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태양’ 日本 천신만고 끝에 기적의 승리②
‘떠오르는 태양’ 日本 천신만고 끝에 기적의 승리②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10.11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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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러일전쟁 주요 전투

요양(遼陽)전투와 봉천(奉天) 대회전

요양(遼陽)은 남만주에서 봉천(오늘날의 선양) 다음가는 대도시다. 요양을 방어하는 쿠로파트킨 사령관의 병력은 23만 명, 일본군은 14만 명이었다. 러시아인들의 작전 사상은 언제나 방어하면서 후퇴하여 적에게 손해를 입히고, 적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안전한 진격 공세’를 취하는 방식이었다. 

일본군은 포탄이 부족했다. 일본 육군은 포 1문 당 50발이면 될 것이라고 계산하여 1개월 치만을 준비했다가 단 하루 만에 이 포탄을 다 소비하고는 러시아군의 포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게다가 보급 부족으로 전선에서는 병사들의 식사량을 절반으로 줄여야 했다. 대본영은 “보급 부족을 용감함으로 커버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요양 일대에서 8월 25일 밤부터 전투에 들어간 양군의 격돌은 무시무시했다. 안산역마을 방면에서 러시아는 1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일본군 총검과 군도에 의한 것이었다. 쿠로파트킨은 당시의 맹렬했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일본군은 매회의 백병전 후에 다수의 사망자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 일본 병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밭에 커다란 구덩이를 몇 개씩이나 팠지만, 파도파도 그것을 다 묻지 못할 정도로 다수의 적군 시체가 있었다.” 

쿠로파트킨은 8월 31일까지는 승리에의 자신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지만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 군의 태자강(太子河) 도하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쿠로파트킨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러시아군은 9월 4일 봉천으로 철수했고, 일본군이 요양을 점령하면서 전투는 막을 내렸다. 러시아군 철수 소식을 접한 구로키 장군은 “러시아는 패하지 않았는데 묘한 짓을 하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쿠로파트킨의 전략은 본국에서 원군이 충분히 올 때까지 견디면 된다는 것이었으므로 러시아군이 봉천으로 물러난 것은 일종의 전술적 차원의 후퇴였다. 러시아군은 전술 교과서적인, 완벽에 가까운 후퇴전을 수행했다. 

일본군은 병력 소모와 11일 간의 격전으로 인한 피로감으로 인해 더 이상 추격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일본군은 승자라고 하기에는 전리품이 놀랄 정도로 적었다. 요양 회전에서 양 군은 각각 2만 명 정도 사상사가 발생했다. 때문에 외신들은 “일본은 요양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땅을 얻었을 뿐”이라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 요양전투와 봉천대회전의 격전이 벌어진 남만주 일대 지도. 일본군 23만 명, 러시아군 36만 명이 격돌한 봉천 대회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7만 명의 사상자를 냄으로써 패하지는 않았지만, 승리했다고도 평가하기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 (출처: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석화정, 지식산업사)

국력이 바닥을 드러내다 

요양 전투가 끝났을 때 일본은 다음 작전을 위한 포탄이 바닥났다. 이것을 제조해야 할 도쿄와 오사카 포병 공창의 제조 능력은 둘 다 합쳐도 하루에 불과 300발에 불과했다. 이것은 1개 포병 중대가 신속하게 발사할 경우 7분 30초면 소모되는 수량이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소비가 행해지자 9월 15일 육군성은 전 세계의 무기 회사에 포탄을 긴급 주문했다. 보급이 빈약한 일본군은 전투를 반복할 때마다 허약해졌고, 여순에서는 지독한 소모전에 걸려 휘청거렸다. 요양 전투에서 일본은 국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양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퇴각한 쿠로파트킨 장군에 대해 러시아 궁정에서는 ‘퇴각 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러시아군의 희망은 단선인 시베리아 철도의 수송력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철도상 힐코프 공작은 피행선(避行線)을 증설하고 바이칼호 우회선을 설치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요양 회전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 단계보다 병력이 보강되었다. 

‘퇴각 장군’은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10월 9일 공세에 나서 사하(沙河·샤허)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압도적으로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을 효율적으로 방어하여 러시아군은 사상자와 포로를 합쳐 6만5000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냈다. 10월 18일 종료된 사하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승리하고도 2만49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노기 마레스케의 제3군이 여순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요양 회전, 사하, 흑구대(黑溝台)에서 전투를 치러 상처뿐인 승리를 거뒀다. 초기 전투에서 우수한 병력을 대규모로 잃은 일본은 병력을 충원 받았으나 병사들의 질이 계속 떨어졌다. 일본군은 일본군이되, 초기의 일본군이 아닌 상황에 처한 것이다. 

봉천(奉天)에는 쿠로파트킨이 버티고 있었다. 일본 정부와 대본영은 “더 이상 전쟁이 계속되면 일본은 파산”이라면서  의미심장한 승리를 요구했다. 따라서 러일 양군은 봉천에서 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봉천은 러시아에서는 묵덴, 청국에서는 성경(盛京)이라 부르는 오늘날의 심양(瀋陽·선양)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봉천에서 증원을 기다리는 러시아군에 대해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둬 유리한 조건의 강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대담한 총력전을 준비했다. 

당시 병력은 러시아 36만 명인데 비해 일본은 24만 명이었다. 포의 숫자는 러시아 측 1200문, 일본 990문. 이처럼 어마어마한 대병력과 화력이 100㎞에 이르는 전선을 형성하고 세계 전사(戰史)상 최대의 대회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병력과 화력이 열세인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제1군(구로키 군)이 적의 왼쪽 날개를 친다. 적이 당황해서 왼쪽으로 병력을 집중하면 이때 제3군(노기 마레스케 군)이 오른쪽 날개를 친다. 적이 중앙의 병력을 오른쪽으로 빼내면 혼란을 틈타 중앙을 돌파한다는, 거의 곡예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오야마 이와오는 24만 일본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시를 했다. 

“이 회전에서 우리는 제국 육군의 전력을 다하고 적은 만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을 동원해서 승패를 가름하려고 한다. 이 회전에서 승리를 얻는 자는 이 전쟁의 주인이 될 것이므로, 실로 러일 전쟁의 세키가하라라고 해도 될 것이다.”

▲ 여순전투의 주역인 일본 제3군 지휘관들. 왼쪽 첫 번째 인물이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대장.

패하지 않았지만, 승리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전투

1903년 2월 23일, 일본 제1군 소속 압록강군이 러시아군 왼쪽 날개인 청하성(淸河城) 진지를 공격함으로써 사상 최대의 봉천 대회전이 시작됐다. 러시아군이 청하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자 쿠로파트킨은 일본군이 예상했던 대로 전체 병력의 5분의 1을 왼쪽 날개로 이동시켰다. 

2월 27일, 이번에는 노기의 제3군이 러시아의 오른쪽 날개를 쳤다. 그러자 쿠로파트킨은 서둘러 왼쪽 날개로 이동시켰던 병력을 오른쪽으로 보냈다. 제3군 휘하의 9사단 전체 병력은 잘 조준된 러시아군의 총포화를 맞으면서 마치 연병장을 행진하는 것처럼 정연하게 전진했다. 이 부대는 12일 동안 밤에는 걷고 낮에는 전투를 계속하며 전체 병력의 50%를 잃었다. 

일본군은 작전계획대로 러시아군이 우왕좌왕할 때 중앙을 강타했다. 요새화된 러시아의 중앙부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군은 여순 공방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28cm 유탄포를 끌어왔다.  3월 2일 하루 동안 일본군은 야포 5000발, 산포 3800발 등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봉천 대회전 기간 내내 일본군은 탄약을 2000만 발, 러시아는 그 4배인 8000만 발, 포탄은 일본군이 35만 발, 러시아는 54만 발을 소비했다. 쿠로파트킨의 무모한 병력 이동 명령에 의해 전멸 위기에 처했던 일본군 공격부대가 구원을 받은 사례가 많았다. 덕분에 일본군은 소부대가 대부대를 포위하는 기적적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일본군은 3월 4일 승기를 잡았고, 3월 7일 쿠로파트킨 장군은 페테르부르크에 “우리는 포위당했다”는 전보를 날렸다. 3월 9일 쿠로파트킨은 제3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당할 것을 우려하여 철령과 하얼빈 방면으로 후퇴를 명령했다. 

이것은 일본군 총사령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봉천의 러시아군은 아직 여력이 충분하여 퇴각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3월 10일, 무인지경이 된 봉천을 점령했다. 바로 이날을 일본은 육군 기념일로 지정한다. 

봉천 대회전에서 일본군 측은 총 7만 명의 사상사가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그보다 훨씬 심한 16만~17만 명이 사상 당했지만, 주력이 하얼빈으로 빠져나갔다. 

일본은 패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승리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전투였다. 쿠로파트킨의 전략은 러시아가 역사에서 보여준 대로 “후퇴하며 적의 전력 소모를 강요하면서 최종 단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었다. 

시바 료타로는 봉천 대회전은 러시아군이 패할 만한 전투는 아니었다고 분석한다. 병력과 화력, 병사들의 질 등 모든 면에서 러시아가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의 패인은 쿠로파트킨의 개성과 능력”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페테르부르크 궁전은 쿠로파트킨을 해임하여 제1군 사령관으로 격하시키고, 제1군 사령관 리네비치 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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