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태양’ 日本 천신만고 끝에 기적의 승리①
‘떠오르는 태양’ 日本 천신만고 끝에 기적의 승리①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10.1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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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러일전쟁 주요 전투

근대화 진행하던 일본에게 ‘근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려준, 피로 얼룩진 전쟁

개전 : 일본 해군의 여순(旅順)항 기습

1904년 2월 9일 러시아의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 제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전쟁 발발 소식을 타전했다.

‘황제 폐하께 엎드려 보고 드림. 2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자정 일본 어뢰정들이 여순(旅順·뤼순)항 기지 외항에 정박 중이던 아군 전대(戰隊)에 기습 공격을 가해 옴. 전함 레트비잔호와 체사레비치호, 순양함 팔라다호가 피격되었으며, 피해 정도를 조사 중임.’ 

1904년 2월 6일 일본 연합함대는 사세보(佐世保)에서 도고 하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관으로부터 “여순과 제물포에 정박 중인 적의 군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바로 전함 6척(미카사·아사히·후지·하쓰세·시키시마·야시마), 순양함 14척, 그리고 35척 이상의 어뢰정이 출항했다. 

그 무렵 여순항에는 러시아 태평양함대 소속의 전함 7척(체사레비치·레트비잔·페레스베트·폴타바·페트로파블로프스크·세바스토플·포베다), 장갑순양함 1척(바얀), 방호순양함 8척, 포함 6척, 구축함 18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9일 새벽 일본의 연합함대가 여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사진은 제물포 해전을 그린 삽화.

2월 8일 22시 경 여순항으로 돌입한 연합함대 소속 어뢰정들은 2월 9일 00시 20분 경,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순항 외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극동함대 소속 함정들을 향해 1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이 기습 공격으로 전함 레트비잔호, 장갑함 체사레비치호, 순양함 팔라다호가 피격 당했다.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의 내무상 플레베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민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 기분을 일소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작은 규모의 전쟁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이겨서 제정(帝政)의 위신을 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2월 9일 날이 밝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야간 기습을 허용한 책임을 물어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스타크 제독이 파면되고 신임 사령관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유능한 전략가이자 해양학 전문가이며, 톨스토이가 ‘뛰어난 도살 기계’라고 칭한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했다. 

전략가 마카로프 제독 너무 일찍 戰死 

마카로프 제독은 러시아 해군의 보물이었다. 그는 러시아 해군에서는 예외적으로 귀족 출신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다. 그의 <전략론>은 세계의 명저로 꼽혀 일본 해군 장교들도 꼭 읽어야 할 책으로 평가되었다. 

2월 9일 새벽 연합함대 함정들은 제물포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호, 포함 코레츠호를 공격했다. 포격전에서 심한 손상을 입은 바랴그호는 병사들을 연안에 상륙시킨 후 루드녜프 함장이 배수판을 열고 자침시켰다.

바랴그호는 전후에 인양되어 소우야(宗谷)라는 이름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에 반환되었다. 코레츠호는 포화를 얻어맞은 후 일본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군에 의해 폭파됐다. 

여순항이 일본 해군에 의해 봉쇄되면서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제물포에 병력을 상륙시켜 압록강 지역으로 북상했다. 러일전쟁에 임하는 일본의 계획은 해군 1·2함대가 여순항에 주둔 중인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봉쇄하고, 3함대는 쓰시마 해협을 통제하여 제해권을 확보한다.

그 사이 육군 제1군을 조선에 상륙시켜 조선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제2군은 요동(遼東)반도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여순을 고립시킨다. 그 후 제3·4군을 더한 병력이 만주평야에서 러시아군 주력을 섬멸한 후 연해주로 진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불행은 유능한 해군 지휘관 마카로프 제독을 너무 일찍 잃은 것이었다. 4월 13일 마카로프 제독은 기함 페트로파블로프크스호에 승선하여 여순항을 출항, 도고 제독을 추적 항해하던 중 일본이 설치한 기뢰에 부딪쳐 함정과 함께 폭사했다. 

강력한 폭발로 인해 마카로프 제독은 서 있는 상태에서 머리가 날아갔고, 1만960톤의 전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호는 27명의 장교, 620명의 승조원과 함께 불과 1분 30초 만에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해군 지휘부는 큰 구멍이 생겼다. 마카로프에 필적할 만한 제독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이에 대항하여 기뢰를 깔았는데, 1904년 5월 15일 오전 11시, 일본 전함 하쓰세(初賴)호가 기뢰에 충돌했다.

하쓰세는 1만5240톤에 18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는,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전함이었다. 이 배는 화약고가 폭발, 파편을 사방으로 날리며 1분 10초 만에 493명의 승조원과 함께 가라앉았다. 

이를 구하러 가던 전함 야시마(八島)호도 기뢰에 접촉, 폭발과 함께 가라앉았다. 큰 충격을 받은 일본은 야시마의 침몰만을 발표한 후, 하쓰세의 침몰은 1905년 5월까지 숨겼다. 

일본 함대의 주력 전함 두 척(연합함대 결전 병력의 33%)을 하루아침에 잃었다는 보고를 받은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제독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고자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는 탁상의 과자 접시를 밀어주면서 먹으라고 권했다.

이 장면에 대해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는 “도고는 가슴 속의 비탄을 억누름으로써 전체 함대에 패배 심리가 퍼지는 것을 훌륭하게 막아냈다”고 썼다(시바 료타로, <언덕 위의 구름>). 

▲ 여순 공방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일본군의 28cm 곡사포. 항만 전체를 시멘트 20만 포대 이상의 콘크리트로 구축한 러시아군 여순 요새는 지하에 거대한 포대, 지상에는 지뢰밭과 무수한 기관총이 설치된 철옹성이었다.

황해해전과 여순 공방전 

마카로프 제독의 전사 후 후임 사령관을 대행한 비트게프트 소장은 방어가 견고한 여순항에서 함대를 보존하며 불필요한 충돌을 피했다.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가 여순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하라는 명령에 따라 여순 함대는 6월 23일에 출항했으나 곧 일본 함대와 조우하자 다시 항내로 숨어들었다. 

일본 함대는 러시아 극동함대가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여순항을 봉쇄했다. 일본의 고민은 여순의 함대와 러시아 본국의 발트 함대가 극동에 도착하여 합류할 경우 일본보다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보유하게 되어 대재앙일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함대를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육군이 여순 요새를 공략해야 했다. 이런 목적에서 당초 예정에도 없던 여순 요새 공격을 위해 3군을 창설하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요동반도로 보냈다. 제3군은 6월 8일에 대련(大連·다롄)에 도착, 6월 26일 여순 외곽에 진출했다. 

여순의 군사적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리훙장)이었다. 그는 1881년 10월 여순의 백옥산(白玉山)에 올라 지세를 관망한 후 이곳이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이 와도 이를 열 수 없는’ 천혜의 요새임을 파악하고 해군기지 건설에 착수, 1890년 완성했다. 항구 주위에 10개의 포대를 설치하고 함정을 수리하는 공창도 지었다. 

청일전쟁 후 러시아가 이곳을 조차한 다음 2개 사단 3만 명의 병력을 여순과 대련에 배치했다. 러시아군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시멘트를 20만 포대 이상 사용해 여순항 일대를 요새화했다.

항만 주변 전체를 콘크리트로 굳히고 지하에 거대한 전투용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 포대, 병영을 설치했으며, 포루들을 지하로 연결했다. 지상에는 지뢰밭과 철조망을 설치했고, 그 공백 부분에 무수한 기관총좌를 설치했다. 

피에 젖은 여순 공방전 

일본의 작가 시바 료타로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여순 공방전은 가난하고 상식이 결여된 일본 육군이 총검돌격 사상으로 공격하고, 일본보다 열 배 부강한 러시아는 그것을 기계력으로 막으려 한 전투였다고 평한다. 

근대적인 요새의 존재에 무지했던 일본 육군은 기껏해야 여순 요새 점령에 하루, 늦어도 열흘쯤이면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여순 요새를 함락하기까지 191일이란 세월과 6만 명의 사상자라는, 세계 전사(戰史)상 미증유의 유혈 기록을 만들었다. 

일본이 본격적인 여순 공방전을 시작하기 직전인 8월 10일,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회항을 위해 여순항을 출항했다. 그러나 곧 일본 함대에 포착됐다. 

러시아 함정들은 교전을 피하면서 남하했으나 곧 일본 함대에 따라잡혀 포격전이 전개됐다. 18시 40분, 기함 체사레비치호의 함교가 피격 당하면서 사령관 비트게프트 제독 이하 참모들을 산산조각으로 날려 벼렸고, 지휘계통이 사라지면서 함대는 전투 대형이 무너졌다. 

일본의 포격에서 생존한 전함 5척, 순양함 1척, 구축함 4척은 파벨 우스톰스키 소장의 지휘로 다시 여순항으로 귀환했고, 체사레비치와 구축함 3척은 독일령 조차지인 교주(膠州·자우저우)만으로, 방호순양함 아스콜리드와 구축함 1척은 상해(上海·상하이)로 피신했다.

교주만의 독일 총독은 국제법을 내세워 러시아 함정의 함포와 무장을 해제한 다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했다. 이후 여순 함대는 작전에 나서지 못하고 여순항 내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일본의 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는 육탄 돌격을 신봉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로서 대요새의 입구부터 공략해 들어간다는 지나치게 정직한 전법을 취했다. 만주의 요충지인 요양(遼陽·랴오양)에서 러시아군과 대회전이 개시되기 전인 8월 19일, 여순 요새를 향한 총공격이 시작됐다. 

첫날 노기 군은 완전 요새화 되어 있는 반룡산과 동계관산의 중앙을 돌파하여 전 요새를 둘로 분단한다는, 거의 탁상공론에 가까운 작전을 실시했다. 

포병은 하루 종일 러시아 진지를 향해 포탄을 날려대는 바람에 탄약고가 바닥 났다. 단 하루 전투에서 청일전쟁에서 소비한 전체 포탄 량이 넘는 포를 발사한 것이다. 

일본 육군은 용기와 육탄으로 대항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소총과 총검으로 돌격한 일본군은 분당 500연발의 러시아 맥심 기관총이 전후좌우에서 맹사격을 하는 바람에 벌레처럼 살해당했다. 불과 6일 동안의 맹공격으로 사상자 1만5800명이 발생했지만, 적의 소규모 토치카 하나 깨지 못했다. 

두 번째 공격도 무모하게 돌격을 일삼는 바람에 사상자 4900명이 발생했지만 요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 두 차례 공격에서 1개 사단 대병력이 눈 녹듯 사라졌다.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는 두 아들도 함께 러일전쟁에 참전했는데, 장남은 금주(錦州) 전투에서 러시아 기관총에 잃었고, 차남은 자신이 지휘하는 여순 공방전에서 잃었다. 

▲ 여순전투의 일본군과 러시아군 배치도(출처: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석화정, 지식산업사)

“여순 때문에 나라가 망할 판” 

여순은 근대화를 진행하던 일본에게 처음으로 ‘근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려준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것을 일본인들은 여순에서 6만여 젊은이들의 목숨을 바친 끝에 알게 되었다. 

여순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의 존망이 걸린 지역이 되었다. 일본군 내에서는 “여순 때문에 나라가 망할 판”이라는 비관적 관측이 나돌았다. 
보병의 착검 돌격 공격으로는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대본영은 요새 전방 가까이까지 참호를 파고 전진했고, 도쿄만과 아키 요새에 배치되었던 28cm 유탄포를 실어 날라 여순 공격에 투입했다. 

거대한 유탄포는 9월 30일 시가지와 항만을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10월 26일, 28cm 유탄포를 앞세워 총공격이 개시됐다. 4일 간에 걸친 유탄포 공격은 큰 성과를 발휘했으나 일본군은 전사 1092명, 부상 2782명의 피해를 내고 ‘P보루’라 명명된 작은 보루 하나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된 203고지 공방전에서 일본군은 8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숱한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나지 않자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장군은 러시아 진지를 돌파하는 땅굴을 파도록 명하고 일본 국내에 남아 있던 최후의 현역병 정예사단인 제7사단을 여순에 투입했다. 

그래도 성과가 나지 않자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대장이 여순으로 달려가 작전을 지휘했다. 7사단은 여순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1만5000명이었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1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12월 4일 오전부터 203고지 공격을 개시한 일본군은 12월 5일 22시에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203고지를 완전 점령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일본군은 전사 5052명, 부상 1만1884명이었고 러시아군도 인명 피해가 컸다. 러시아군이 결사 저항하자 일본 공병이 땅굴을 뚫고 들어가 콘크리트로 구축된 러시아군 방어벽에 폭약을 설치하고 이를 폭파시켰다. 

그야말로 양군의 결사 항전이었다. 일본의 야간공격대를 지휘한 나카무라 마사오(中村正雄) 장군은 출전에 앞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 중 그 누구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적에 대한 공격은 백병전이 될 것이다. 모든 장교들은 이유 없이 멈춰서는 자, 자신의 위치를 방치한 자, 뒤로 물러서는 자를 지체 없이 사살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러시아군은 방어전의 달인(達人)이었다. 스테셀 사령관은 전선 보루에 있던 한 중령이 일본군의 맹공을 견디다 못해 부대를 후퇴시키려고 전령을 보냈다. 스테셀은 중령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귀관은 그 보루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을 수는 있을 것 아닌가.” 

스테셀의 이 메시지에 중령은 순종했고, 그의 부대는 전원 전사(戰死)했다. 포위된 요새에서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방어전에 임한 러시아군은 티푸스, 괴혈병, 야맹증 환자가 속출했다. 라셰프스키 중령은 자신의 일기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로 포위된 지 11개월이다. 우리는 기적적으로 현재까지 요새를 고수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군수품이 고갈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의 저항도 분쇄될 것이다.’ 

비 오듯 쏟아지는 기관총탄 앞으로 병사들 돌격시킨 일본군 

외국인 종군기자는 “여순 포위전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 군사력의 비극”이라고 언급했다. 일본군 장교는 병력 손실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병사를 기관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곳으로 돌격시켜 인명 피해가 속출했다.

노기 장군도 “그렇게 많은 인명과 시간을 완벽하지 못한 계획에 낭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현재 본인이 느끼고 있는 유일한 감정은 수치심과 괴로움뿐”이라고 한탄했다. 

숱한 병사들의 피의 대가로 점령한 203고지에서 일본군은 항구 안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군함을 향해 포탄을 날려 함정 사냥에 나섰다. 항내에 숨어 있던 4척의 전함, 2척의 순양함, 기타 10여 척의 작은 함정들이 파괴되면서 여순 함대는 궤멸되었다. 

1905년 1월 1일 일본군의 끈질긴 공격이 이어지자 러시아군은 더 이상 방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스테셀 사령관은 요새 양도에 관한 교섭을 위해 사절을 노기 장군에게 보냈다. 노기는 1월 2일 이른 아침, 항복 교섭에 동의하는 서신을 스테셀 장군에게 보냈고, 그날 19시, 러일 양측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일본 병사들은 러시아 병사의 보루에까지 올라가 술을 나눠 마셨다. 심지어 취한 김에 러일 양 군 병사가 어깨동무를 하고 여순 시가지까지 진출하여 시내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러시아 수비대원 전체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보루와 탄약, 군수물자는 일본군에게 양도되었다. 러시아 요새 수비대는 비록 항복했지만 장기간 동안 20만에 달하는 일본의 주력부대와 주력함대를 한 곳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敗將에게 무사의 명예 지키도록 착검 허용

무려 6개월간에 걸친 격전에 투입된 일본군 병력 중 사상자가 6만212명에 달했다. 반면 러시아군은 4만5000명이 투입되어 사상자는 1만8000여 명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스테셀 장군의 지휘 하에 끝까지 장엄하게 싸운 러시아 병사들의 용맹을 칭송하며 노기 마레스케에게 “사령관 스테셀이 조국을 위해 바친 공로를 헤아려 무사(武士)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라노라”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 때문에 스테셀과 그 수행원들의 착검이 허용됐다. 

여순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열도는 환희에 불타올랐다. 국제적 파장도 엄청났다. 일본의 승전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어 전쟁 경비 조달을 위한 일본 정부의 국채 모집이 수월해진 반면, 러시아는 국제적 위신의 추락은 물론 국내 통치에도 큰 혼란이 발생했다. 

레닌은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고 토로했다. 여순 함락 20일 후인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스테셀 사령관은 병사와 포탄, 자재와 식량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당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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