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낙동강에서 다시 살아났다①
대한민국은 낙동강에서 다시 살아났다①
  • 정재욱 기자
  • 승인 2015.10.16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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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 낙동강 방어전·인천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선의 주요 격전과 영웅들

시신이 쌓여 산을 이루고, 피가 흘러 강이 될 정도의 격전으로 이 땅을 지켜낸 영웅들의 전투

‘낙동강 방어선’은 6·25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과 미군이 부산을 최후 교두보로 삼고 천혜의 장애물인 낙동강을 이용해 구축한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한미 연합군은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 간 치열하게 전개됐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통해 꺼져가던 대한민국의 운명을 되살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총반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워커 중장의 이름을 붙여 ‘워커 라인’이라고도  불린 낙동강 방어선은 경북 왜관을 왼쪽 꼭짓점으로 해서 대구를 둘러싼 ‘┏’ 모양으로 구축됐다. 남쪽의 마산으로부터 경북 왜관~경북 낙정리~경북 영덕을 잇는 남북 약 160㎞, 동서 약 80㎞에 이르는 지역이다. 

▲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미군 배치 현황. 한미연합군은 왜관을 중심으로 포항까지의 동쪽 선(Y선)은 국군이, 남쪽의 마산·함안까지 방어선(X선)은 미군이 담당해 대한민국의 마지막 영토를 방어하고 북진의 기틀을 마련했다.

북한군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해 전쟁을 종료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낙동강 방어선에 가로막혔다. 급기야 8월 15일 대구 점령으로 목표를 수정했고, 이를 재차 변경해 김일성은 9월 낙동강 방어선 돌파에 모든 전력을 기울이라고 지시했다. 

북한군은 8월 공세에는 13개 보병사단 가운데 11개 사단을 투입했고, 9월 공세에는 13개 사단 모두를 5개 공격집단으로 나눠 투입했다. 이에 맞선 국군(5개 사단)과 미군(4개 사단 및 1개 해병여단) 역시 가용 가능한 모든 병력을 집중해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사활을 걸었다.

낙동강 중서부 전선

낙동강 방어선 작전은 ‘┏’ 모양 방어선의 정면 부분인 경북 왜관과 다부동의 중서부 지역, 경남 창녕과 마산 중심의 서부 및 남부 지역, 경북 의성 및 영천 일대를 사수하는 중동부 지역, 경북 영덕과 포항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 지역으로 나뉘어 전개됐다. 워커 사령관은 왜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포항까지 Y선, 남쪽으로 경남 함안까지 X선을 설정해 Y선은 국군, X선은 미군이 맡아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했다. 

중서부 전선 작전은 대구 정면을 둘러싼 왜관~다부동~팔공산 지역에서 국군 1사단, 미 1기병사단이 북한군 5개 사단(제1·3·10·13·15사단)에 맞서 전개한 공방전이다. 다부동 서쪽인 왜관 일대는 미 1기병사단, 다부동 일대는 국군 1사단이 방어를 담당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중앙에 해당하는 다부동 일대는 부산의 관문인 대구를 점령하기 위한 북한군 3·13·15사단의 공세가 강력했다. 대구 북쪽 22㎞에 위치한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경북 상주로부터 이어져 다부동~대구로 관통하는 간선로(5·25번 도로)를 집중 공략했다. 북한군 전차 부대의 진격을 위해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다부동 북서쪽의 유학산(839m)과 그 동쪽에 위치한 가산(902m) 등 지형의 이점을 활용해 다부동의 주저항선(8월 3일부터 9일간 낙정리·해평 전투 등을 벌이며 낙동강 연안을 사수한 1사단은 8월 12일 다부동으로 이동해 주저항선을 구축했다)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했다. 9000명이 채 안 되는 병력의 1개 사단이 전차와 대포로 무장한 북한군 3개 사단을 격퇴한 것이다. 

1사단은 다부동 방어전에서 전투력을 인정받아 이후 미군 1군단에 배속돼 미군의 북진 작전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한미 연합군 가운데 평양을 가장 먼저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평양 1호 입성한 백선엽 국군 1사단 
산악 지대 도보로 미군 차량과 전차 앞질러 

▲ ○가 백선엽 장군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다부동 방어전에서 지휘력과 전투력을 인정받아 미군 1군단에 배속돼 미군의 북진 작전에 참여한다.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은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을 직접 불러 이례적으로 국군 1사단에 미 10고사포단을 배속시켰다. 

국군 1사단은 미 1군단의 예비대로서 북진 작전의 후미에 배치돼 잔적 소탕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서울 수복의 기회를 놓친 백선엽 사단장의 관심은 평양 입성이었다. 백선엽 사단장은 L5 연락기를 타고 대전에 있던 미 1군단 사령부로 찾아가 밀번 군단장과 담판을 지었다. 

평양 탈환작전의 선두에 서겠다는 백 사단장에게 돌아온 답변은 “미군 사단은 수백 대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다. 국군 1사단의 기동력(60~70대의 차량)으로 선두에 설 수 있겠는가?”였다. 백선엽은 “우리에게 차량은 많지 않으나 대신 주야로 행군할 투지가 있다. 기회를 달라. 한국은 산이 험하고 도로가 나빠 불철주야로 행군하면 도보부대가 평양에 먼저 입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미 1군단의 우익 주공부대로 선정된 국군 1사단은 이미 임진강을 도하한 미 1기병사단을 앞지르고 10월 18일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 북한군 사살 3695명, 포로 2048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 평양 출발 전 국군 1사단은 청주에 있었다.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등 눈부신 전공을 세운 백선엽 사단장은 이후 두 차례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고 33세의 나이로 한국군 역사상 첫 4성 장군에 오른다. 6·25 전쟁 당시의 한미연합 작전을 통해 미군의 선진화된 전략과 체계를 익힌 백선엽은 이를 한국군에 전수, 국군의 현대화·체계화에 기여했다. 

다부동에 접근하는 적 전차를 막아라 
천평동 ‘볼링 앨리’ 전차전 

사단의 우측인 다부동 접근로(다부동~진목정~신주막)는 1사단 11연대가 담당했다. 하지만 11연대는 북한군 전차에 맞설 수단이 없을 뿐 아니라, 포병도 1개 포대에 지나지 않아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북한군 13사단에 배속된 전차연대는 당시 북한군 사단 중 가장 많은 14대의 전차로 신주막에서 다부동에 이르는 5번 도로로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길을 뚫고 곧바로 대구까지 밀고 내려갈 기세였다. 

11연대는 미군이 새로 지급한 3.5인치 로켓포를 동원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정면 공세를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점차 후방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신주막-다부동 간 도로 양쪽의 산에선 아군과 적군이 뒤섞여 백병전이 벌어지며 방어선 전체가 흔들렸다. 

8월 17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미 25사단 27연대, 19일에는 미 23연대를 다부동 주저항선에 증원 배치해 위기 타개에 나섰다.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27연대는 20대 규모의 전차를 보유한 전차중대와 4개 포대를 배속 받아 막강한 화력을 보유했다. 이들 미군 증원 부대는 다부동 접근로인 5번 도로를 중심으로 방어막을 폈고, 그 좌우의 고지는 국군 11연대가 담당했다. 

미군 전차부대와 야포부대가 증원 배치된 이후인 8월 21일 밤 다부동 계곡에서 6·25 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이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미 27연대 정면으로 대규모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북한군 전차 부대의 기습을 예상했던 미 27연대 전차가 일제히 포격을 가했다. 

다부동 접근 도로의 좁은 골짜기에는 아군과 적군의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 탄환이 뒤섞여 날아다니며 불꽃을 튀겼다. 미군 장병들은 후에 공중에서 교차되는 수많은 포탄 덩어리가 마치 볼링공과 같았다며 이날 전투를 ‘볼링 앨리 전투’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북한군 전차 9대, 자주포 4문을 파괴했다. 대구를 목표로 다부동으로 진격하던 북한군은 75% 이상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왜관 북쪽 5㎞ 지점의 328고지는 서쪽 능선을 따라 사단 후방지역과 왜관으로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였다. 국군 1사단 15연대가 북한군 3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이 고지는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뤘다’는 참상을 자아낸 낙동강 방어선의 대표적인 혈전(血戰)의 장소였다. 

미 제8군의 강력한 예비대 이끈 마이켈리스 대령(미 27연대장) 

▲ 마이켈리스 대령(미 27연대장)

천평동 ‘볼링 앨리’ 전차전을 승리로 이끈 미 25사단의 27연대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후에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부관으로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야전 지휘관이었다.

본인도 6·25전쟁 후 승승장구해 대장까지 진급하고 미 8군 사령관에 올랐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1)>에서 마이켈리스 연대장에 대해 “전체 부대가 기계처럼 움직였다”면서 그의 지휘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이켈리스의 미 27연대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소장이 위기 상황에서 투입하는 일명 ‘소방부대’라 불리는 강력한 예비대였다. 1950년 7월 30일 진주가 적에게 넘어가자 마산 정면에 투입돼 진동리를 지켜냈고, 영산의 낙동강 돌출부가 뚫린 8월 11일에는 영산에 즉시 투입됐다. 

마산 진동리에서 마이켈리스 연대장의 지휘력을 보여준 일화가 있다. 진동리는 진주~마산 간 도로와 사천~고성을 거쳐 마산으로 향하는 우회로가 합쳐지는 길목이었다. 8월 3일 오전 진동리에서 27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진동국민학교에 인근 고지에서 기관총을 포함한 강력한 화력을 동원한 적의 기습 공격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학교는 아수라장이 됐다. 이때 마이켈리스 연대장이 적의 화력이 집중되고 있던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 체계를 정리하여 중화기의 엄호사격 하에 고지를 점령하도록 반격 지시를 내렸다. 이때의 탁월한 지휘력으로 마이켈리스 연대장은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다부동 지역 전투의 ‘혈전’ 328 고지 
최영희 대령, 낙오병들로 자체 특공대 편성 

비가 내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8월 13일 밤이었다. 야음을 이용해 328고지를 기습한 적을 상대로 15연대 병사들이 백병전을 벌이며 맞섰으나 결국 고지 후사면으로 후퇴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15연대가 역습을 펼쳐 진지를 탈환했으나, 고지 정상에 집중된 적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다시 고지 후사면으로 물러났다. 15연대는 적과 정상을 사이에 두고 수류탄전을 전개했지만, 수류탄마저 소진돼 고지 아래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이때 상황을 지켜본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고지 아래로 밀려나는 아군 병력 앞에 안전거리를 두고 57㎜ 대전차포를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최 대령은 극약 처방을 통해 병사들을 멈추게 한 후 지휘관들이 혼란을 수습하도록 한 것이다.

부대를 정비한 최영희 대령은 이날 밤 사단과 별도로 자체 확보한 특공대를 328고지 배후에 침투시켰다. 이 특공대는 최 대령이 7월 6일 증평에서 15연대를 재편성할 때 소속 부대를 찾지 못한 낙오병들을 수습해 1개 소대 규모로 만든 부대였다. 

북한군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황했다. 적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15연대 1대대와 3대대가 북한군 정면을 공격해 328고지 탈환에 성공했다. 이날 붙잡힌 북한군 포로는 “328고지를 공격준비진지로 해서 이날(8월 15일) 2개 연대를 증원하여 대구를 공격할 계획이었다”고 실토했다. 

이후에도 328고지를 향한 북한군의 반격이 계속됐으나 국군은 백병전과 수류탄전으로 막아냈다. 북한군은 남한에서 강제 징집한 병력들에게 술을 먹이고 소총도 없이 수류탄만 지급해 선두에서 공격하도록 했다. 이들 뒤에선 독전(督戰)대가 다발총을 들고 위협했다. 전투가 계속될수록 방어 진지 전방에는 적의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고, 북한군은 그 시체를 방패삼아 아군 진지로 진격했다. 

치열한 육탄전 끝에 고지를 지켰지만, 전투가 끝난 328고지 일대는 참혹했다. 썩은 시체에 아직 선혈이 낭자한 시체들이 더해졌고, 골짜기마다 메워져 있는 주검들이 1000여 구가 넘었다. 개전 초기 서울을 최초 점령해 ‘서울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무적을 자랑하던 북한군 3사단은 328고지를 방어하던 15연대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유학산 고지 탈환의 주역 1000여 명의 무명용사 
김호정 대위, 이종철 중위 등 장렬하게 戰死

다부동 전투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류형석 씨는 그의 저서 <낙동강(6)>에서 유학산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날씨는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내리쪼였고, 병사들이 의지하고 있는 암석은 용광로로 변했다. 지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옥이 바로 그곳이었다. 절벽능선이 지옥의 관문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병력이 희생된 1대대 3중대는 중대장 김호정 대위마저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총탄에 쓰러졌다. 8월 20일 낮이었다. 이제 ‘지옥의 절벽’을 향한 돌격은 1중대 차례였다. 1중대장 이종철 중위는 김호정 대위의 시신을 옆으로 한 채 병력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종철 중위는 앞만 보고 돌진해 정상에 올랐지만, 적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그대로 쓰러져 산비탈로 굴러 떨어졌다. 

류형석 씨에 의하면 김호정 대위와 이종철 중위는 전날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부하를 죽이고 어떻게 살아남겠느냐? 내일 공격은 우리 2개 중대가 협동해서 목표를 탈취할 때까지 돌격을 반복하자.”  

부하의 희생에 대한 책임감으로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진두에서 중대를 지휘하다 희생된 것이다. 김호정 대위와 이종철 중위 등 수많은 무명용사의 희생을 자아낸 유학산 고지는 결국 1대대의 마지막 남은 결사대 150여명에 의해 23일 새벽 탈환됐다. 이때 결사대의 선봉에 섰던 2중대 1소대장 이준희 소위는 다부동 인접한 칠곡면 출신이었다. 

그는 “내 고향은 내가 지킨다. 유학산은 내가 제일 먼저 점령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정상에선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옷깃을 여미고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유학산 고지 탈환의 주인공은 이 전투에서 희생 된 1000 여 명의 병사들이었다. 

신병의 무덤 유학산 837 고지 
무명용사들 하룻밤 사이 80~90% 희생  

328고지에선 북한군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대구 북서쪽의 유학산에선 반대로 837고지를 선점한 북한군에 대해 고지 점령 작전을 벌인 국군의 인명 피해가 컸다. 

결사대를 편성한 국군 1사단 12연대 1대대가 탈환 작전 개시 10일 만인 8월 23일 새벽 2시에 유학산 837고지를 탈취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군은 1000여 명의 병력 손실을 당했다.

정상에서 수류탄을 던지면 8부 능선까지 그대로 굴러와 폭발했기 때문에 고지 밑에서 공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군이 공격한 남쪽은 경사도가 심하고 700m 지점에서 정상까지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든 구조였다. 

12연대 1대대는 이런 악조건에서도 선두 분대가 격멸되면 다음 분대를 투입하는 식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하루에도 10여 차례 공격과 실패를 반복해 하나밖에 없는 접근로에는 아군의 시체가 쌓였고 골짜기마다 선혈이 흘러내렸다. 

더 안타까운 점은 병력 손실 가운데 대부분이 그때그때 증원받은 신병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국군은 새 병력이 야전에 도착하면 소대장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서 “내가 소대장”이라고 소개한 뒤 중학교 졸업자 이상인 사람을 분대장에 임명하는 식으로 공격 진형을 갖췄다.

소대장은 담뱃갑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적어 간직했지만, 다음날 오전 전투에서 지난밤에 보충된 신병의 80~90%의 인원이 사라지는 게 보통이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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