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중재를 아십니까?
국제 중재를 아십니까?
  • 미래한국
  • 승인 2015.10.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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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의 글로벌 워치

박은영 런던 국제중재법원 부원장 · 미래한국 편집위원

 

법과 제도를 달리하는 국제 상거래 당사자들이 중립적인 재판관(중재인)을 선임, 국제중재판정을 받으면 판결과 동일한 효력 발생

 

건국 50주년을 맞는 싱가포르는 올해 초 향후 50년을 내다보는 혁신적인 국가비전사업을 시행했다. 건국 최초로 국제재판소인 싱가포르 국제상사재판소(Singapore International Commercial Court)를 설립한 것이다.

대부분 국제재판소들은 유엔이나 국제조약에 의해 제네바, 헤이그 등 유럽 국가들에 설립되었는데 싱가포르가 국제재판소를 설립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 싱가포르는 올해 초 싱가포르 국제상사재판소를 설립하며 아시아 최초로 세계법률수도가 될 것을 선언했다. 사진은 싱가포르 국제중재재판소 국제판사들.

지난 200여 년 간 역사는 서구의 시대였다. 식민지를 개척하고 상공업을 일으켜 세계 시장을 장악하면 그 경제 거래에 대한 분쟁은 서구의 법이라는 기준을 적용하여 해결했다. 그래서 지난 수십 년간 런던과 뉴욕은 실질적으로 세계 법률수도(Global Legal Capital) 역할을 했다.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식민지를 해방시켰지만 서구 제국들은 법제를 통해 후진국과 개도국의 국제경제활동 기준을 정해주고, 분쟁이 생기면 자신들의 법 기준을 적용하여 해결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세계경제를 주도해왔다. 

21세기에 들어 아시아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중국 등 동북아, 인도 및 아세안이 중심이 되어 역내(域內)에 활발한 경제 거래가 진행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이런 환경을 예의주시하다가 향후 50년의 국가 어젠다로 아시아 최초의 세계법률수도가 될 것을 선언했다.

싱가포르를 아시아 최고의 분쟁해결 중심지(Dispute Resolution Hub)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국제거래 분쟁을 싱가포르 상사재판소에서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싱가포르는 영국의 법제와 언어, 문화를 기반으로 동양 문화를 조화했고, 법치와 안정된 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신뢰와 공정이라는 무형적 가치를 사법 서비스에 내재시킨 고급지식상품(high quality knowledge product)을 시장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선견지명

외국 투자자들이 아시아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싶어도 신뢰와 공정성을 찾기 어렵고, 아시아 국가들은 1차산업이나 제조업은 발전했으나 지식경제(knowledge economy)는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싱가포르는 이런 환경을 비교우위의 조건으로 내놓은 것이다. 

소수의 리더들이 오랜 논의 끝에 이런 비전을 제시하자 실행은 신속하고도 과감했다. 최고의 국제 판사들을 싱가포르 법관으로 임명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고, 전 세계에서 전방위적으로 엘리트 판사를 물색하여 영국, 미국, 호주, 홍콩, 프랑스, 오스트리아, 일본 등에서 12명의 판사를 영입했다. 이들이 싱가포르 대법관들과 함께 국제사건을 재판하게 된다. 

12명의 세계 최고 지성의 판사들이 싱가포르 판사들과 함께 국제재판을 하는 것은 싱가포르가 지식경제, 특히 법률산업 중심지가 되는 상징적 신호탄이다. 전 세계의 고위 국제변호사들이 싱가포르 국제재판소에서 변론을 하기 위해 모여들고, 영어는 하지만 여전히 로컬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싱가포르 현지 변호사들이 국제사건을 다룰 수 있는 변호사로 성장하여 싱가포르의 국제 역량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국가비전산업의 기조다. 

싱가포르는 최근 15년간 국제 법률산업이 국가경제 및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경험을 했다. 이것을 국가지도자들이 국가비전사업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중재란 무엇이고, 현대 세계화 과정에서 국제중재 중심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승전국들은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유엔을 설립하여 정치질서를 만들었다면 세계경제질서는 3가지 측면을 통합적으로 규율했다. 금융질서는 IBRD와 IMF로 구성했고, 무역질서는 GATT로 출발하여 지금은 WTO가 규율한다. 

상거래 분쟁 해결은 중앙집권적인 기관이 아니라 국제중재라는 방법을 통해 상거래 당사자들의 자율(autonomy)에 의해 해결하되 근본적인 사법적 질서만 형성했다. 법과 제도를 달리하는 국제 상거래 당사자들이 중립적인 재판관(중재인)을 선임하여 국제중재판정을 받으면 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있도록 승인하고 집행해주는 유엔조약(1958년 뉴욕 협약)이 그것이다.

이라크, 북한, 파푸아뉴기니 등 비정상 국가 이외에는 전 세계 대부분의 문명국들이 가입되어 있어 상거래 당사자는 국제중재판정이 있으면 판결과 동일한 집행력을 확보할 수 있다. 

유엔은 나아가 모델중재법을 제정하여 국제중재에 관한 한 국제적 통일적 기준을 만들어 국제법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국제조약과 구분하기 위해 이런 법률을 연성국제법(soft international law)이라 한다. 

오늘날 국제거래를 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분쟁을 국제중재를 통해 해결하므로 국제거래를 하는 기업이 국제중재 시스템을 모를 경우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러면 왜 기업들은 국제거래에서 중재를 활용할까? 

예를 들어 한국 기업과 브라질 기업이 합작계약을 했다가 분쟁이 생길 경우 자국 법정에서 재판하면 거래 상대방은 불리한 법정이라고 거부할 것이다. 따라서 중립적 재판지가 필요하다. 뉴욕에서 재판을 하면 1~3심의 재판과 막대한 재판비용을 부담해야 하는데, 중재는 단심으로 종결되고 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있다.

또 재판은 민감한 기업정보와 비밀이 공개될 우려가 있으나 중재에서는 비밀이 보장된다. 이런 이유로 국제중재는 최근 급속히 활성화 되었고, 한국 기업들도 글로벌 경영을 위해 중재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가 되었다. 

최근까지 국제 중재는 유럽의 전유물이었다. 필자는 지난해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주최하는 국제중재세미나의 연사로 초청을 받아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기조연설을 한 르완다 대법원장은 분쟁 당사자가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합의하고 그에 승복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은 총칼로 100만 명이 희생된 내전을 겪은 르완다에게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기억한다.

오랜 내전과 국제전쟁을 겪은 유럽이 근대 들어 분쟁을 문명적으로 해결하는 중재제도를 발전시켜 세계 중재의 선두국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영국은 중재에 관한 종주국이다. 

국제 중재는 유럽의 전유물

런던국제중재법원(London Court of International Arbitration)은 130년 된 기관이다. 처음에는 ‘계약의 해석’이라는 영역으로 출발했지만, 중재가 사법절차의 민영화라는 점을 간파하여 중재법원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초기에는 법원이 중재인들의 자질을 평가하고 감독했다가 점차 자율성을 부여하여 전문 법조단체가 중재를 주도하도록 발전시켰다. 

대륙에서는 국제상업회의소가 프랑스 파리에 국제중재법원을 설치하여 전 세계에서 중재를 수행한다. 국가법원은 지역에 고착되어 있지만 중재법원은 지역 개념이 아니다. 중재인이 사법절차로 분쟁을 해결하는 어떤 곳도 중재법원이 될 수 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동성과 가변성이 극대화된 새로운 개념의 사법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중재로 해결되는 사건은 상사분쟁이 다수지만, 최근에는 투자자-국가 분쟁(Investor-State Dispute) 수단으로서 국제중재가 활용되고 있다. 남(南)수단-수단 간 국경분쟁, 중국과 필리핀 간의 남지나해 도서에 대한 영토분쟁 등 주권적 사항에 해당하는 영역까지 중재로 해결하는 추세다. 

▲ 영국 런던국제중재법원 청사.

아시아의 경제 신장으로 역내에서 중재가 활성화되었다 해도 여전히 이 영역은 서구가 주도하는 분야이고, 다분히 ‘그들만의 리그’다. 매년 국제중재 인명록을 편찬하는 세계중재저널은 전 세계에서 약 600명의 중재전문가를 선정 발표한다. 90%는 서구인들이고 아시아인은 3~5%를 넘지 않는다. 아프리카인들은 1~2%이다. 

중재인들은 법관에 준하는 엄격한 윤리기준을 적용 받으므로 전문성과 함께 높은 수준의 평판과 직업윤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서구와 달리 아시아 아프리카는 그런 토양이 부족하다. 최근 경제의 주도권을 쥔 기업들이 중재 당사자가 되지만, 여전히 하부구조(sub-structure)에 불과하고 상부구조(super-structure)는 서구인들이 주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동 국가에서 초고층 건물, 싱가포르의 마천루를 한국 기업이 건설했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그 건물을 둘러싼 분쟁이 생기면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중재인은 서구인들이다. 건설 엔지니어링 기준은 영국 엔지니어협회가 만든 기준과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감정인들도 영국이나 미국 엔지니어들이다. 조선산업도 비슷하다. 영국의 배를 만드는 산업은 한중일(韓中日)로 넘겨줬지만 감리, 보험, 및 중재는 그들의 기준과 시각으로 재단된다. 

‘그들만의 리그’를 파고 들어라 

필자가 대리한 한국 기업은 합작 파트너에게 계약 위반을 지적하면서 상투적 문구인 ‘귀사의 후의의 감사드리고 향후 일익번창을 기원합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가 사후에 중재재판 과정에서 클레임 했다는 사실을 인정받지 못할 뻔한 적이 있다.

분쟁 상대방에게 그런 문구로 클레임을 한다는 것을 유럽의 중재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서구와 동양의 기업문화가 다르다는 감정증인까지 제시하고서야 겨우 권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한국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피해를 보기도 한다. 오래 전 올림픽에서 심판의 오판으로 금메달을 놓친 선수가 이의를 제기하여 스위스의 스포츠중재재판소(Court of Arbitration for Sports)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다. 

하필 재판 기일로 지정된 날이 추석날이어서 참석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국, 독일, 케냐의 중재인들은 ‘한국의 추석’이라는 개념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대로 재판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재판 준비나 증인 출석에 큰 애로를 겪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에 재판을 한다면 상상도 못하는 기본권 침해로 보지만, 기준과 문화를 선점하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이의를 해도 받아들여진다는 보장이 없다. 

필자가 중립 중재인으로서 영국이나 싱가포르에서 외국 당사자의 사건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쉽게 얘기하면 축구경기의 중립 심판 같은 역할이다. 외국에서 이런 중재재판을 진행할 때는 한국인 중재인이 흔치 않는 현실을 의식하여 공정하고 불편부당하게 인정받기 위해 남보다 더 노력하고 매사에 조심한다. 

한국은 국제중재분야에서 후발주자로서 최근 가장 주목 받는 참여자다. 기업들이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면서 중재를 접하고, 한국 변호사들이 한국 기업 관련 중재를 수행하면서 전문성을 쌓게 되고, 이제는 중재인으로 활약하면서 중요한 국제적 중재기관의 리더십을 확보해 가고 있다. 이런 법률지식산업을 활용할 필요를 절감하여 최근 법무부는 상사중재를 육성하기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해 법안을 제출했다. 

지난 20여 년 간 한국 기업들은 총성 없는 글로벌 시장에서 사투를 벌여왔다. 그러나 원천기술과 고유한 아이디어와 권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제대로 체결하지 못하거나 계약상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국제 시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국가와 법조계가 이런 문제를 개개 기업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전문영역에서 국제적 전문성과 경쟁력 강화라는 국가정책으로 이 문제를 접근한다면 한국도 아시아에서 돋보이는 국제분쟁해결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 

국재중재에 대한 한국의 가능성

필자는 지난주 싱가포르 국제재판소에서 법정 변론을 할 수 있는 외국 변호사 자격을 부여 받았다. 싱가포르 대법관이 축하 서신을 보내며 내가 가진 국제적 전문성이 싱가포르 변호사들과 함께 어우러져 싱가포르가 국제적인 법률수도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필자는 싱가포르의 과감하고 분명한 국가비전사업 수행이 부럽다. 

그들의 성공으로 주변 아시아 국가들이 자극을 받아 국제조약이나 기구도 없고, 국제재판소도 없는 아시아가 서로간의 대화와 공정한 절차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갖춘 지역으로 변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한국이 새로운 아시아의 미래에 견인차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기업이 국제중재의 이용자가 되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법조인들이 중재변호사와 중재인으로 활약하고, 나아가 국제판사로 초청을 받으며, 회계사와 엔지니어들이 기준을 만들고, 감정인이 되고, 우리 청년들이 새로운 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실현하는 날이 오는 것은 막연한 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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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17-07-25 18:50:22
국제중재의 문외한으로서 읽었습니다만 국제중재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시는 모습이 멋지고 국익을 지키고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우리나라의 입지를 강화할 것인지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