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선생 5주기 추모 학술 세미나
황장엽 선생 5주기 추모 학술 세미나
  • 미래한국
  • 승인 2015.10.0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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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추모 세미나 개요 및 발제문 전체 내용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5주기 추모 학술 세미나가 오는 10월 12일 오후 1시 30분부터 열린다. 장소는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20층).

‘황장엽의 북한 민주화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는 이 세미나의 개관과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세미나 개관

□ 일 시: 2015년 10월 12일(월) 13:30-17:30
□ 장 소: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20층)
□ 주 최 : 북한민주화포럼, 자유민주연구원
□ 주관 : 국민행동본부, 북한민주화위원회, 조갑제닷컴, 민주주의이념연구회,

2. 세미나 순서

. 등 록 : 13:30-14:00
. 개회식 : 14:00-14:30
- 국민의례
- 인사말: 주최측 대표(이동복)
- 추모사: 이철승, 서정갑
- 내빈소개
- 황장엽 추모 동영상 상영(5분)
. 제1부 : 14:30-15:40
- 사회: 이동호 (자유민주연구학회 이사)
- 발표 1: 인간 황장엽, 이동복(북한민주화포럼 대표)
- 발표 2: 황장엽의 통일대전략,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
- 토론: 강태욱(민주주의이념연구회 회장), 한기홍(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 휴식 : 15:40-16:00
. 제2부 : 16:00-17:00
- 사회: 유광호(연세대 이승만연구원)
- 발표 3: 북한 주체사상과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 비교, 유동열(자유민주연구원 원장)
- 발표 4: 황장엽 망명비화, 김용삼(전 월간조선 편집장)
- 토론: 송봉선(고려대 겸임교수)

다음은 이번 학술 세미나의 참여자의 발제문 전체 내용이다.

<제1 발제문>

'인간 황장엽'

'故 黃長燁 선생 5 周忌에 즈음하여 人間 黃長燁을 追慕한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1945년 8월15일 광복(光復)의 시점에서 약관 22세의 황장엽은 좌(左)도, 우(右)도 아닌 ‘해방(解放)’의 감격에 들뜬 조선의 한 지식인이었습니다. 해방의 순간, 그의 정위치는 38선 이남인 강원도 삼척이었습니다.

1941년 평양상고를 졸업한 뒤 1942년부터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그는 1944년 일제의 징용으로 삼척의 탄광에 투입되었다가 거기서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해방으로 징용에서 풀린 그는 집이 있는 평양으로 귀환을 서둘렀고 이로써 그의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공산당이라는 호랑이가 그를 집어삼킨 것입니다.

코민테른이 주도하는 세계 공산화 전략에 따라 북한 땅에 공산국가 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공산세력은 황장엽의 두뇌를 ‘징발’하여 공산주의 노멘클라투라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1946년 북한판 공산당인 ‘조선노동당’ 당원이 되었고, 김일성(金日成)이 6.25 전쟁을 도발하기 한 해 전인 1949년 ‘선발된 엘리트’로 모스크바 유학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6.25 전쟁의 전쟁기간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보내고 휴전의 해인 1953년 귀국했습니다. 세계 공산화 운동의 메카인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전공한 그의 귀국 후 진로는 탄탄대로였습니다. 귀국 다음 해인 1954년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발탁되었고 동시에 김일성의 이론담당 서기가 되어 그의 연설문 작성을 전담하면서 그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 황장엽의 머리에서 자라기 시작한 공산주의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은 그의 모스크바 유학 기간 중에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소련 공산당과 학계의 전문 이론가들과 공산주의 이론을 가지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맑스-레닌주의가 기초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론적 가설과 가정에 결정적 허구와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맑스-레닌주의의 기본 명제들인 ‘역사적 유물론’·‘계급투쟁론’·‘프롤레타리아 독재론’·‘자본주의 모순론’·‘잉여가치론’·‘유물론적 변증법’이 모두 허구와 모순 투성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가통치 이념으로서 새로운 정치철학에 대한 그의 탐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인간중심 철학’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인간중심 철학’의 기본적 운동법칙은 ‘변증법’에 의한 영원하게 중단되지 않는 사물의 무한한 변화와 발전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중시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물질’을 중시하는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이 모두 반 쪼가리의 진리를 담은 2개의 극단이라는 시각에 입각하여 두 ‘변증법’의 편파성을 극복함으로서 그의 독창적인 ‘인간중심 변증법’을 완성시키려 했습니다.

‘인간중심 철학’의 세계에서 그는 모든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양과 질의 통일”·“대립물의 통일”·“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일”·“목적과 수단의 통일”·“주체와 객체의 통일” 등 변증법의 법칙에 입각하여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양면성을 ‘극복’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영원히 반복함으로써 “인간개조”·“자연개조”·“사회관계개조”로 이루어지는 3대 개조를 무한하게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유한(有限)’하나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무한(無限)’하다”고 갈파했습니다. 이 같은 ‘인간중심 변증법’의 세계는 무변광대한 ‘긍정’과 ‘낙관’의 세계라는 것을 그가 2008년8월15일 탈고(脫稿)한 역작(力作) <인간중심 철학 원론>의 다음 대목이 보여 줍니다.

"세계는 무한하다. 무한한 세계의 주인으로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영원한 발전의 길을 걸어야 한다. 발전이 멎어지면 인류는 멸망한다. 세계의 주인이 되지 않고서는 자기운명의 완전한 주인이 될 수 없다.

좀 먼 앞날의 이야기지만 약 50억 년 후에는 태양이 소멸되거나 폭발할 수도 있고 또 태양의 지름이 현재의 200배가 되고 부피는 800만 배가 되어 지구궤도까지 팽창할 수도 있다고 예견하고 있다. 인간이 태양을 완전히 관리하게 되지않고서는 인류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 또 우주팽창설에 의하면, 지금의 속도로 우주가 팽창하면 몇 천 억년 후에는 우주물질이 다 녹아버려 원시물질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약 200만 년 후에는 인간이 우리 은하계 우주(은하수계 우주)를 관리할 수 있다고 내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은하수의 크기가 약 10만 광년인 만큼 빛의 속도로 한 번 가는 데만 10만 년이 걸린다. 오늘날 100년도 못사는 사람으로서는 은하계 우주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를 개조하고 수명을 늘리는 문제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끝없는 세계의 완전한 주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완전한 주인의 지위에
끝없이 접근하여 가도록 끝없이 발전을 계속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발전이 곧 인간의 삶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것은 영원한 발전의 길만이 영원히 인간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길이며 영원히 행복의 수준을 높여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또 바로 여기에 인간의 종국적인 삶의 목적과 그것을 실현하는 근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인간의 영원한 발전이 곧 인간의 영원한 삶의 목적이며 인간의 창조적 역할을 영원히 높여 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는 근본방법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 인간중심 철학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나, 황장엽에게는 ‘좌절’의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권력체제에서도 하나의 금기(禁忌)인 ‘권력의 세습’을 통해 북한의 ‘일당독재(一黨獨裁)’를 ‘수령독재(首領獨裁)’를 넘어서 전근대적인 ‘봉건왕조(封建王朝)’로 후퇴, 변질시키는 역사의 왜곡(歪曲)을 시작한 김정일(金正日)이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 이론을 압수(押收)한 뒤 이를 ‘주체사상’으로 개조하여 ‘세습독재(世襲獨裁)’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사이비 이론으로 변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 북한에는 엄청난 재난이 밀어 닥쳤습니다. 북한의 경제는 파국을 지나 파탄 지경에 이르는 가운데 300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굶어 죽었고 수십만명이 굶주림을 못 이겨 탈북(脫北) 길에 올랐으며 북한은 수십만 명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서 지나는 거대한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로 변모했습니다.

김정일이 이끄는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주축으로 한반도 긴장의 고조를 지속적으로 주도함으로써 전 세계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했습니다.

황장엽에게 새로운 선택이 강요되었습니다. 1997년2월 그는 북한을 탈출하는 역사적 결단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랑하는 부인과 1남3녀의 자녀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로부터 13년의 여생(餘生)을 오직 두 개의 목적에 불살랐습니다.

김정일 정권의 타도와 북한의 민주화였습니다. 그에게 그가 버린 북한의 ‘김정일 독재정권’은 “오늘날 한반도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주적(主敵)”이었습니다. 황장엽이 2003년3월20일 발표한 “김정일에 대한 태도는 진짜 민주주의자와 가짜 민주주의자를 가르는 시금석”이라는 제목의 글에 의하면, “수백만 북한 주민들을 무참히 굶겨 죽이고 북한 땅을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든 전대미문의 독재자”인 김정일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것을 자기의 생존전략으로 간주”하고 있어서 “그 누구도 김정일이 독재자이며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1997년 황장엽이 베이징으로부터 필리핀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행을 택할 때 그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당시)으로부터 두 가지 ‘약속’을 확보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서울에서 그의 ‘인간중심 정치철학’ 연구를 계속하여 완성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서울을 거점으로하여 북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의 ‘약속’은 공염불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황장엽의 서울 도착으로부터 5개월 후인 1994년12월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이 당선됨으로써 대한민국은 10년간의 ‘좌향좌(左向左)’ 실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盧武鉉) 정권으로 ‘좌파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에서의 황장엽의 생활은 감옥살이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의 평양방문과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로 대한민국의 ‘좌경화(左傾化)’는 위험한 속도로 가속화되었습니다. 이 무렵 황장엽의 절박한 관심사는 대한민국에서의 ‘종북(從北)·좌경·반미(反美)’ 세력의 장성(長成)이었습니다. 그의 이 같은 심경은 앞에서 인용된 “김정일에 대한 태도는 진짜 민주주의자와 가짜 민주주의자를 가르는 시금석”이라는 제목의 글 속에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민족공조를 구실로 내세우고 김정일 독재집단과의 협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김정일 독재집단에게 체제유지를 담보해 주고 그들에게 경제적 원조와 정치적 지원을 적극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김정일 독재집단의 범죄활동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적 제재조치를 반대하고 김정일 독재집단의 부당한 요구에 대한 타협과 양보를 설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사람들은 사실상 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자이며 동맹자인 미국의 편에서 물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적(敵)인 김정일 독재집단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김정일 독재집단과 타협하는 것만이 민족의 통일을 실현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민족의 통일을 반대하고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옳다고 볼 수 있겠는느냐”고 자문(自問)하고는 이에 대해 “옳다고 볼 수 없다”고 자답(自答)했습니다. 그는 그 근거로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첫째로, “민주주의자라면 김정일 독재집단과의 민족공조에 대하여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일 민족 반역집단과의 민족공조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민주주의자라면 봉건 가부장적인 수령 독재집단을 북한의 주인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독재의 희생자인 북한 인민들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는, “김정일 독재집단과 공조하여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평화의 원수에 의지하여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평화의 간판을 내걸고 침략자들 앞에서 인민들을 정신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려는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평화가 아무리 귀중하여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귀중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양보해야 한다는 투항주의적 입장을 따른다면 평화도 민주주의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는 경고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2007년 12월 한나라당의 이명박(李明博) 후보가 530만표라는 대한민국 직선제 대통령선거 사상 최대의 표차로 17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황장엽에게는 잠시 희망의 등불이 반짝 켜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의 환각(幻覺)이었습니다. 황장엽은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2010년1월1일 신년사에서 “오늘날 우리 민족의 모든 재난과 불행의 화근은 김정일 독재집단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하고 “북한 동포들을 해방하고 남북의 민주주의적 통일을 이룩하는 유일한 길은 김정일 수령독재집단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북핵 문제 해결에 관해서도 “정도(正道)는 경제원조로 회유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을 퇴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반응은 벽창호였습니다. 2010년10월10일 운명(殞命) 직전의 어느날 황장엽은 “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남긴 미발표 ‘유작시(遺作詩)’에 그의 암울한 심회(心懷)를 적나나하게 써서 남겨 놓았습니다.

“지루한 밤은 가고 새 아침은 밝아 온 듯 하건만, 지평선에 보이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는구나.” 그는 자신의 임박한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라고, 이 세상 하직할 영이별 시간이라고, 값없는 시절과의 헤어짐은 아까울 것 없건만, 밝은 미래를 보려는 미련을 달랠 길 없어”라는 대목에는 그래도 꺼지지 않는 생에의 자신의 집념이 절절하게 녹아 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가나, 걸머지고 걸어온 보따리는 누구에게 맡기고 가나”라는 구절에서는 그의 생애가 종장(終章)에 이르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여한 없이 최선을 다해 받들고 가자, 삶을 안겨 준 조국의 거룩한 뜻을 새기며...”였습니다. 황장엽은 그가 가족들과 52년간의 생활을 영위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13년간 그의 여생을 보냈던 대한민국에 대한
애틋한 애국심을 이 구절에 담아 놓고 있었습니다.

한민족 현대사를 장식한 한 사람의 위대한 애국자, 철학자, 정치가 및 문학인이었던 황장엽이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벌써 5년의 세월이 경과했습니다. 고인이 대한민국에서 한 사람의 망명객(亡命客)으로 13년이라는 짧지 않은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많지 않은 대한민국의 지사(志士)들이 고인의 주변을 지켜 주었고 오늘 추모의 글을 읽는 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의 종장(終章)을 투자했던 대한민국은 고인에게 박정(薄情)했습니다. 고인의 5주기를 겨우 오늘과 같이 검소한 추모 세미나로 때우고 있는 현실이 바로 대한민국의 그 같은 박정한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의 이 뜻 깊은 추모 세미나의 기회에 저는 한 가지 소망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고인은 13년 동안 대한민국에 머무는 동안 도합 17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저술은 2005년에 간행된 <민주주의 정치철학>과 2006년에 간행된 <황장엽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2007년에 간행된 <청년들을 위한 철학 이야기>, 2008년에 간행된 <인간중심 철학 원론> 그리고 2009년에 간행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등이었습니다.

고인은 또한 생전에 몇 개의 ‘학습반’을 꾸려서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공산주의 비판 이론’과 함께 ‘인간중심 철학’을 강의하고 또 토론했습니다. 이들 ‘학습반’의 하나에서 7년 동안 매주 1회씩 실시된 황장엽의 강의의 개근생(皆勤生)이었던 강태욱(姜泰旭) 씨가 수강(受講)한 내용을 <육성강의 녹취록: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 ①②권에 담아서 간행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의 철학계가 고인의 필생의 연구 성과인 ‘인간중심 철학’에 대하여 진지한 학문적인 평가를 한 흔적이 없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철학계에서 황장엽이 개발해 놓은 ‘인간중심 철학’을 학문적인 시각에서 진지하게 평가하는 작업을 벌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같은 연구 작업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이 필수적입니다.

바라건대, 오늘 우리가 진행하는 이 5주기 추모 세미나를 통하여 그 같은 재정적 뒷받침을 마련하는 길이 마련되고 이를 통하여 고인이 “걸머지고 와서 걷다가 벗어놓은 보따리”인 ‘인간중심 철학’을 학문적으로 재조명(再照明)하고 하나의 정치사상으로 정당한 학문적 평가를 확보함으로써 고인의 고혼(孤魂)을 위로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부족한 추모의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제2 발제문>

黃長燁의 통일 大戰略

"이념은 공동체의 利害관계에 대한 자각이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요약: 黃長燁 선생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봉건적 반동세력으로 규정하고, 북한정권을 민족반역 세력으로 보는 관계 속에서 人權문제를 무기화하여 평화적 공존이 아닌 ‘평화적 경쟁’을 지속, 그들을 남북의 韓民族 속에서 고립시킴으로써 평화적으로 무너뜨리는 전략을 권고하면서, 韓美日 동맹의 강화를 촉구하고 중국과 친북세력의 연대를 경계하였다.

Ⅰ 黃長燁의 통일 방안 쟁점 정리

   ('황장엽 비록 공개'에서 인용, 2001년, 월간조선 발간)

1. 남북 간의 대립의 본질을 南과 北에 수립된 兩立할 수 없는 두 정치 체제 간의 대립으로 보는가, 안 보는가 하는 데 있다.

- 우리는 남북 간 대립의 본질을 전적으로 北에 수립된 공산독재 체제와 南에 수립된 민주주의 체제 간의 대립으로 본다. 양립할 수 없는 두 체제 간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독재와 민주주의 간의 대립은 계속 남아 있다.

그러므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사회 정치 체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평화적 공존은 가능하여도 남북의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南과 北의 오해와 불신이 원인으로 되어 南과 北에 정반대되는 두 사회체제가 수립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소련의 영향 밑에 북한에서 공산독재 체제가 수립되고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됨으로써 南과 北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오해와 불신임이 축적되었다.

이 점에서 일부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를 顚倒하고 있는 것이다.

2. 남북 간의 대립 문제를 국제 문제의 일환으로 보겠는가, 아니면 순전한 민족 내부의 문제만으로 보겠는가 하는 데 있다.

- 우리는 남과 북의 대립은 남과 북이 다 같이 한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민족 내부의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대립의 본질은 처음부터 국제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는 지도이념과 정치제제 간의 모순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공고한 동맹과 남북관계 해결에서 韓美日 3國의 공조체제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 발생에 처음부터 관여한 당사자인 만큼 민주주의에 기초한 남북의 평화적 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한국 문제 해결에 책임적으로 참가해야 할 역사적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남북문제 해결에서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역시 당사자 한 성원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3. 북한공산독재 정권과 독재통치의 희생자인 북한 인민을 갈라보는가, 갈라보지 않는가?

-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를 고수하는 한 북한 통치 집단과 북한인민을 갈라보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여야 할 것이다. 이 경우에 북한 통치자들과의 대화와 협상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한 전술적 조치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에는 무조건적인 화해와 협력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상호주의 원칙이 준수되어야할 것이다. 북한 통치자들이 독재체제를 버리고 민주주의적 입장에서 개혁 개방으로 나올 때에는 그들도 통일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 옳다.

4. 남북 간의 평화적 경쟁을 평화통일의 기본 방도로 보는가, 안 보는가?

- 남북 간의 관계의 본질을 두 체제 간의 경쟁으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평화를 수호해야 하는 조건에서는 '평화적 경쟁'을 기본 전략으로 추진해야 한다.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하는 외국의 평화정책과 보조를 맞추면서 평화적 경쟁 정책을 버리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일부 사람들은 지금 좀 손해를 보더라도 북한에 원조를 주면서 화해와 교류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북한 측이 남한의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중국의 영향도 받지 않는 북한 통치자가 하물며 숙명적인 경쟁 대상인 남한 집권자의 영향으로 수령절대주의를 버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접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평화적 경쟁은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가장 공명정대한 방법이다. 6·25 전쟁이 끝난 다음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여 남침을 막고 평화를 보장해주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한국은 북한과 평화적 경쟁을 할 수 있었고, ‘한강의 기적’을 창조,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한국은 이 역사적 승리에서 승리의 비결을 찾아야 한다. 미국과 협력하여 남침을
막고 북한과의 평화적 경쟁을 계속하는 것이 기본 전략이 되어야 한다.

Ⅱ 黃長燁의 북한정권 붕괴 전략: 평화적으로 무너뜨리기(語錄 정리)

1. 남북대결의 본질

*남북관계는 누가 민족을 대표하는가 하는 것을 놓고 벌이는 권력투쟁이다. 민족주의를 버리면 독재와 민주주의는 평화공존할 수 있으나 (양측이 모두) 민족주의 입장에서 통일을 至上의 과업으로 내세우고 있는 조건에서는 수령절대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과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남북 이념 대결의 본질은 민족내부 간의 不和가 아니라 독재와 민주주의 체제 간의 양립할 수 없는 대립에서 생긴 것이다.

*이런 싸움에선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정통과 異端으로 갈려서 싸우는 데는 승리와 패배가 있을 뿐 양보, 타협, 중재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이념이 서로 다르다. 이념이란 것은 가치관인데 정책이 다르면 타협할 수 있으나 이념이 다를 경우는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싸우게 되어 있다.

우리가 말하는 평화통일이란 타협적 통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정권을 평화적으로 흡수, 통합한다는 의미이다.

2. 인권으로 무너뜨리기

*북한의 수령체제를 붕괴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는 방향으로 경제 원조를 해주어야 한다.

*북한의 정치적 독재체제를 붕괴시키려면 막대한 군사력이 동원되어야 하며, 북한의 경제적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제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북한의 사상적 개방을 위하여서는 이러한 막대한 비용이 필요 없다.

아마 비용 면에서 따진다면 정치, 경제적 붕괴를 위하여 필요한 비용의 100분의 1도 들지 않을 것이다.

*독재 국가가 인권문제를 접수하는 것은 스스로 독재를 죽이는 독약을 먹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는 냉전 시기의 민주주의 전략가들의 모범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1975년 헬싱키 회의에서 서방 세계가 경제-기술적인 원조를 해줄 수 있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하여 소련이 인권선언에 조인하는 양보를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소련에 인권사상이 대대적으로 들어가 소련의 사상적 붕괴를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북한에서 인권유린의 근본 禍根은 수령절대주의에 있다. 그러므로 북한의 인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면 수령절대주의를 허물어버리는 길밖에 없다.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평화적 방법으로 敵을 돕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조건에서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은 다 평화적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3. 韓美日 동맹 강화의 필요성

북한 통치자들은 자기들이 한국과 단독적으로 대결하면 전쟁의 방법으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평화적 방법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金日成은 생전에 미국과 일본의 지원만 없으면 남한은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미국과 일본을 남한 정권이 쓰고 있는 갓의 양쪽에 달려 있는 갓끈과 같다고 풍자하였다.

남한 정권에서 미국과 일본의 지원을 떼버리면 양쪽의 갓끈이 떨어진 갓 모양으로 되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 버리는 가엾은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과 미국, 일본과의 친선의 유대를 끊어버리는 것을 중요한 對南전략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4. 중국과 親北세력의 연계 가능성

중국도 북한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국이 굴레 벗은 망아지처럼 제멋대로만 하려는 북한정권을 계속 붙들고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압록강까지 다가오는 것을 억제하기 위하여 쓸모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초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면에서는 미국의 위협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침습은 13억 多民族 국가의 정치적 통일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으며, 이것은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을 위태롭게 하는 기본요인으로 될 수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북한의 수령유일독재체제는 중국인민들로 하여금 낡은 중국의 고통과 불행을 연상시키는 실례로 되어 오히려 중국의 현 체제의 우월성을 믿게 하는 데 도움으로 될 수 있다. 중국과 북한은 체제상 큰 차이가 있지만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점에서 利害관계를 같이하고 있으며, 이것이 兩者를 계속 접근시키는 기본요인으로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 위력의 長成이 가지는 意義이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깊다. 한국에는 유교문화의 영향과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숭배사상이 남아 있다.

중국이 强盛 대국으로 급격히 浮上하면서 중국에 대한 한국 국민의 환심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만일 중국의 경제규모가 미국을 능가하게 되면 한국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은 커질 것이다. 중국과 북한의 막강한 위력의 영향 밑에서 한국에서 親北세력이 더욱 큰 力量으로 자라날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뗄 때 한국의 민주주의 체제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Ⅲ 북한정권의 본질

1. 계급투쟁론 비판

黃長燁 선생은 생전에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폭로하는 名言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無産者(무산자)는 무식자이다. 無識者(무식자)가 통치를 하려니 폭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라고도 했다. 그는 계급투쟁론이야말로 인류와 韓民族에게 재앙을 부른 萬惡(만악)의 根源(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黃 선생은, 2009년에 펴낸 ‘인간중심 철학원론’(시대정신)에서 계급투쟁론의 폭력성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계급투쟁과 無産(무산)계급 독재를 주장하는 공산주의 사상은 人類愛(인류애)의 사상과 양립할 수 없는 계급이기주의 사상이다. 불평등한 계급 간의 이해관계를 正義(정의)의 원리에 의거하여 是正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利害(이해)관계가 대립된다고 하여 사회 공동의 성원으로서 살 권리마저 빼앗고 말살해 버리는 것은 계급이기주의의 비인간성의 發顯(발현)이다.

有産계급은 無産계급의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하면서 유산계급을 무자비하게 살해하도록 무산계급을 추동한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正義와 원칙을 부정하고 계급적 이기주의를 절대화한 비인간적인 범죄자들로서 斷罪(단죄)되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다같이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인류애와 유사한 구호를 내걸었지만 대립되는 계급을 무자비하게 타도할 데 대한 계급투쟁의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인간증오사상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기주의보다도 집단이기주의의 비인간적 害毒性(해독성)이 비할 바 없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집단이기주의에 기초하여 집단적투쟁을 일삼고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인류생활에 끼친 범죄적 해독작용과 실패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黃 선생은 북한 정권이 계급이기주의로 시작되었으나 거기에 봉건가부장적인 전체주의가 접목되어 수령절대주의 독재, 즉 수령개인이기주의 독재로 전락하여, 가장 反인민적인 체제가 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思想戰(사상전)을 해야 하는 한국이 <오가잡탕의 사상이 범람하도록 내버려두다 보니 국민의 사상 발전이 뒤떨어지고 있다>면서 <이것이 공산주의자들과의 사상전에서 중요한 약점으로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나라 정부는 私營(사영)통신을 통해 사상적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정부의 입장과 방침을 밝히고 국민의 사상적 통일을 보장하기 위한 官營(관영)통신을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다>고 충고했다.

2. “김일성은 俗物”

2010년 8월 黃 선생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인간적 장점과 함께 致命的(치명적) 평가를 내렸다. “김일성은 俗物(속물)이었습니다. 스탈린과 毛澤東은 악당이었지만 한 구석엔 영웅적 풍모가 있었어요. 가족을 偏愛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김정일을 특별 대우하더니 나중엔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사회주의자가 권력세습을 하다니. 어느 자리에서 김일성이 爲民해야 한다고 연설을 하는데 이를 듣고 있던 김정일이 저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黃 선생, 爲民이 다 뭡니까? 인민에겐 무섭게 대해야 돼요.'”

黃 선생은 김일성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역사적 평가를 명확히 구분하였다. 上記 2001년 책에서 그는 이렇게 비판하였다. <그는 자기 아들의 권력 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정권을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함께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生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3. 김대중 노무현 비판

故 황장엽 선생은, 2009년 4월 나온 '인간 중심철학 원론'이라는 책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북한의 독재 집단이 핵무기를 가지고 남한을 위협하고 있는 상태에서 북한을 찾아가 막대한 外貨까지 주면서 평화를 구걸하고는 앞으로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하여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무장 해제시키고 참다운 평화의 수호자인 동맹국을 멀리 하도록 한 햇볕정책 주창자들은 국민을 속이는 반역행위를 감행한 僞善者라고 평가해야 옳을 것이다.>

다른 자리에선 ‘을사5적’에 비유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은 우리 인민이 일제에 굴복하여 나라를 넘겨준 을사 5적을 증오하는 것은 응당합니다. 그러나 그 때 일제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대항하기 어려운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약한 자로서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역량관계는 북한 공산독재집단에 비하여 한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경제적 면에서는 백배나 위력하다고 볼 수 있고 군사적 면에서도 최대강국인 미국과의 동맹을 감안한다면 비할 바 없이 강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막대한 외화까지 가져다 주면서 북한의 민족반역집단과 민족공조를 약속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적 정체성을 팔아 넘겨주려고 하는가, 이 죄가 을사 5적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3 발제문>

북한의 주체사상과 황장엽의 인간중심철학 비교

* 본 발제문은 필자가 민주주의정치철학연구소에 2012년 보고서로 제출한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임

유 동 열 자유민주연구원 원장

본 발제문은 북한의 주체사상과 황장엽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규명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다. 황장엽선생이 1997년 자유 대한민국으로 망명해온 지 18년, 황장엽선생이 사망한 지 5주기가 지난 현시점에서도,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황장엽 선생의 사상적 전향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는 지식인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황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본질에 있어 ‘주체사상의 아류(亞流)’ 또는 ‘주체사상의 한국판’으로 폄하하며, 황선생에 대한 사상적 시비(是非)를 부추기고 있다.

이는,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중심철학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오해로 황선생의 대한민국으로의 망명과 이후 북한 김정일 정권에 대항하여 자유 대한민국의 우월성과 북한민주화운동에 진력해 온 노력과 열정을 생각할 때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황선생에게 2005년 봄부터 2010년 10월 10일 돌아가시기 1주일 전까지 매주 토요일에 2시간씩 맑스주의, 변증법,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인간중심철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겸한 학습모임을 총500여 시간 가진바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필자는 본 보고서를 통해 인간중심철학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황장엽 선생에 대한 사상적 오해를 해소시키고, 인간중심 철학의 올바른 이해를 제고하려는 목적으로 북한 주체사상과 황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Ⅱ 북한의 주체사상 체계

1. 주체사상(主體思想)의 개념

북한 사회주의헌법은 제3조에서 주체사상에 대해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 조선대백과사전(2000년판)에 의하면, 주체사상이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의 주요 구성부분이며 그 진수를 이루는 사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에서는 통상 주체사상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호칭하며 최근엔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고 있다.

북한당국이 운영하는 ‘내나라’라는 인터넷사이트에서는 북한의 정치제도를 선전하는 난에서 주체사상을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으로 규정하며 “주체의 사상, 이론, 방법론”을 포괄한다고 규정한다.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김씨집단의 통치이념이며, 한마디로 북한 김일성식 공산혁명사상이자 혁명운동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주체사상의 변천과정

북한은 주체사상의 창시에 대해, 김일성이 1930년 6월 말 중국 만주의 장춘현 카륜에서 열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일명 카륜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과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처음 밝혔다고 주장 3)하고 있으나, 이는 거짓이다.

“수령님께서는 일찌기 초기 혁명활동시기에 맑스-레닌주의에 정통하시었습니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를 조선혁명의 실천에 적용하는데 머무르지 않으시고 확고한 주체적 입장에서 혁명이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시었으며 혁명실천이 제기한 문제들을 독창적으로 해결하시었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고루한 민족주의자들과 행세식 맑스주의자들, 사대주의자들과 교조주의자들을 반대하고 혁명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시는 투쟁과정에 주체사상의 진리를 발견하시었으며 마침내 1930년 6월 카륜에서 진행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천명하시고 조선혁명의 주체적인 노선을 밝히시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사상의 창시와 주체의 혁명노선의 탄생을 선포한 역사적 사변이었습니다.”(김정일, 주체사상에 대하여 중, 1982)

북한이 김일성의 경력을 역사조작한 대표적 사례인데, 1930년 당시 김일성은 남만주에서 민족주의단체인 국민부(國民府) 산하 청년조직인 ‘남만 한인청년동맹’에서 평조직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바, 주체사상의 원리 천명하거나 독자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조선혁명의 주체적 노선을 정립할 여유나 위치에 있지 않았다.

황장엽 선생에 의하면, 주체사상의 태동은 6.25(남침)전쟁시기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1955년 12월 28일 열린 <당 선전선동원대회>에서 김일성은 ‘사상사업에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주체는 조선혁명이다”이라고 말한 명제에서 부터라는 것이다. 주체란 용어를 공식사용한 것이다.

1967년 12월 6일 최고인민회의 제4기 1차회의에서 김일성은 ‘국가의 모든 활동분야에서 자주, 독립, 자위의 로선을 철저히 구현하자’라는 연설에서 “우리 당의 주체사상은 우리의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가장 정확한 맑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이며 공화국 정부의 모든 정책과 활동의 확고부동한 지침”라고 밝혀, 주체사상이란 용어를 최초로 공식 사용하였다.

여기서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라는 4가지 기본노선을 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황선생은 김일성의 지원 하에 1963년경부터 주체사상을 군중노선에 기초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에 들어 갔으며 5), 1972년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사람중심)와 사회역사적 원리 등을 체계화하여 김일성에게 제시하였다.

“1972년 여름 김일성이 함께 휴가를 떠나가자고 했다... 여름 휴가가 끝나자 9월 이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직후의 어느날 일본 마이니찌 신문사에서 김일성에게 인텨뷰 요청을 해왔다. 주제는 ‘주체사상에 기초한 조선로동당의 대내외정책’이었다. 김일성은 먼저 서면으로 답변을 주고 그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고 했다.

서면 답변은 내가 작성했다. 1972년 9월 17일 새로운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나의 글이 ‘우리당의 주체사상과 공화국정부의 대내외정책의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활자화되었다.

나는 이글에서 최초로 주체사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사람중심의 사회역사원리에 기초한 조선노동당의 대내외정책을 밝혔다”(황장엽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998, 167면)

이는 1972년 9월 17일 김일성이 일본 마이니찌신문이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의 담화에서 주체사상이 이론적 틀을 체계화하여 처음으로 선보였다.

여기서 주체사상에 대한 정의 즉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입니다”라는 명제가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바로 황선생이 체계화 시킨 주체사상의 정의이었다.

1972년 12월 27일 개정된 북한 사회주의 헌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맑스레닌주의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명시해 주체사상을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공식 규정하게 된다.

1980년 10월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을 맑스-레닌주의보다 우월한 ‘현시대 로동계급의 영생불멸의 지도리념’으로 공식화하고, 당규약 전문에는 “조선로동당은 오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사상, 혁명사상에 의해 지도된다”고 명시하였다.

1982년 3월 31일 김정일은 김일성 출생 7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전국주체사상 토론회>에 자기이름으로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주체사상을 한층 체계화, 발전시켜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였다.

1986년 7월15일 김정일 명의로 당중앙위 책임일꾼들에게 행한 담화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8)를 통해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정치적 생명체을 정식화하고 주체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이후 1992년 4월 개정된 사회주의헌법과 1998년 9월 5일 수정보충된 헌법 제3조에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고 규정한 이래 현재까지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명문화해오고 있다.

Ⅲ 주체사상의 체계와 내용

(1)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주체사상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라고 강조된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명제에서 비롯된다. 이를 놓고 북한은 사람이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것과 사람이 세계를 개조하고 자기운명을 개척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 즉 세계최초로 사람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밝힌 사람위주의 철학적 원리 규명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또한 사람이 세계의 주인으로서 특별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며, 사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명을 주었다고 선전한다.

(2) 주체사상의 사회역사적 원리

주체사상의 역사관을 대표하는 명제는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며 사회발전의 동력이다”, “인류역사는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자주성을 위한 투쟁은 사회개조, 자연개조, 인간개조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이 역사발전과 사회혁명의 합법칙성을 밝힌 사상이라고 주장하며, 주체사상의 위 명제에 의하여 역사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근로인민대중의 사회적 운동, 혁명운동의 근본원리가 새롭게 천명되었다고 선전한다.

(3) 혁명적 수령관과 두 생명체론

주체사상에서 가장 핵심적 명제중 하나가 ‘혁명적 수령관’이다. 혁명적 수령관 이란 노동계급의 혁명투쟁에서 수령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에 대한 가장 올바른 견해와 관점이며 수령을 진심으로 모시는 자세와 입장을 의미한다.

두 생명체론이란 사람에겐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있지만 사회정치적생명체로 결속된 인민대중의 생명은 영원하다며 수령당-인민대중을 통일체로 놓고, 수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인용문에서 확인하듯이, 한마디로 수령(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대해 무한정 충성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는 사람중심, 인민대중 중심을 외치지만 결국은 수령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체사상교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혁명의 주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혁명적 수령관을 튼튼히 세우는 것입니다...중략... 인민대중이 혁명의 자주적 주체로 되기 위해서는 당과 수령의 영도밑에 하나의 사상, 하나의 조직으로 결속되어야 합니다.

조직사상적으로 결속함으로써 영생하는 자주적인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이루게 됩니다. 개별적인 사람들의 육체적 생명은 끝이 있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결속된 인민대중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에게는 개인의 육체적 생명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셨습니다.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인 사회정치적 집단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 개별적 사람들의 생명의 중심이 뇌수인 것처럼 사회정치적 생명의 중심은 이 집단의 최고뇌수인 수령입니다...

수령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종합, 분석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입니다...중략...

우리가 혁명적 수령관을 고히 세우고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제일 생명으로 하는 것이 주체형의 공산주의혁명가의 기본품성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중략...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오직 당과 수령의 영도 밑에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굳게 뭉쳐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위업에 몸바쳐 투쟁하는 데서 참다운 삶의 보람과 행복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혁명적 수령관은 혁명적 인생관의 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대한 우리당원들과 근로자들의 충실성은 더없이 밝고 깨끗한 것이며 절대적이고도 무조건적인 것으로 됩니다.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주체의 혁명적 세계관이 확고히 선 참다운 공산주의 혁명가로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령님의 사상과 이론, 영도의 위대성을 깊이 체득시켜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신 위대한 사상이론가이시며 미제와 직접 맞서고 있는 어렵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나가는 전인미답의 길로 우리인민을 현명하게 이끌어 주고 계시는 위대한 지도자이십니다.”(김정일,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中,1986)

(4) 기타 내용

첫째,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이란 이른바 혁명과 건설 구현의 행동지침으로 그 명제는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 등으로 집약된다.

둘째,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이론이란 ‘주체의 혁명이론’으로 칭해지는데,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하에 있는 노동계급은 먼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한 다음 사회주의혁명을 거쳐 공산주의 건설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하고 있으며, 투쟁방법으로 무장투쟁과 대중투쟁의 결합을 주장하며, 혁명의 지도부는 당인데, 당은 수령의 영도하에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셋째,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이론이란 사상, 문화, 기술혁명 즉 3대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며, 이는 오직 수령과 당의 영도 하 에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세계혁명에서는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망하고 전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은 결국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된다며, 세계혁명의 기본전략은 미제 타도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인간개조이론에서는 새로운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창출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하는데, 인간개조의 본질은 사상개조이며 공산주의사상으로 무장시켜야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사회주의 경제건설이론에서는 북한식 주체의 경제건설이론 전략을 제시하는데, 경제건설의 기본적인 전략목표로 ‘물질적 요새점령’을 강조한다. 사회주의 경제제도의 우월성과 경제건설의 혁명적 원칙으로 자력갱생과 속도전을 들고 있다. 특히 경제건설에 있어 수령의 영도를 강조한다.

여섯째, 사회주의문화건설이론에서는 북한식 사회주의문화 창조전략을 제시한다. 김정일이 완성했다는 이른바 주체의 문화건설이론을 소개하며, 문화건설에 있어 수령의 영도를 강조한다.

일곱째, 영도체계에서는 북한주민에 대한 통치방법과 수령의 영도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논리를 전개한다. 영도의 본질과 원칙에서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강조하고 이의 방도로서 혁명적 수령관, 사상전, 혁명적 조직생활, 혁명적 실천 등을 제시하고 있다.

여덟째, 영도예술에서는 북한 인민대중을 통치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영도예술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사람들을 움직이는 방법입니다. 군중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그들이 창발성을 내어 일하도록 적극 고무해주며 군중을 발동하여 제기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영도예술입니다”라고 규정한바 있다.

영도예술의 체계는 전투적 구호와 공산주의적 대중운동, 대중운동의 조직과 지도, 혁명적 사업방법과 인민적 사업작풍 등 대중동원의 위력한 방법들로 구성되어 대중동원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4. 주체사상 평가

황장엽선생은 자기 저서에서 주체사상이란 김일성이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기의 독재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제창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주체사상은 본질상 수령의 독재를 인정한 스탈린주의의 북한판이라는 것이다. 황장엽선생은 평소에 필자에게 주체사상을 ① 수령절대주의 폭압사상 ② 계급폭력혁명론 ③ 사회주의에서 이탈한 김일성일가의 봉건주의사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주체사상은 겉으로는 사람중심, 인민대중 중심의 사상이라고 선전하지만 북한주민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그 위에 수령이라는 김씨일족(김일성-김정일-김정일)이 대를 이어 권력을 누리는 수령절대주의 폭압사상인 것이다.

인민대중의 혁명과 건설노력도 김씨일가의 철권폭압 통치를 정당화해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씨일족의 폭압 통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반문명적 반민주적 반인륜적 공산혁명사상이자 북한식 공산혁명 운동론이라 평가할 수 있다.

Ⅲ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체계

1. 인간중심 철학의 개념

인간중심철학이란 황장엽선생이 창시한 철학으로 ‘황장엽주의’라 명명할 수 있다. 인간중심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운명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철학이론이며 인간운명개척의 방법을 밝혀주는 철학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황선생은 인간중심철학의 연구대상과 기본원리로 ① 세계의 일반적 특징이 무엇이며 ② 인간의 본질적 특징은 무엇인가 ③ 세계와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본질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철학도 결국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운명개척의 길을 규명하여, 인간발전과 세계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점을 강조하는데서, 인간중심철학의 사명을 확인할 수 있다.

2. 인간중심철학의 창시과정

인간중심철학의 창시과정은 황장엽선생이 태어나고 지내온 현장인 일제시대 와 해방과 분단, 김일성체제에서의 삶, 망명 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황선생도 인간중심철학의 출발점을 1940년대 평양상업학교 재학 당시부터, 인간 삶에 대한 회의감과 인간 삶의 목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철학공부를 하였고, 인생의 목적 탐구에 나서게 된 시점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인간중심철학의 본격적인 시발은 1960년대 였다. 1960년 81개국 공산당회의(소련 모스크바) 참석 후 마르크스계급주의와 내면적으로 결별하고 인간본위 입장으로 사상적 전환을 했다.

특히 1966년 조선노동당 창립20주년 기념논문집에 수록한 자신의 논문(사회발전의 동력: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기술)이 ‘반당 수정주의’논문으로 비판당한 이후, 본격적으로 비밀리에 인간중심 철학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인 자주성과 창조성이 인간본성의 발현임을 인식하였다. 이는 인간중심철학의 철학적 원리로 발전된다. 인간의 종국적 삶의 목적은 인간이 세계의 주인, 자기운명의 주인으로서 끝없이 발전하는 것임을 해명하게 된다.

1969년 말, 철학사명이 인간운명 개척의 길에 있음을 인지하고 인간중심철학 의 원리를 39매 타자용지로 압축 정리하였다. 인간중심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황선생은 북한에서 주체사상의 변질(수령절대주의사상)을 지켜보면서, 북한 김씨 집단 내에서 자신의 인간중심철학 연구와 확산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김씨집단에 순응하면서 북한 주체사상 체계화와 국제적 보급에 앞장서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후, 1997년 2월 12일 대한민국으로 망명에 성공하면서, 북한에서 중단했던 자신의 인간중심철학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전문가들과의 토론과 저작활동을 통해 인간중심철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3. 인간중심철학의 체계와 내용

인간중심철학은 크게, ① 세계관(객관세계의 일반적 특징 규명) ② 인간관(인간의 본질적인 특징 규명) ③ 사회역사관(인간운명 개척의 합법칙성 규명) ④ 변증법과 변증법적 전략전술(인간중심철학의 방법론 제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인간중심철학 평가

황장엽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후학이 평가한다는 것은, 특히 필자와 같이 황선생에게서 500여 시간을 소학습 모임을 통해 배운 제자 입장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황선생이 타 철학과 비교하여 인간중심철학만이 세계철학사에 기여했다고 자평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첫째, 인간이 세계에서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발전과 자기운명 개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인간의 운명문제를 해명하는데 의의를 부여하였지만, 철학의 기본사명이 인간 운명개척에 있다는 일반적 원리를 규명한 것은 인간중심철학이 처음이라는 것이다.

사실 동·서양철학에서도 홉스(Hobbes)나 순자(荀子)처럼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놓고 연구하는 사조가 있었으나, 인간중심철학에서 강조한 것처럼 인간운명 개척의 발전철학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된다.

둘째, 세계가 객관적 존재성과 함께 자기 존재를 보존하려는 주관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규명한 점이다. 이는 기존 철학의 양대 조류인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고 주관적 요인과 객관적 요인을 결합시키는데서 발전의 원인을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셋째,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것이 인간존재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것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양자의 상대적 독자성을 보장하면서 긴밀히 협조하도록 결합시켜나가는 것이 인간발전의 길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

그러나, 서구사회에서 이미 인간이 사회적 존재(즉 집단적 존재)임이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로크 등에 의해 규명된 바 있어, 인간중심철학에서 강조하는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것 자체를 크게 부각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선행철학에서 규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양자를 잘 결합하여 인간발전의 길로 추진시켜나가는 점을 강조한 점은 의의가 있다고 평가된다.

넷째, 변증법(辨證法)을 인간운명개척을 위한 창조적 활동의 방법론으로 전환시킨 점이다. 황선생은 인간중심철학의 변증법적 기본특징으로 ① 양과 질의 통일법칙 ② 대립물 통일의 법칙 ③ 연속성과 불연속의 법칙 ④ 목적과 수단의 통일법칙 ⑤ 주체와 객체의 통일법칙을 들고 있다.

여기서 유념할 점은 공산주의 철학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3대 법칙인 양질 전화의 법칙, 대립물통일투쟁의 법칙, 부정의 부정법칙중 두 법칙을 인간중심철학이 채택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세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황선생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2009)에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오류와 문제점을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인간중심철학의 변증법 원리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출발선부터가 다른 것이다.

황선생은 변증법을 운동의 보편적 특징을 대표하는 운동법칙으로 보고, 이를 인간 운명개척과 발전 활동의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황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이 결코 완벽한 철학은 아니다. 우리 후학들은 인간중심철학을 인류최초의 독특한 철학규명 운운하면서 맹종하는 것을 삼가고, 냉정한 입장에서 인간중심철학의 문제점과 부족함을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Ⅳ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의 비교

북한의 현존하는 주체사상과 황장엽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은 결론부터 말하면, 확연히 다른 사상체계과 운동론임을 알수 있다. 첫째, 창시과정을 보면,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이 초기에는 중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선생은 주체사상이 원래 큰 나라를 무조건 숭배하고 무조건 따라가는 사대주의아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맑스레닌주의를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 북한 김일성정권 하에서 황선생도 동의하고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에 충실했으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자신이 생각했던 주체사상의 변질에 회의를 느껴 인간중심철학의 정립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인정해야 할 점은 현존하는 북한 주체사상의 핵심내용인 철학적 원리, 사회역사적 원리, 혁명적 수령론 등을 황선생이 직접 창안하고 완성시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일족의 수령절대주의 폭압통치의 사상적 체계화와 정식화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여(?)했음은 한국사의 불행이다.

둘째, 주체사상은 사람중심을 내세워 수령폭압통치의 정당성과 공산주의혁명실현을 위한 혁명운동론으로 대변되지만, 인간중심철학은 인간을 철학의 중심에 놓고 인간운명개척과 인류발전에 기여하려는 발전철학이며 운동론으로 역할 지워진다는 점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다.

셋째, 인간관을 보면 주체사상은 사람을 공산혁명을 전제한 계급적 개념의 인간관이지만, 인간중심철학은 인간을 세계와 자연의 주인으로 놓고 운명개척과 발전의 주인으로 보는 인본적(人本的) 인간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넷째, 사회역사관도 주체사상은 계급투쟁에 기초한 역사관이나 인간중심철학은 인간을 사회발전의 주체로 규정한 사회역사관을 전개하고 있다.

다섯째, 운동론을 보면 주체사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 등 세계 공산혁명전략을 지침으로 삼지만, 인간중심철학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발전전략을 제시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발전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여섯째, 인간중심철학에서도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강조하지만 주체사상과 같이 수령에 대한 절대복종과 충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발전을 위한 사회정치적 협조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곱째, 인간중심철학은 주체사상의 수령론을 개인우상화론, 스탈린주의의 수령절대독재론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덟째, 집단주의에 대한 관점도 주체사상과 같이 집단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시각이 아니라, 집단을 무시하는 개인이기주의를 보완하는 시각에서 개인과 집단의 결합과 조화를 중요시하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아홉째, 인간의 본성인 자주성과 창조성에 대해서도 주체사상은 수령통치와 공산혁명의 수단으로서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악용하지만, 인간중심철학에서는 인간운명개척 시각에서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의 발양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열째, 인간,사회,자연개조관도 북한은 공산혁명실현의 관점에서 3대 개조를 주장하지만, 인간중심철학에서는 인간운명개척의 방도로서 발전전략으로서 3대 개조사업을 중시하고 있다.

이외, 종교관을 보면, 주체사상은 기본적으로 종교를 반동적이며 비과학적 세계관으로 비판하고 부정하지만, 인간중심철학은 종교를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을 구원해주기 위해 영생하려는 인간의 요구를 내세에 가서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안겨준다며, 종교의 존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상체계이다. 한 마디로 차이점을 말하면, 주체사상은 북한식 수령절대주의 폭압사상 및 혁명운동론이고 인간중심철학은 인간운명개척을 위한 발전철학이며 자유민주주의발전운동론인 것이다.

Ⅴ 맺는 말

인간중심철학은 황장엽선생이 주체사상의 변질에 회의를 느끼고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정식화한 철학인, ‘황장엽주의’이다. 인간중심철학은 주체사상과는 근본 지향점이 다른 인간 발전의 철학이다.

이의 철학체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체사상의 아류로 폄하하거나 황선생의 사상적 전향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것은 한국현대사의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인간중심철학을 연구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책무를 맡고 있는 황선생의 제자들과 후학들에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후학들은 황장엽선생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정착하면서 행한 족적을 되새기며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 의미는 ① 해방과 분단후 현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성공한 나라였고 북한은 실패한 집단이였다는 것을 확인해준 것이며, ② 맑스레닌주의의 허구성과 함께 수령절대주의 폭압사상인 주체사상과 김씨일가(김일성-김정일)의 반문명적 폭압정권의 실체를 폭로했다는 점이며 ③ 북한민주화운동과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발전을 위해, 인간운명의 개척과 발전을 위해 인간중심철학을 정식화하기 위해 헌신했다는 점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내부에는 주체사상이나 북한의 대남선동에 도취되어 남한혁명을 추구하는 종북세력 등이 발호하고 있다. 이들에게 황선생님의 망명과 북한민주화운동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황선생의 이러한 노력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우리사회를 자정시키고 북한민주화운동을 성사시켜 통일된 자유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인간중심철학 연구자 중에는 인간중심철학을 대한민국의 국학(國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하고 있으나,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학계에서 통용되는 국학이란 “우리의 전통적인 정치·사회·경제·철학·역사·어문·과학·지리·풍속 등 모든 분야의 학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의 말·글·역사·문화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는 한국적인 모든 학문을 의미하며,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연 황장엽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이 한국의 전통문화와 역사를 대변할 사상체계인지 의문이 든다. 어떤 철학이나 사상체계에 대한 개인적인 신념과 가치지향은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추구하는 다양성으로 볼 때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나 특정 철학을 ‘국학’으로 삼자는 주장은 전체주의의 획일성과 사상체계 및 가치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또 다른 ‘누(累)’를 범할수 있기에 신중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문명사에 등장한 어떠한 철학과 사상체계도 완벽한 것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인간중심철학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중심철학의 ‘국학 추진운동’은 잘못하면 황선생이 추구했던 인간운명개척과 인간발전을 위한 고뇌의 본질에서 벗어나 황선생의 유지(有志)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끝으로, 황장엽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배우고 연구했던 제자들이나 후학들이 할 일은 냉정하고 겸허하게 인간중심철학의 제한점과 문제점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황선생이 추구했던 인간운명을 개척하는 발전철학으로 우리 인류가 더욱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기여하는데 일조하는 일이다.

“인간중심철학은 인류의 운명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인간운명의 철학이다. 끝없이 발전하는 인류의 영원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행복하고 보람있는 삶을 개척하는 것이 인류의 종국적 삶의 목표이며 가장 올바른 생존방식이다”(황장엽, 인간중심철학원론, 머리말 中)

<제4 발제문>

황장엽 망명 비화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

1. 황장엽은 누구이며, 왜 망명했나?

2. 황장엽은 끝까지 한국 망명을 망설였다

3. 1997년 2월 초 일본에서의 망명공작 실패

4. 아들 황경모 이용해 김정일 제거 계획 세워

5. 황장엽, 망명 직전 장성택·김용순 우리 측에 연결해 주다

6. 황장엽의 유언(遺言), 실행에 옮기다

7. 홍정길 목사, 황장엽·김덕홍 망명의 미끼로 동원돼

8. 안기부 요원들은 1계급 특진, 이연길 회장은 활동 제약

1 황장엽은 누구이며, 왜 망명했나?

황장엽은 지금까지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 중 최고위급 인사다. 그가 망명 당시 북한에서 가지고 있던 직책은 노동당 중앙위 비서였다. 당 중앙위 비서는 김정일을 포함해 10명에 불과할 정도로 북한의 실세 중에서 최고 실세로서, 부총리급 이상의 예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 선생은 국제담당 비서로서 북한 외교를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황장엽은 김정일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 왜냐하면 1973년 9월 김정일이 당 중앙위 제5기 7차회의에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선출된 이후 김정일에게 제왕학을 가르치고 그의 공·사생활까지를 관리해 온 인물이 황장엽이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김정일 후계체제를 굳히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김정일의 과거 경력을 ‘김일성의 후계자’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뜯어고치는데 앞장선 것이다. 김정일의 출생지를 시베리아가 아닌 백두산 밀영으로 조작하고, 김정일에게 ‘영명한 지도자’ ‘당 중앙’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을 붙이고, 김정일의 생일인 2월 16일을 공휴일로 지정, 3대혁명 소조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황장엽이었다.

김정일의 두 번 째 처인 김혜숙을 중매시켜 준 사람도 황장엽이요, 황장엽의 부인이 한때 김정일의 가정교사였다. 말하자면 황장엽은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와는 뗄레야 뗄 수없는 관계로 얽혀 있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황장엽이 북한을 지탱하는 기둥이나 다름없는 주체사상의 창시자라는 점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기본 원칙 아래,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自衛)를 지도 지침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황장엽이 망명을 결행하게 된 계기도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에서 비롯되었다. 황선생은 1972년부터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을 10년 이상 맡았는데, 우리로 치면 국회 외무통일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비동맹 외교 차원에서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70여 개 국에 조직된 수백개의 주체사상연구소를 정기적으로 순방하면서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돌아다녔다.

문제가 된 것은 지난 199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주체사상 세미나였다. 이 세미나에 참석한 황장엽 비서는 당시 김정일 정권의 귀에 거슬리는 발언을 했다. 처음에는 잠잠했는데 석 달 뒤 문제가 불거졌다. 1996년 5월 10일자 ‘로동신문’에 황장엽을 비판하는 장문의 비판 기사가 실린 것이다.

로동신문은 이날 ‘사회주의 야심가, 음모가’라는 격렬한 표현을 써가면서 ‘지도부 내에 있는 수정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혁명 위업에 충실한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수령을 헐뜯고 사회주의를 말아 먹는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외관상으로 보면 사상 오염을 경고하는 기사였다.

이것은 명백히 황장엽을 겨냥한 기사였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황장엽은 베이징에 내보낸 여광무역의 김덕홍 사장을 통해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장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황 선생 입장에서 볼 때 김정은은 자신이 옹립한 것이나 다름없는 지도자다.

그런데 김정일이 수백만 북한 주민을 굶겨죽이면서도 민족의 파멸을 가져올 위험천만한 남한 침략 준비 모습을 보면서 김정일을 제거하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베이징에 외화벌이 차 내보낸 김덕홍을 통해 남한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 김덕홍은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강원룡 목사, 남서울은혜교회의 홍정길 목사 등과 만나 도움과 협조를 요청한 바 있다. 남한 내에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이 와중에 이연길 씨와 만나 김정일 제거에 의기투합하게 되는데, 바로 이 무렵 노동신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황 선생은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노동신문에 황장엽을 비판하는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행동하자”면서 고 망설이던 김덕홍도 이때부터 스피드를 내기 시작했다. 이 와중인 1996년 7월 북한 노동당 이론지 <근로자>에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라는 김정일 명의의 논문이 게재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이 논문의 개요는 이렇다.

‘최근에 우리의 일부 사회과학자들이 주체철학을 해설하는 데 우리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그릇된 견해를 주장하고 있으며 그러한 견해가 대외에도 유포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 논문에서 김정일은 주체사상이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의 토착화가 아닌 사람 중심의 새로운 철학적 원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황장엽은 이 논문을 보고 명백히 자신을 겨눈 칼날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지난 5월 ‘노동신문’에 게재된 글은 노동당 내의 이론가들이 작성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김정일 명의의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이 황장엽의 망명을 결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2 황장엽은 끝까지 한국 망명을 망설였다

황장엽 선생은 1997년 1월 말까지만 해도 자신의 망명을 끝까지 망설였다. 왜냐면 자신이 북한에 남아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중요한 역할’은 바로 김정일 제거였다. 황 선생은 베이징 모처에서 이연길 회장을 만날 때마다 “김정일이 존재하는 한 북한은 남한을 침략하여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민족적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김정일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누차 역설했다.

당시 황장엽 선생의 복안은 1)김정일 설득하여 해외 망명 유도 2)민중봉기에 의해 김정일과 그의 추종집단 타도 3)비밀결사를 조직해 김정일 제거 4)이도저도 어려우면 김정일 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자신의 한국 망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기부가 황장엽-김덕홍 망명 공작에 개입한 1996년 8월부터 분위기가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1~3안은 사라지고 마지막 방법, 즉 황장엽의 한국 망명으로 틀어져 버린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검토한 끝에 황 선생의 망명 시기는 1997년 4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는 비동맹회의 참석 때 뉴델리나 중간 기착지인 방콕에서 결행하기로 상호 약속이되어 있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창시자로서 해외에 주체사상연구회를 여러 곳에 세워놓았는데, 1년에 몇 차례씩 이곳을 순방하곤 했다. 이런 해외 순방 기회를 이용하여 망명을 결행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연길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4월로 예정되었던 황장엽·김덕홍 씨의 망명 시기를 2월로 앞당긴 것은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였다. 황 선생은 1997년 1월 28일부터 2월 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주체사상 학술회의(정식 명칭은 21세기 인간의 지위와 관련한 국제세미나)에 북조선 대표단 단장으로 참여하기 위해 1월 28일(화) 평양을 출발, 베이징에서 이틀간 체류한 후 1월 30일 오후 1시 15분 일본으로 떠났다.

황 선생이 이틀간 베이징에 체류하는 기간 중 베이징 시내의 모 호텔에서 김덕홍과 안기부의 대북공작 책임자 N 씨가 비밀 접촉하여 황 선생의 한국 망명 문제를 협의했다.

N씨는 “이번 일본 방문 기간 중에 망명을 결행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때 김덕홍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연길 회장과 황 선생이 의기투합한 대의(大義)는 김정일 제거였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고위층으로 지내다 탄압을 받아 해외로 망명 혹은 탈출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결집하여 해외에 망명정부를 세운 후, 김정일이 제거되면 해외 망명정부 인사들이 북한에 들어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여 남북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구상을 했다.

이연길 회장은 1993년 3월부터 러시아와 중국을 다니면서 이상조(주소련 북한 대사, 휴전회담 당시 북한 측 대표), 장학봉(인민군 기갑사단장 출신), 박영빈(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심수철(소련군 고위 장성 출신), 이춘백(김일성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인민군 장성) 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들이 북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연길 회장은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 씨와 접촉하여 조선민주통일 구국전선이란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의 활동목표가 김일성, 김정일 독재체제 청산, 북한을 개방 민주화하여 자유민주 체제로 개편, 자유 평화 민주적 민족통일 달성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이 단체의 목표가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해 오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과 연대를 모색했다.

이 회장은 1994년 봄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를 출범시켰다. 이 단체의 목적은 공작적 차원의 방법론을 동원하여 김일성 부자(父子)를 타도하고 북한 주민을 독재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민간 차원에서의 김정일 제거작전을 시작한 셈이다. 필자도 북민협의 간부로서 이 회장과 함께 이 운동에 투신했다.

황 선생은 어렵고 위험천만한 일이긴 하지만 어떻게 하든 남한의 도움을 받아 만악(萬惡)의 근원인 김정일을 제거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런데 안기부가 황 선생의 망명공작에 개입하면서부터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만약 황 선생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망명을 결행한다면 일본 방문을 마치고 북으로 돌아간 후 황장엽·김덕홍 두 분 가족을 먼저 베이징으로 피신시킨 후, 4월 뉴델리 비동맹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움직이는 기간 중 방콕이나 뉴델리에서 결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기부가 1997년 1월 말~2월 초까지 일본 방문 기간 중 일본에서 망명을 결행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문제가 복잡하게 꼬였다. 그것은 곧 북에 있는 가족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김덕홍 씨가 결심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안기부의 대북 공작 책임자 N 씨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N 씨는 “황 선생 망명과 관련한 정보가 새나갔다. 한국의 월간조선이란 언론이 눈치 채고, 취재를 하여 3월호에 터뜨릴 것이란 정보가 입수됐다. 언론 보도를 막을 방법이 없으니 이번에 망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기부는 필자와 이연길 회장의 접촉 사실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알고 있었고, 이를 황 선생의 망명을 위한 도구로 써먹은 셈이다. 이 사실은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이연길 회장이 필자에게 전해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덕홍 씨는 “이연길 회장의 의견을 들어보고 판단하겠다”고 했다. 이 회장은 후에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당시 나는 뭐라고 권할 입장이 못 됐다. 황선생과 김덕홍씨 가족 문제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도쿄 방문기간에 망명하지 못하면 4월에 과연 뉴델리 비동맹회의에 참석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만큼 북한 내에서 황 선생의 입지가 어려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회장은 황 선생에게 “여러 정보들을 분석해 본 결과 이번 도쿄 방문기간에 결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고, 황장엽은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3 1997년 2월 초 일본에서의 망명공작 실패

황장엽 선생은 1997년 1월 28일 평양을 출발, 베이징에서 이틀 간 체류한 후 1월 30일 오후 1시 15분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황 선생은 교토-나가노-도쿄를 돌며 조총련 방문, 강연, 및 학술간담회 참석 일정으로 짜여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황장엽 선생의 일본에서의 망명 계획은 실패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안기부의 일본 라인과 망명 공작을 위해 한국에서 파견된 요원들이 손발이 잘 맞지 않아 황장엽 망명과 관련된 일부 계획이 일본 정보기관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에서부터 따라온 수행원(감시원)과 조총련계 동포들이 황 선생을 둘러싸고 다녔기 때문에 결행이 불가능했다.

우리 측이 일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망명 공작 일부가 새나가면서 일본 내각조사실은 황장엽 선생이 일본에서 망명할 경우 복잡한 국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철저하게 결행을 하지 못하도록 움직였다.

이 회장은 일본으로 날아가 황 선생의 동선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일본 체류 마지막 날 도쿄의 한 호텔에서 황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황 선생은 이 회장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손바닥 안에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건네주었다. 그 종이에는 “북경에 차를 대기시키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이연길 회장이 베이징으로 날아와 보니 김덕홍과 안기부의 모 간부가 베이징에서 망명 결행 문제로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 회장은 김덕홍에게 황 선생이 전해준 메모를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김덕홍은 결심을 굳히고 망명을 실행했다. 결과적으로 황장엽-김덕홍 씨의 망명을 서두르는 바람에 가족을 먼저 대피시키지 못해 두 분 가족은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생사 확인이 안 되고 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황장엽 선생의 부인 박승옥(외국 교육도서 출판사 편집원) ▲아들 황경모(당시 33세, 조선인민군 부대) ▲큰 딸 김형직 사범대 교원(준박사) ▲둘째 딸 의학대학 연구사(준박사) ▲셋째 딸(의사)

▲김덕홍 씨의 부인 박봉식(정무원 대외봉사국 재정처 지도원) ▲큰 아들 김문철(30세, 평양시 안전국 정치부 지도원) ▲큰 딸 김문희(32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둘째 딸 김명희(28세, 평양시 지하상점 판매원) ▲셋째 딸 김정희(24세, 평양시 해방산려관 부기원)

4 아들 황경모 이용해 김정일 제거 계획 세워

황 선생은 김정일 제거를 위해 자신의 아들 황경모를 역사의 제단에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김덕홍은 이연길 회장에게 황장엽 선생의 아들 황경모를 이렇게 소개했다.

“황 선생의 아들 경모가 있다. 이 애는 나를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다. 경모는 김일성대학 철학과를 졸업했고, 주체과학원 철학연구반 준박사를 획득했으며, 용모가 수려하고, 태권도 7단에 수영을 잘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군부와 호위총국 내에 아는 사람이 많다.

성격이 활발하고, 행동적이다. 현재 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으로 나오게 해서 데리고 있을 예정이다. 황경모 군은 김정일 정권의 타락상과 공화국의 모순과 장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고위층 자제들과 교우로 외국에 나와 본 사람 못지않게 국내외 사정이 밝다.”

황경모는 북한의 실세 장성택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었던 황경모는 군부와 김정일 경호부대인 호위총국의 장교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들을 포섭하여 거사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세워 김정일을 제거하려 했다.

황 선생은 이연길 회장에게 황경모를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불러내서 거사를 준비하도록 하려면 그가 안심하고 활동할 수 있는 거점을 중국 내에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요청했다.

이 회장은 이를 위해 선양(瀋陽) 지역에 매물로 나온 한 호텔(말이 호텔이지 사실은 여관 수준)을 매입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 호텔의 운영을 황경모에게 맡겨 자연스럽게 중국을 드나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거사를 위한 준비를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회장이 구입하려고 점찍어 두었던 호텔이 중국의 한 부동산 업자에게 넘어가버렸다. 호텔 인수 건이 실패한 후 이 회장은 오피스텔이나 임대사업용 건물을 하나 구해 거점을 확보하고, 일부는 임대를 하여 활동비로 사용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베이징 시내에 쓸 만한 건물이 나타나 흥정을 한 결과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이 회장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제주도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부동산 매각을 통해 건물 매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황경모가 거사 자금 마련을 위해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를 빼내 해외에 내다 파는 과정에서 북한 반탐(反探)기관에 정보가 누설되어 황경모가 추적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성택이 간염을 핑계로 황경모를 급하게 군병원에 입원시킨 후 오래 전부터 입원했던 것처럼 위장하여 위기를 넘겼다.

5 황장엽, 망명 직전 장성택·김용순 우리 측에 연결해 주다

당초 계획했던 아들 황경모가 북한 당국의 집중 감시를 받는 데다, 자신마저 노동신문, 근로자 등의 매체를 통해 공격을 당하면서 아들을 이용한 김정은 암살 공작이 어렵게 되자 황 선생은 다음 카드를 준비했다. 그것이 북한의 대남공작 총책 김용순과 장성택이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북한의 실세이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고, 김용순은 북한의 대담담당 총책 겸 북한 아태평화 위원회 위원장이었다. 김용순은 한국으로 말하자면 국정원장이나 다름없는 거물로서,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용순 비서”라고 부를 정도로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김용순은 김정일의 특사 자격으로 제주도를 방문, 임동원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특보와 만나기도했다. 김일성대학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대학에서 유학한 김용순은 아태평화위 위원장을 겸직하며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협력 사업도 맡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금강산관광사업을 성사시켰다. 남한과의 경협 사업은 물론 대남공작까지 총괄하는 북한 최고위층 실세 중의 하나였다.

황 선생이 한국으로 망명을 결행하기 3개월쯤 전인 1996년 11월 무렵 베이징에서 이연길 회장에게 “우리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김용순과 장성택을 연결해주었다.

황 선생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며 우리의 거사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인물이니 남측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해 주라”고 요청했다.

이연길 회장은 황 선생의 소개로 김용순·장성택 두 사람이 보낸 대리인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당시 두 사람이 보낸 대리인은 이 회장에게 “우리가 문화재급 골동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남한에 팔아서 거사를 위한 자금을 만들어 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다.

귀국한 이 회장은 필자에게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대리인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건네주면서 이 골동품을 국내에 판매할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필자는 이 자료를 가지고 골동품 전문가들을 만나 상담을 한 결과 진품이라는 보증서나 평가서가 있으면 꽤 값이 나갈 만한 것이 있으니 사진과 공증서, 영상자료 등을 요구했다.

이 내용을 이 회장을 통해 장성택·김용순의 대리인에게 요청한 결과 ‘골동품 고증자료’를 보내왔다. A4 용지 18매 분량의 이 문건에는 ‘인형돋을 무늬흰자기 단지’, ‘룡돋을 무늬 석간주 흰자기 단지’, ‘색화조무늬흰자기 항아리’ 등 11개 물품 목록과 함께 이들에 대한 고증서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골동품 매각을 통한 자금 마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증서와 사진 등을 요청하며 시간이 흐르는 사이 황장엽 망명 사건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필자와 이연길 회장은 황장엽·김덕홍 망명 사건 이후 북한 고위층 대리인과의 모든 접촉 라인이 끊어졌다.

당시 안기부는 황 선생이 장성택·김용순 등 북한 고위층이 보낸 대리인을 이연길 회장에게 소개시켜 준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회장이 필자를 통해 국내에서 골동품을 매각하여 자금을 마련하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이 바보가 아니라면 황 선생이 한국으로 망명을 한 후에도 이 라인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2003년 6월 16, 북한의 대남담당 총책 김용순이 평양에서 석연치 않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용순 사망 관련 북한 보도를 종합하면 2003년 6월 16일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간 입원 치료를 받던 끝에 사망했다.

김용순은 그 이전인 2001년 1월 이후 1년이 넘도록 공개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실각설, 숙청설이 나돌다가 자동차 사고로 숨진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양에 차량이 몇 대나 되며, 김용순 같은 거물들은 김정일이 제공한 벤츠 차량이 전용차다. 사고가 나도 안전에 관한 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벤츠 승용차를, 운전기사도 없이 심야에 혼자서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는 것이 북측의 주장이다.

김정은은 북한 최고위층을 TV로 생중계하는 자리에서 공개리에 끌어내다가 만인이 주시하는 앞에서 고사포나 기관총으로 처형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등 공포통치로 자기 과시를 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 김정일은 보다 치밀하고 교활했다. 자신의 눈 밖에 나거나, 필요 없다고 판단된 인사들은 소문도 없이 조용하게 처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동차 사고를 가장한 살해였다.

필자는 김용순의 자동차 사고 사망 뉴스를 접하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그때 우리와 접촉한 이후 계속해서 우리 정보기관과 접촉을 계속하다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장성택은? 그는 과연 무사할까? 필자는 그 무렵 북한과의 모든 접촉 라인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우리 정보기관이 장성택·김용순 라인과 어떤 접촉을 진행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6 황장엽의 유언(遺言), 실행에 옮기다

2010년 10월 10일 오전 9시 30분경, 황장엽 선생은 자택 욕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87세를 일기로 남한 땅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필자는 황 선생이 사망하기 몇 달 전 공개석상에서 황 선생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황 선생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는데 필자가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건네자 “요즘 자꾸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하시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하고 묻자 하늘을 가리키며 “저 위에서 빨리 오라고 하네” 하며 허허 웃으셨다. 잠시 망설이던 황 선생은 필자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필자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김 기자가 마지막 역할을 해 줘야 되겠어.” 힘없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하시더니 뒤돌아 가셨다. 그것이 황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마지막 역할을 하라”는 말씀은 유언(遺言)이 되었다. 필자는 황 선생의 부음 소식을 접하면서 황 선생의 유언을 떠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역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황 선생은 김정일 제거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역사의 제단에 바치려 했던 분이다. 그리고 당초 계획과는 달리 가족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망명을 결행하는 바람에 부인과 아들 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 자기 아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장성택과 김용순을 동원하여 북한 사회에 변화와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황 선생은 한국에 와서 사는 13년 세월 동안 장성택에게 직간접으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다. 황 선생이 장성택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분명했다. “과거 나와 약속했던 대로 김정일(혹은 그 후계자 김정은)을 제거하여 북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너의 몸을 던져라.”

불행하게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은 황 선생이 장성택에게 메시지를 전하려 할 때마다 이를 만류하거나 교묘한 방법을 동원해 방해했다. “그러다 접촉 라인이 노출되면 장성택이 위험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황 선생은 국정원의 만류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장성택에게 비공식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성택은 요지부동이었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식 데뷔한 이후, 그는 김정은 체제의 연착륙을 위해 노력했을 뿐 황 선생과 약속한 ‘북한의 변화와 개혁’을 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지하에 누워 계신 황 선생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었다.

필자는 2010년 7월 언론계를 떠나 잠시 공직에 몸을 담았다. 공무원 신분으로서, 또 북한과의 접촉 라인이 끊어진 입장에서 장성택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수단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김정은 체제는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김정은은 3차 핵실험을 비롯하여 미사일 발사 등 온갖 도발과 기행, 만행을 일삼으며 대한민국을 농락했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김정은 체제의 연착륙을 위해 발 벗고 뛰고 있었다. 2013년 1월 초 필자는 공무원 신분에서 벗어나 모 산하기관의 감사로 자리를 옮겼다.

공무원 신분에서 벗어나 활동이 자유스러워자 고민이 깊어졌다. 적어도 김정일 시대까지는 북한의 움직임이 예측 가능했고, 최전방 지역에서 노골적으로 한미 동맹에 위협을 가하는 군사행동은 자제해 왔다. 그런데 장성택이 희대의 폭군이자 예측 불가능한 통치 행태를 보이는 젊은 지도자 김정은을 도와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면 우리에게는 큰 부담이 될 것이 틀림 없었다.

그렇다면 장성택을 김정은으로부터 떼어내 김정은을 고립시키고, 북한 최고위층 내부에 자중지란을 일으키도록 이간하여 김정은 체제를 뒤흔드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오랜 고민끝에 작심을 하고 2013년 4월 초 월간조선에 근무하는 후배 기자들을 만나 그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장성택·김용순 라인이 보내온 ‘골동품 고증자료’ 문서를 공개했다. 그리고 황장엽선생이 망명 직전우리 측에김용순과 이름을밝힐 수 없는 또 한명의 북한고위층을 소개시켜 준 사실 등을 공개했다.

이 내용은 월간조선 2013년 5월호에 ‘황장엽 망명 특종 김용삼 기자가 이제야 털어놓는 또 다른 특종, “황장엽 망명 직전 또 다른 북한 최고위층 2명과도 접촉 있었다”’라는 제하의 기사로 보도됐다.

필자는 이 기사를 통해 황장엽이 망명 직전 우리 측에 연결시켜 준 북한 고위층 인사 두 명 중 한 명은 지난 2003년 평양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용순이고, 또 다른 1명은 북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현직 최고위층이라고 밝혔다. 바로 그 ‘또 다른 북한 현직 최고위층’이 장성택이었다. 필자가 당시 장성택의 실명을 밝히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아직 북한에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황장엽 망명 후인 1997년 10월 공개 처형당한 북한농업상 서관히는 황장엽과 “뜻을 같이했던 인물”이라고 밝혔고, 망명 사건 보도 과정에서 공개하지 않았던 황장엽 선생의 친필서진 중 5·18 광주 관련 발언 내용을 공개했다. 즉 “광주학생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을 전가한 일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황장엽 선생이 아들 황장엽 선생이 아들 황경모를 통해 김정일 암살 계획을 세웠던 사실 등을 공개했다.

필자의 의도는 단순 무식했다. 장성택이 황 선생과 약속한대로 김정은의 제거, 혹은 북한의 변화와 개혁은커녕 핵실험을 해대고 무시로 미사일을 쏴대는 통제 불능의 사이코 패스형 폭군의 권력 장악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면 필자는 황 선생과의 마지막 유언을 실행할 의무가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 황 선생의 유언에 담긴 뜻이라고 판단했다.

필자는 언론을 이용해 폭로하는 과정에서 김용순이야 이미 북한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으니까 이름을 공개해도 상관없지만, 장성택의 이름마저 공개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현직 최고위층’이라고만 했을 뿐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사의 문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공개한 골동품 고증자료를 보면 그것을 소유한 인물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흘렸다.

과거 필자가 월간조선 기자 시절 김대중 대통령이 임명한 장충식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인터뷰하여 월간조선에 게재한 적이 있다. 장충식 총재는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하여 필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엄청나게 힘든 과정을 거쳐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설적인 용어를 동원하여 설명했다.

이것이 북한 최고 지도자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 인터뷰 기사가 실린 잡지가 발매된 지 얼마 후 북한 방송매체는 장충식 총재에 대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할 용어를 동원하여 공격해댔고, 부담을 느낀 김대중 대통령은 장 총재를 해임했다.

북한 정보기관은 베이징을 통해 월간조선을 7부 정도 정기 구독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월간조선 잡지가 매월 18일 발매되면 북한 정보기관은 25~30일 경 베이징을 통해 이 책을 입수하여 분석에 들어간다. 분석이 끝나 최고위층에게 보고과정을 거쳐 대책을 마련한 후 반응을 보이는 것이 그 동안의 통상적인 흐름이었다.

월간조선 5월호는 2003년 4월 18일 발매되었으니 북한 정보기관은 이 책을 4월 25~30일 전후에 입수했을 것이다. 그런데 5월 22일, 의미심장한 일이 벌어졌다.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후 최초로 중국에 보내는 특사를 중국통이며, 북한이 원했던 장성택이 아니라 최룡해(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로 갑자기 교체된 것이다.

게다가 조선중앙통신은 최룡해가 현역 장군 정복 복장으로 평양 비행장을 떠나는 모습을 보도했다. 북한이 대중(對中) 특사 파견을 평양 출발부터 보도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그 무렵은 중국이 북한의 3차 핵실험(2월 12일) 도발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결의안 준수에 적극 동참하면서 북·중 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시기였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김정은은 중국이 원했던 장성택을 배제하고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를 특사로 보낸 것은 큰 충격이었다. 필자는 뭔가 북에서 중대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혹시 월간조선보도가 장성택의 중국행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닐까. 그로부터 7개월 후인 2013년 12월 12일 김정은은 공개석상에서 장성택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그의 처형 다음날 조선중앙통신은 장성택에 대한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이 진행됐으며, 공화국 형법 제60조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았고, 즉시 판결이 집행됐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는 이렇게 이어졌다.

“장성택은 정권야욕에 미쳐 분별을 잃고 날뛰던 나머지 군대를 동원하면 정변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타산하면서 인민군대에까지 마수를 뻗치려고 집요하게 책동했다. 장성택은 심리과정에 ‘나는 군대와 인민이 현재 나라의 경제실태와 인민생활이 파국적으로 번져지는 데도 불구하고 현 정권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게하려고 시도했다’고 하면서 정변의 대상이 바로 ‘최고영도자 동지이다’고 만고역적의 추악한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놓았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장성택은 인민군대를 포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최고영도자 동지’, 즉 김정은을 제거하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려다 체포되어 변을 당한 것이 된다.

필자는 장성택이 북에서 실제로 정변을 일으켜 ‘최고영도자 동지’를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는지 그 전모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북한 내부의 내밀한 소식을 접할수 있는 정보통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필자의 증언을 토대로 보도된 월간조선의 기사가 장성택의 체포와 총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데,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필자는 황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마지막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역할 수행이 장성택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김정은의 선택일 뿐이다.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에서는 공포 통치가 가일층 강화되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비롯하여 최영건 내각 부총리,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노경준 최고사령부 1여단장, 조영남 국가계획의 부위원장, 한광상 노동당 재정경리부장 등이 고사총(혹은 기관총)으로 처형되거나 숙청, 실종됐다. 북에서 숙청 혹은 실종은 정치범 수용소 수감 혹은 비밀 처형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생존해 있을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

어쨌든 필자가 단순 무식하게 의도했던 북한 지도부 이간 및 분열공작은 김정은의 열화와 같은 도움 덕분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평한다. 이로써 필자는 황 선생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았고, 마지막 유언도 실행에 옮겼다.

7. 홍정길 목사, 황장엽·김덕홍 망명의 미끼로 동원돼

또 한 가지 밝혀야 할 내용이 있다. 1997년 1월 말부터 2월 10일까지 황 선생이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망명하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귀국을 위해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베이징의 한국 영사관으로 탈출함으로써 성공했다. 2월 12일 오전 이연길 회장이 황장엽·김덕홍 씨를 베이징의 한국 영사관으로 안내하는 동안, 또 한 사람이 망명 공작에 등장한다.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다.

홍정길 목사는 1996년 중국에서 김덕홍 씨와 접촉한 일이 있다. 당시 김덕홍 씨는 황장엽 선생이 대표로 있는 국제주체재단이 외화 벌이를 위해 중국에 설립한 여광무역 대표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광무역이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 못해 김정일에게 충성자금을 바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의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여 식량이나 물품 지원을 요청했다.

홍 목사도 김덕홍 씨와 만나 인도적 차원에서 기독교 단체의 밀가루 대북 지원 문제를 상의했다고 하며, 이연길 회장도 이런 과정에서 김덕홍 씨와 만나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97년 2월 11일 정보기관 요원으로부터 “김덕홍 씨가 급한 일로 목사님을 2월 12일 오전에 베이징에서 만났으면 하는 연락이 왔으니 수고를 해 주셨으면 한다”는 연락이 왔다. 홍 목사는 밀가루 지원 문제인 줄 알고 베이징으로 가서 약속한 호텔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되어도 김덕홍 씨는 나타나지 않고 낯선 남자 두 명이 나타나 “황장엽 선생과 김덕홍 선생이 좀 늦을 예정이라 우리가 먼저 왔다”고 인사를 했다. 당시 정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1997년 2월 12일 오전 9시 30분 황장엽-김덕홍 씨는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에서 주창준 북한 대사에게 “베이징에서 ‘밀가루 1만 톤을 제공하고 싶다는 의향서를 지닌 한국의 한 목사를 만나고 오겠다”고 설명하고 외출을 나왔다. 경호원이 두 명 따라붙었다.

당초 일정에 의하면 황 선행은 12일 오후 출발하는 고려민항 편으로 베이징을 떠나게 돼 있었다. 대사관에서 나온 황 선생은 경호원 두 명에게 “밀가루 1만 톤을 주겠다는 사람이 ○○호텔에 묵고 있으니 자네들이 먼저 호텔에 가서 기다리게. 나는 잠깐 김덕홍 사장과 일을 보고 호텔로 가겠다”고 말했다. 경호원들을 ○○호텔로 보낸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베이징의 ‘대한민국 대사관 영사부’로 들어갔다. 10시 5분이었다. 황장엽-김덕홍이 대한민국 주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편 홍 목사는 낯선 남자와 두 시간여 기다렸으나 황장엽 선생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홍 목사가 호텔에서 황장엽·김덕홍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그 시각, 황장엽-김덕홍씨는 베이징의 한국 영사관으로 들어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감시원과 앉아서 이제나저제나 황 선생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김덕홍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지금 한국 영사관에 와 있습니다. 빨리 피하시오” 라는 메시지를 받은 홍 목사는 감시원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침착하게 전화를 끊고는 호텔을 빠져나와 그 길로 공항으로 직행하여 간신히 베이징을 탈출했다.만약 감시원들이 황장엽·김덕홍 두 사람의 망명 사실을 눈치 챘다면 홍정길 목사는 북한에 납치될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홍 목사를 감시자를 따돌리는 미끼로 사용한 셈이다. 후에 홍 목사에게 나타났던 감시자 두 명은 북한에 소환돼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8 안기부 요원들은 1계급 특진, 이연길 회장은 활동 제약

2월 12일 베이징의 한국 영사관으로 망명한 황장엽·김독홍 씨는 북한이 강력 반발하고 베이징 일대에 일촉즉발의 기운이 감돌자 심리가 극도로 불안해져 서울의 이연길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베이징으로 꼭 좀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일보 2월 13일자 조간에 “인민이 굶어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 라는 제하의 황장엽 친필서신 특종기사가 보도됐다.

이 회장은 조선일보에 황장엽 친필서신 보도가 나간 줄 까맣게 모르고 새벽에 공항으로 나갔다가 출국심사장에서 안기부 요원들에게 연행돼 안가로 끌려갔다.

요원들은 “조선일보에 황 선생 관련 기사가 다 보도됐더군요” 하면서 이 회장을 취조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연길 회장은 조선일보에 자료 유출에 대한 추궁을 당했을 때 “나의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쓸 때 자료로 활용하라는 뜻에서 넘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6·25 때 미군이 운용하던 KLO 대원으로서 대북 첩보전선에서 사선을 숱하게 넘나들었던 베테랑 첩보요원이었다. 그는 정보기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작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회장은 자신이 황장엽 망명공작 진행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할 경우 황장엽 망명의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차원에서 황장엽 선생이 제공한 자료를 기자에게 빠짐없이 넘겨준 것이다.

1996년 10~11월 무렵 황장엽 망명의 구체적인 물증들이 입수되자 안기부는 이연길 회장에게 ‘이번 황장엽 망명사건의 추진에 있어 안기부의 지시를 받아…’라고 되어 있는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각서 내용을 확인한 이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안기부의 지시를 받아서 망명공작을 추진했다니.

사실 황장엽 망명공작은 이연길 회장 단독으로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낸 성과였고, 이 과정에서 필자와 모퉁이돌 선교회의 이삭 목사가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이 회장은 황장엽·김덕홍 씨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 혹은 물질적 지원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필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도움을 요청했다. 필자는 성심성의껏 이 회장을 도왔고, 물질적 지원 요청이 있을 때는 이삭 목사의 도움을 얻어 지원을 했다.

이 과정에서 김덕홍 씨의 요청을 받고 황장엽 선생이 대표로 있는 국제주체재단 앞으로 200만 평에 파종할 수 있는 옥수수 종자와 인도적 의약품(시가로 약 260만 달러 상당)을 보내 황장엽선생을 돕기도 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거사 계획이 논의되면서 황장엽·김덕홍 씨는 요구 수준이 점점 커졌고, 나중에는 필자나 이회장, 이삭 목사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할수없이 국가 기관에 지금까지의 접촉 과정을 제보하고 국가 기관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안기부의 지시를 받아’ 공작을 진행했다니…. 이연길 회장은 서명을 거부하고 각서 내용을 ‘안기부와 협의 하에…’라고 수정한 후 서명했다.

조선일보에 황장엽 망명사건의 전모가 보도된 직후 이 회장은 부산의 한 호텔에 억류되다시피 하여 활동이 중지됐다. 당시 안기부 측 설명으로는 이 회장의 신변보호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혹시라도 이연길 회장이 황장엽 망명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기자회견이나 양심선언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안기부는 황장엽 씨 관련 보도가 나간 후 이연길 회장에게 ‘월간조선 김 모 기자와 만나지 말 것, 국민회의 임복진 의원과 접촉하지 말 것’이라는 각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이연길 회장이 부산의 한 호텔에서 강제 연금생활을 하고 있을 때 임복진 의원이 면담을 요청했는데, 이 회장이 이를 거부한 것은 이 각서 때문이었다.

1997년 12월 대선이 다가오던 9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이 회장은 딸이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브라질로 ‘자의반 타의반’ 외유를 떠나야 했고, 선거 직전에는 ‘등 떠밀려’ 호주로 출국했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인 1998년 1월 초에 귀국했다.

황장엽 망명사건과 관련되었던 안기부 요원들은 모두 1계급 특진하고 훈장도 받았다. 이연길 회장은 월간조선에 황장엽 관련 자료를 유출한 일로 인해 1년여 자유스런 활동을 제약 당했다.

권영해 안기부장은 1997년 2월 12일 아침 황장엽 선생이 베이징의 한국 영사관으로 들어간 날 오후 중앙 일간지와 방송사 편집국장들을 안기부 청사로 초청하여 ‘황장엽 사건은 안기부의 공적이라고 설명하며 보도협조를 강조했다.

그러나 안기부의 이런 계획은 필자가 조선일보에 황장엽 친필서신, 그 동안 이연길 회장과 황장엽-김덕홍 씨와의 대화록과 접촉 일지 등을 상세하게 보도함으로써 물거품이 되었다. 사실 황장엽 사건 취재는 1996년 5월부터 시작하여 1996년 12월과 1997년 1월에 결정적으로 황장엽 선생의 친필서신, 논문, 황 선생이 보내온 자료들을 입수하면서 거의 끝난셈이었고, 이제는 결행하는 시간만 기다려야 하는 희한한 상황이었다. 1997년 1월 하순 황장엽의 일본 방문 스케줄을 입수했을 때는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짜릿한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황장엽 망명사건이 막상 벌어진 후 주위에서는 이연길 회장이 극비중의 극비에 속하는 황장엽 자료를 순순히 필자에게 넘겨준 부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고, 안기부가 월간조선에 자료를 넘겨준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안기부는 외신기자들에게 필자가 자료 입수과정에서의 불법성을 강조하며 “사법대응 검토 중”임을 흘렸다. 심지어 통일부에서는 필자가 북한주민 접촉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면서 고발을 검토하겠다고발표했다.

필자는 미국 국적의 한국인 목사인 이삭 목사(모퉁이돌선교회 대표 목사)로부터 옥수수 종자 등 100만 달러가 넘는 인도적 물품을 제공받아 이연길 회장을 통해 김덕홍 씨에게 제공했다. 또 이 회장으로부터 “김정일 생일날 황선 생이 김정일에게 생색낼 수 있는 선물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이삭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삭 목사는 용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누구에게 전해질 것인지 묻지도 않고 약 18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준비해 미국의 모 도시에 쌓아 놓았다. “의약품을 실어 보낼 항구와 수신인 주소를 알려 달라”고 연락이 오가는 와중에 황장엽 망명사건이 터졌다. 애써서 물건을 구해놓은 선교사에게는 참으로 면목 없이 일이 진행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4년 여 이연길 회장, 이삭 목사와 만나면서 존경의 마음으로 그 분의 의견들을 경청했고, 최선을 다해 이 회장을 도왔다. 이 회장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회장을 도왔다. 이러한 정신적 지원과 교감이 이 회장의 마음을 열게하는 단서가 됐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밝힐 것이있다. 당시 필자가 입수한황장엽문건중 공개하지 않은 자료가 있었다. 김정일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직후 ‘인민군 최고지휘성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취임사인데, 절대비밀이란 표시가 되어 있다. 이 문건은 인민군은 앞으로 속도전, 화학전, 기계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그 후 인민군이 그런 방향으로 나간 것으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문건이었다.

이 문건 외 몇 건의 문건은 공개하지 않고 우리 정보사를 비롯한 국가기관에 넘겨주었다. 국익 차원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자신이 최고 통치자로 있는 동안 취임사 문건에서 밝혔듯이 속도전, 화학전, 기계전을 강화하여 속칭 ‘판가리 전략’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기습 남침을 통해 일주일 만에 남한 전역을 장악함으로써 미군 지원군이 손을 쓰기도 전에 적화통일을 끝낸다는 그런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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