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발 금융위기 가능성 높아져
중국 발 금융위기 가능성 높아져
  • 미래한국
  • 승인 2015.10.0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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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휘청거리는 중국 경제

전경웅  미래한국 객원기자

중국의 재정적자와 부정회계, 교류국에 대한 산업스파이 행위, 유래를 찾기 힘든 빈부격차 한꺼번에 폭발 가능성

1980년대 중반, 일본은 기고만장했다. 일본 정부는 6·25 전쟁 이후 ‘안보’를 미국에 맡긴 뒤 국가의 가용자원을 경제 성장에 투입했다. 1970년대에는 정부와 기업이 힘을 합쳐 ‘경제 동물(economic animal)’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해외시장 진출에 열을 올렸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와 정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과의 냉전이 막바지여서 군비 부담도 컸다. 일본은 미국과 고통을 분담하려 하지 않고, 미국의 부동산과 기업을 사들이는 데 엄청난 돈을 들이부었다. 

1989년에는 우익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愼太郞)와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가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내고, “이제는 미국을 향해 당당하게 노(No)라고 말해야 한다”며 “21세기는 일본의 시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반격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1997년 11월, 일본 산요증권이 법정관리를 통해 도산했고, 이어 100년 이상 영업해 온 홋카이도 척식은행이 도산했다. 당시 일본의 4대 증권사였던 야마이치 증권도 자진 폐업을 결정했다. 일본의 ‘버블(거품)’이 꺼진 것이다. 끝없이 치솟던 부동산 가격도 걷잡을 수 없이 폭락했다. 이후 일본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이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처럼, 중국 또한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책을 펴냈다. 하지만 일본의 몰락을 지켜본 사람들은 중국의 ‘몰락’은 일본과는 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일본 거품 붕괴의 시작, ‘플라자 합의’ 

금융계에서는 일본 버블경제 붕괴의 시작을 1990년대 후반이 아니라 1985년 9월 22일부터로 본다. 바로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여 ‘플라자 합의’를 이룬 날이다. 

1980년대 초반 레이건 정부는 냉전 시절 군비경쟁과 동맹국 지원으로 쌓인 ‘쌍둥이 적자’로 골머리를 앓았다. 레이건 정부는 두 자릿수를 유지하던 금리를 크게 낮추는 한편, 그동안 지나치게 평가절상 됐던 달러의 가치를 낮추기로 마음먹었다(1980년부터 1985년 사이 달러 가치는 엔, 마르크, 프랑, 파운드에 비해 50% 평가절상 됐다).

그 이전까지 두 자릿수 금리에다 달러 가치를 너무 높인 탓에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은 미국을 수출시장으로 삼아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와 호황을 누려왔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특히 높은 금리는 일본, 독일이 미국에 금융자산을 보유하면서 ‘불로소득’을 올리는 데 한 몫 했다. 

레이건 정부는 미국 제조업체와 근로자, 자영업자들의 요구를 등에 업고 1985년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과 ‘무역규제’를 협상카드로 내세워 환율 정책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은 지루한 논의 끝에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의 통화 가치를 달러 가치와 비교해 대폭 높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일본 엔은 가장 큰 폭의 평가절상에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 이전까지 1달러 당 235엔이었는데, 미국과 일본은 이를 1달러 당 100엔 대를 기준으로 맞추기로 합의했다. 

이때부터 1년 뒤에는 1달러 당 120엔까지 환율이 떨어졌지만, 미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하했고, 이를 통한 경기 활성화로 미국 기업들이 다시 살아나면서 엔화 가치는 더 떨어졌다. 일본 정부는 엔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을 역이용, 금융시장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또 국내 경기 활성화를 명목으로 기준금리를 5%에서 계속 낮추는 한편 기업들 간의 채권조달 금리도 낮추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의 구매력은 1980년대 초반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그동안 막대한 돈을 번 일본 제조업체는 물론 금융업체들은 높아진 엔화 가치를 무기로 세계 곳곳에서 기업, 부동산, 미술품 등을 사들였다. 일본 정부는 국내 경기 활성화를 이유로 온갖 토목건설 사업을 벌여 부동산 가격이 5년 사이에 4배나 뛰었다. ‘거품’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일본이 미국 내의 각종 자산을 매입하고 미국에 투자하는 것을 부추겼다. 이렇게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달러는 미국 경제의 내실을 다지고, 1990년대 후반 미국 경제를 이끌 IT 산업의 기초기술을 개발하는 데 투입됐다. 일본이 ‘거품 경제’에 취해 흥청망청할 때 미국은 달러 가치를 안정시킨 뒤 인수합병을 통해 금융 부실기업들의 정리를 유도하고, 새로운 기법을 적용한 금융상품들을 내놨다. 바로 파생상품이다. 

▲ 중국은 재정적자와 부정회계 등으로 취약한 경제 기반이 무너질 경우 일본 경제가 거품이 빠지던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은 주요 도시를 연결해 지역 전체를 도시로 만든다는 ‘징진지 프로젝트’.

외곽부터 먼저 때리다-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 

1989년 미에노 마스시가 신임 일본은행 총재로 취임한 뒤 재정 긴축정책을 펼치면서 주가가 하락하고 경기 불황 우려가 나왔지만, 일본은 고평가된 자산을 해외에 투자하여 대외 순자산을 늘려나갔다. 일본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돈을 빌려줘 동남아는 일본의 ‘텃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일본이 동남아 국가에게 빌려준 돈은 금리도 낮고 만기도 수십 년으로 길어 저개발국에는 매력적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경제 기반이 허약하고, 외환관리능력도 모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들 나라들에 상당한 양의 돈을 빌려줬다. 

전 세계를 돌며 하이에나처럼 먹이를 노리는 헤지 펀드들에게 일본은 좋은 사냥감이었다.  그들은 일본을 치기 위해 동남아 국가를 먼저 공격했다. 1997년 6월부터 시작된 태국 바트화에 대한 공격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금융위기로 번졌다. 일본에게서 싼 금리로 돈을 빌렸던 한국, 일본이 동남아 투자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던 홍콩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최종적인 피해는 일본에 닥쳤다. 앞서 언급한 1997년 11월 일본 산요증권, 홋카이도 척식은행, 야마이치 증권 등의 도산 또는 폐업은 그동안 고평가돼 있던 엔화 가치를 바탕으로 발행했던 해외 채권들이 휴지조각이 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금융계가 무너지자 일본의 부동산이 추락하기 시작했고, 제조업체들도 10년 넘게 불황으로 고통 받았다. 이후 일본은 ‘잃어버린 시대’를 이어오고 있다. 

중국 공산당 “우리는 일본이 아니다” 

덩사오핑(鄧小平)이 이끌던 중국은 동남아 국가와 홍콩, 한국에 이어 일본 경제가 무너지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각종 금융기법에 대해서도 많은 학습을 했다. 특히 서방 헤지 펀드와 일본 간의 전쟁터였던 홍콩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좋은 ‘학교’가 됐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 중국 공산당은 집단 지도체제로 나라를 이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홍콩 재벌 리카싱(李嘉誠)이다. 허치슨 왐포아 그룹을 이끄는 리카싱은 장쩌민(江澤民)과 긴밀한 관계가 된다. 리카싱은 중국 공산당이 세계 경제에 참여한 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준다. 또 전 세계 4000만 명에 달하는 화상(華商)들이 중국 본토에 투자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1990년대 후반, 클린턴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추진하던 중국 공산당은 1999년 그들의 이론가를 동원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라는 책을 펴낸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엄청난 노동력을 강제로 당과 군이 소유한 기업에 투입, 노동집약적 산업의 발전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고, 축적한 자산을 서방 국가의 기술집약적 제품을 베껴 만들어내는 데 투입한다. 

또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면서 위안화의 평가절하를 계속 유도했다. 그 과정은 모두 공산당이 관리 감독했다. 겉으로는 ‘자유시장경제’처럼 보이는 시장 또한 마찬가지다. 중국 공산당은 WTO 가입 5년 만에 외환보유고를 2조 달러 이상 축적한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다. 중국 공산당의 독재체제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온갖 문제도 철저히 은폐한다. 분식회계와 각종 부정,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국민들의 희생, 공산당 간부들의 부정부패, 중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투자 뒤에 숨은 검은 거래 등이 모두 은폐됐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의 사례를 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금융계의 공격을 우려한다. 여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2006년 내놓은 책이 쑹홍빈(宋鴻兵)의 <화폐전쟁>이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홍콩, 일본 등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중국은 1989년 일본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우리는 아시아가 아니라 서방”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힌 일본 엘리트와는 달리, 중국 공산당은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쌓은 후 홍콩, 대만, 일본, 한국 등에 ‘친중파(親中派) 인맥’들을 심어놓고, 이들을 통해 중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왔다. 

중국의 선제공격 

그러나 서방 국가들은 ‘화폐전쟁’ 때문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독재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보고 중국 억제정책을 준비한다. 그 시작은 중국 공산당이 이끌어온 경제개발정책이 얼마나 엉망인가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2006년 말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됐던 부동액 치약, 멜라민 분유, 발암물질 장난감 사건 폭로도 이런 맥락에서 터진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서방 국가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연 평균 500억 달러 이상 들이붓던 대(對)중국 투자를 급격히 줄였다. 서방 다국적 기업들은 공장을 중국 본토에서 반(反)중국 성향이 강한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로 옮겼다. 일본은 자국 기업들의 철수 및 귀환을 독려하고 지원금까지 지급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끄떡도 하지 않고 오히려 서방 금융권을 선제공격했다. 2007년 4월 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을 바탕으로 한 파생상품 400억 달러 어치를 영국 런던시장에서 대량 투매한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파생상품 가격이 폭락하자 그 영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일본 도쿄를 거쳐 미국 월스트리트까지 퍼진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난 것이다. 

서방 국가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듯했지만 몇 년 뒤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이 결정적 타격을 입었음이 드러났다. 중국은 2020년까지 연 평균 8% 이상 경제성장률을 기준으로 삼아 국가발전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파열음이 나타났다. 그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왔던 중국 공산당의 재정적자와 부정회계, 교류국에 대한 산업스파이 행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빈부격차, 장기밀매, 인신매매 등 각종 반(反)인류 범죄에 공산당 고위 간부가 개입됐다는 사실 등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2011년 말 후진타오(胡錦濤)가 물러나고 시진핑(習近平)이 집권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더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 언론들은 시진핑이 “태자당의 배경을 업고 있다”고 전하는데, 시진핑의 권력 배경은 ‘공산주의 청년단’이다. 시진핑은 ‘혁명원훈’의 아들이라는 배경과는 달리 다른 ‘태자당’ 세력들의 견제로 어릴 적 시골에서 고생을 했고, 그를 지지하고 밀어준 것은 공산주의 청년단 수뇌부였다. 

이런 배경을 가진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자녀와 리카싱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장쩌민·후진타오 인맥과는 상극이다. 특히 2011년 장쩌민-후진타오 인맥인 보시라이(薄熙來), 저우융캉(周永康), 쩡칭훙(曾慶紅) 등이 자신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준비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시진핑이 집권 이후 ‘여우 사냥’(부정축재를 한 뒤 해외로 도피한 공산당 간부 체포), ‘호랑이 사냥’(부정축재를 저지른 공산당 거물 숙청)’을 하는 이유는 중국 공산당을 이끌며 경제개발을 했던 장쩌민-후진타오 인맥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 점은 그냥 흘려볼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높아지면서 사회 전반이 흥청거렸고, 1990년대 일본 정부는 재정 긴축정책으로 인한 경기 불황을 우려해 부동산 경기 과열을 방조했다. 

취약한 중국, 여러 갈래로 분열될 수도 

중국의 경우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서방 국가들의 위안화 절상 압력을 계속 받다가 시진핑 집권 후 고정환율제의 변동 폭을 대폭 확대했다. 시진핑은 또 중국 사회에서 흥청거리는 주역인 공산당 간부들을 옥죄면서도 경기 불황을 우려해 엄청난 돈을 시중에 풀어 증시를 떠받치는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시진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국 돈으로 7600조 원 이상을 투입해 허베이성(河北省)-텐진(天津)-베이징(北京)을 잇는 지역 전체를 도시로 만드는 ‘징진지(京津冀) 프로젝트’와 이를 바탕으로 서쪽 지역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개발한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전략’을 내놓은 상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중국 공산당이 붕괴할 경우 과거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다른 서방 국가들이 대중(對中) 투자를 줄이고 현지에서 철수하는 전략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삼성, LG, SK, 현대·기아차, 롯데그룹 등 주요 대기업이 대중 투자를 더 늘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피해는 1997년 외환위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각할 수 있다. 

물론 “과거 일본에 대한 서방 금융계의 공격은 변동환율제와 고평가된 자산가치, 나약한 일본 정권과 같은 약점이 통했기 때문이고, 중국 공산당 정권은 고정환율제에다 엄청난 내수시장, 독재체제 때문에 일본처럼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현재 중국 공산당은 전체 경제규모 대비 내수시장, 국민들이 보유한 자산가치, 원천기술 보유 수준 등에서 1990년대 일본에 한참 못 미치는 나라를 이끌고 있다. 게다가 지니계수가 0.7을 넘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자산이 공산당 간부들에 쏠려 있다는 점도 문제다. 즉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 공산당은 본토를 통일한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아 분열될 가능성도 있다. 

서방 금융계가 1997년 태국의 외환보유고부터 공격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 공산당에 대한 공격도 본토가 아니라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열린 시장’을 가진 나라를 먼저 공격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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