동 내의 수용과정은 1983년에 학원가에 유포되었던 <예속과 함성>이 그 시작이었다. 1985년 9월 당국에 의해 구미 간첩단 사건의 주범(主犯)으로 밝혀진 김성만, 양동화 등이 북한 혁명론을 남한의 학생운동에 소개한 것이다. 이들은 책자에서 한국은 1945년 이래 미국의 식민지이며,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은 미국에 의해 양성·조종되는 괴뢰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자는 당시 학생운동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아직 이런 주장은 학생운동 내에서 본격적으로 수용되지는 않았다. 

주체사상의 본격적인 수용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김영환의  단재사상연구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 김영환은 단파 라디오로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집중적으로 청취하는 한편, 여기서 제기되는 남한 혁명론을 토대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cy Revolution)을 본격 제기했다. 이는 1960년대의 통혁당, 1970년대의 남민전 이후 최초의 조직적 형태를 띤 반(反)제국주의 세력의 등장이며, 학생운동을 모태로 출발하는 것으로는 최초였다. 

한국 사회의 주적(主敵)을 미 제국주의로 규정 

김영환 그룹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삼민투 NDR론과 치열한 사상투쟁을 전개하여 그 세력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은 <반제민중 민주화 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일명 ‘해방서시’)라는 소책자를 학생운동권에 광범위하게 전파했다. 

이 소책자에서 그들은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한반도 근대사 100년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요,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투쟁 역사다. 한국 사회는 미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그간의 학생운동이 미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과 민중의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주시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학생운동 내부에 커다란 충격과 파급을 가져왔다. 

이제까지 학생운동은 주요한 운동의 대상, 즉 주적(主敵)이 독재정권과 그들의 물적 토대인 독점자본이라고 보았으나, 이들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적은 미국, 다시 말해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인식은 오늘날 반미운동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386 핵심 운동권의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의 주요한 기조를 이루고 있다.

주사NL파는 치열한 사상투쟁으로 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하는 한편, 서울대를 필두로 지하 지도부를 건설했다. 1986년 3월 29일 서울대에서 비합법 지도부인 구국학생연맹(이하 구학련)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반(半)합법 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일명 자민투)를 1986년 4월에 발족시켰다. 그 산하에 반전반핵(反戰反核)투쟁위원회 등 5개 투쟁위원회를 뒀다. 

구학련의 투쟁기구인 자민투는 1986년 4월 반전반핵투위를 중심으로 반전반핵 투쟁과 전방 군부대 입소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김세진, 이재호 등이 분신을 감행했다. 

자민투의 선동적인 구호와 투쟁은 당시 학생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줬고, 이를 토대로 자민투는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급속히 장악했다. 또 기관지로 <해방선언>을 발행해 전체 학생운동에 그들의 혁명론을 파급시켜 나갔다. 

좌편향 된 운동 방향에 대한 자성

1985년 하반기 NDR론 하에 삼민혁명론으로 통일되었던 학생운동은 1986년 초 NLPDR론(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으로 무장한 자민투가 반제국주의 직접 투쟁과 반전반핵 투쟁을 선언하자, 기왕의 MT 계열은 NDR론을 기본 골간으로 계승하면서 반제반파쇼 투쟁을 선언하는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 투쟁위원회(일명 민민투)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민족민주선언>을 발행했다.

이로써 학생운동은 1986년 상반기 이후 자민투와 민민투로 양분되었으며, 각자의 기관지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6년 상반기 투쟁을 통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주사NL 진영은 서울대 구학련을 필두로 연세대의 구국학생동맹, 고려대의 애국학생회 등을 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약칭 애학투) 결성식을 감행한다.

그러나 건국대 투쟁으로 주사NL 진영은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내걸었던 구호가 국민 정서와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 북한 방송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구호가 집회 장소에서 등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모험적인 구호와 투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했다. 

그 후 수사당국의 대규모 검거 선풍으로 당시 지도부가 대부분 구속되고 수배를 받았다. 건국대 사태로 구속된 학생만 1290명에 이르고, 각 대학의 학생운동은 3~4학년 실질 주도그룹이 대거 구속됨으로써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건국대 투쟁에 대한 주사파 내부의 평가를 보자. 

“건대 항쟁은 주객관적인 정세와 유리되고, 대중의 준비 정도에 걸맞지 않은 반공 이데올로기 분쇄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 등을 제기함으로써, 정권에게 엄청난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고, 사상 유래 없는 대 탄압을 촉발시킨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조직을 보위하고 대중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면서 탄압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건국대 투쟁을 지도했던 구학련, 애국학생회, 구학동 등의 혁명적 대중조직들도 구성원이 건국대 투쟁 이후 대부분 검거됨으로써 와해지경에 이른다. 
주사NL 진영은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건국대 사태를 통해 두 가지 결론에 이른다. 

“첫째, 투쟁노선에서 좌편향 문제다. 1986년 초 반전반핵 투쟁으로 시작하여 서울대에서의 ‘민주조선’ 대자보 게재사건, 애학투 발족식에서의 반공 이데올로기 분쇄 투쟁 선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지속된 투쟁노선상의 심각한 좌편향은 건대 투쟁을 계기로 더 극대화되어 대중과의 심각한 괴리를 초래했다. 

아무리 반미투쟁이 절박하다고 할지라도 주객관적인 정세와 대중의 준비 정도에 걸맞게 투쟁을 조직 전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정에 의거하지 못한 전략적인 구호의 남발은 대중을 투쟁으로 고무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둘째, 조직노선상의 좌편향 문제다. 지도조직은 대중조직 속에서 단련되고 대중조직의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급히 지도조직을 건설하고 그 산하에 투쟁위원회를 건설함으로써, 선진적 활동가를 끊임없이 투쟁으로 내몰아 조직의 붕괴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그동안 문제로 제기되었던 선도투쟁론의 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NL 진영은 이러한 편향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사상관점과 혁명이론이 이를 계기로 제기되고 확산되었다”는 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올바른 사상관점과 혁명론’이란 북한의 주체사상과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을 지칭하고 있다.

2) 북한의 혁명적 대중노선에 따른 전투적 총학생회론과 전대협 건설

1986년 건국대 투쟁과 구학련 등 지도조직의 붕괴는 학생운동으로 하여금 ‘대중과 함께’라는 과제를 안겨줬다. 북한의 ‘혁명적 군중노선’에 비춰 볼 때 1986년 투쟁은 대중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지 못한 분명한 오류였다는 것이다. 학생운동 지도부는 대중노선의 불철저함에 심각한 자기 반성을 한다. 

공산주의자의 혁명 전략의 핵심은 수많은 대중을 어떻게 혁명의 대오로 이끌어 내느냐 하는 데 항상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중을 혁명의 대오로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사실 왜곡과 과장 등 숱한 방법이 동원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중들에게 생소한 단어의 사용은 금물이며 대중이 이해할만한 어휘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폭로는 분명히 옳은 것이기는 하나 방법이 세련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제국주의자이며 침략의 원흉이라는 구호는 사회혁명의 전략적 구호인 만큼 무모하게 남발할 것이 아니라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군부독재 정권, 즉 전두환 정부에 대한 폭로를 통해 독재를 지원하는 미 제국주의 등으로 폭로하고 투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노선이 관철될 때 대중은 독재에 대한 투쟁에 나서고, 이 투쟁을 미제에 대한 혁명투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노선의 제기는 조직노선 상에는 대중조직의 강화로, 투쟁노선에는 선도적 투쟁을 지양하고 대중투쟁을 창출하는 문제로 집약되었다. 

이 시기 지도부의 철저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역량 손실이 덜한 학교가 고려대와 연세대였다. 1986년 말부터 이들 학교를 중심으로 대중노선을 실천하기 위한 내부 사상투쟁이 시작된다. 

구학련 지도부가 1986년 초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민민투에 대항하여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각 대학 간의 비밀연대 사업부서가 있었고, 이를 통해 1986년 애학투가 건설될 수 있었다. 각 대학 간의 연대사업부서는 1986년 각 대학 지도부의 철저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건재했다. 1987년 대중노선은 이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고려대 조혁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잔존세력을 모아 반미청년회를 결성했다. 반미청년회는 1987년 학생운동을 사실상 배후에서 주도하게 되었다. 

대중노선의 구현 문제는 먼저 조직노선 상의 학생회 강화로부터 출발했다. 이들에 따르면 그 동안 학생회를 학생들의 자주적 조직으로 그 지위와 역할을 보지 못하고, 비합법 지도조직 혹은 투쟁기구의 외피로만 인식되어 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 대중을 결집시키고 이들을 투쟁의 중심으로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진적 인자들만의 선도적 투쟁으로 학생 대중과 점점 유리되었다는 것이다. 학생회가 유력한 대중활동 공간으로 재평가되면서 활동가들이 학생회로 집결하게 되었다.

▲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한 학생운동 세력은 대중 활동을 위해 학생회 투쟁을 강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투적 총학생회론은 1987년 8월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의 발족을 이끌어냈다. 사진은 전대협 행사의 한 장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라

학생회 강화라는 조직노선이 가장 먼저 진행된 곳은 고려대였다. 고려대에서는 1987년 초 기존의 지하 지도부인 애국학생회를 해체하고 ‘총학생회활성화추진위’(이하 활추위)를 결성하여, 이곳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을 학생회로 활동 공간 이전을 준비했다.

활추위는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 과 학생회에서 활동할 간부를 발굴 육성하여 각급 단위의 학생회로 전진 배치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학생회가 학생운동 활동가의 수중으로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선거를 통해 학생회를 완전 장악한 후에는 활추위가 비밀학생회, 학생회의 비서체계 등으로 자기 변화를 거듭하면서 존속하다가, 중복성, 비효율성의 문제가 제기되어 1987년 하반기에 완전 해체되고, 대중조직인 학생회와 소수의 전위조직인 반미청년회만 남게 되었다.

고려대 이외의 나머지 대학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치면서 총학생회 강화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학생회 선거가 마무리되는 1987년 봄에는 거의 모든 수도권 대학에서 학생회가 기존의 투쟁위원회의 하부체계가 아니라, 하부 조직원을 지닌 명실상부한 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87년의 투쟁은 이러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각 대학 총학생회가 활동가에 의해 장악된 조건에서 대학 간 연합조직도 새롭게 구축되었다. 애학투 같은 투쟁위원회의 연합체가 아니라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자 간의 협의체적인 조직이 이 시기에 주요 대학 간의 연대조직으로 등장한다. 1887년 5월 6일 연세대에서 결성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서대협)가 그것이다. 

총학생회 강화 노선의 총화로 탄생된 서대협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수많은 학생 대중을 투쟁에 나서게 하면서 학생들의 실질적인 연대조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총학생회의 전투화, 서대협의 건설로 나타난 1987년 상반기 학생운동 조직노선의 전환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학생운동 내부의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선도투쟁의 장으로 내몰았던 기존의 조직 노선을 극복하고 활동가들의 제일 임무를 대중조직 속에서 대중들과의 대중사업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 시기 각급 학생회 단위에서 이들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학생 대중들의 참여를 유발시키는 문화사업, 교육사업, 정치토론들이 행해졌고 학생운동은 급속히 학생들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의 위력은 1987년 6월 투쟁에서 확인된다. 기존의 학생운동 정치집회가 많아야 수백 명 단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항쟁 과정에서 각 대학에서 집회에 참석하는 학생 수가 수 천 명을 넘어서는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각 학생회에 소속되어 있는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전체 학생이 참석하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로 학생회 단위로 총학생회가 마련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소수가 비밀 집회를 계획하던 방식에서 학생회 중심으로 집회를 계획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은, 그간 학생운동을 거리를 두고 봤던 학생 대중의 참석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했다. 

남한의 학생운동 핵심세력들, 북한 한민전의 지도를 수용
총학생회 강화론은 이후 ‘전투적 총학생회론’으로 정식화 되어 1987년 학생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1987년 5월 서대협 출범과 6월 투쟁의 결과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어 1987년 8월 19일 충남대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를 발족하여 해방 후 최대의 학생조직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전투적 총학생회론은 대중 조직의 가장 중요한 형태로 조합(학생회)이라는 인식하에 대중 활동의 총력을 조합으로 집중하자는 것이다. 그 근거는 학생회야말로 가장 광범위하게 대중을 인입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 대중 의식화 조직화의 가장 유용한 공간을 제공해준다는 것, 대중의 정치적 지향과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힘, 즉 대중의 정치 역량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투적 총학생회론에서도 조합을 그 자체로 전투적이라고 사고하고 있지는 않다. 조합 그 자체는 전투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다고 봤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즉 전투적 총학생회론은 총학생회를 전투화하자는 것인데, 이 전투화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고 현실의 총학생회를 민족해방운동의 주요 역량으로 키워가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전투화는 ‘지도 핵심’의 지도가 존재함을 의미하며, 학생 조합이 민족해방을 자신의 궁극적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학생 조합이 학생 대중의 자주성을 철저히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지도 핵심의 지도를 전제한다’는 말의 진짜 뜻은 북한의 한국민족민주전선(이하 한민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 학생운동에서는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고 이를 전파하기 위한 선전 팀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당국의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들은 한민전이 제시하는 투쟁구호 및 투쟁전술을 그대로 받아 이를 학생운동 내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민전은 남한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민전의 방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이를 학생운동 내에 관철 시키는 조직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학생운동 내의 조직이 반미청년회였다. 

1987년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한민전의 방침을 학생운동 내에 전파하고 실현하기 위한 조직으로 반미청년회, 조국통일그룹, 서울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관악자주파 등이 있었고, 이들 그룹이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이들은 모두 주체사상과 북한의 전략전술론으로 무장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해당 시기 투쟁 전술에서 차이를 보였고,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일면 대립 일면 협력하면서 1990년대 초 까지 학생운동을 주도 했다.

주사파 NL에 의해 주도된 학생운동은 1987년 들어 조직노선에서 대중노선의 구현과 함께 투쟁노선에서도 일대 전환을 모색했다. 1986년의 투쟁이 대중의 수준과 준비 정도, 정서 등을 고려하지 않은 모험주의적 투쟁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대중과 함께 투쟁하는 방식에 대한 고려와 시도가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87년 봄에는 각 대학마다 학생운동의 대중성 확보를 위한 학원민주화 투쟁이 주류를 이뤘다. 

대중적 슬로건 앞세워 6월 항쟁 이끌어

1987년 봄 애학투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학생들에 대한 학사징계 반대 투쟁이 서울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부산대, 경북대, 경상대, 울산대, 동의대, 전남대, 전북대 등에서 학원민주화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투쟁에 학생들의 반수 이상이 투쟁에 동참하는 위력을 과시했다. 이러한 투쟁을 발판으로 학생운동은 4·19 계승투쟁과 5·18 계승투쟁을 이전과는 그 규모 면에서 다른 대중적 투쟁으로 만들어 갔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매개도 없이 반미 투쟁을 진행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당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개헌문제를 매개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반미 자주화 투쟁을 결합하여 벌여나갔다, 이렇게 학생운동의 투쟁노선을 재정립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 4·13 호헌조치 등의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던 일련의 사건이 6월 투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6월 투쟁의 원동력으로 학생운동의 조직과 투쟁노선의 변화와 실현이라는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4·13 호헌조치 후 학생운동은 ‘호헌 철폐’와 ‘독재타도’라는 대중적 슬로건을 채택하고 광범위한 학생을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학생들의 대중적인 투쟁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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