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중동부 전선
경북 왜관·다부동의 우측인 경북 의성·신녕·영천 일대인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전선은 국군 1·6·8·수도사단이 방어했다.
북한군의 9월 공세에 직면한 국군은 다부동 일대를 지킨 1사단을 이동시켜 신녕 지역을 방어하던 6사단과 함께 대구 외곽을 지키도록 했고, 8사단은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남진하던 북한군을 섬멸했다. 국군 1사단이 지키던 다부동 일대는 미 기병1사단이 인계했다.
이 지역 정면에는 북한군 8·15사단이 투입돼 국군 방어선을 종심으로 깊숙하게 침투해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를 동쪽에서 공격하거나 경주를 통해 부산으로 진출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혹은 남동해안으로 진출한 후 포항-울산-부산 순서로 항구를 점령할 수도 있었다.
▲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일대의 328고지·유학산, 신녕의 조림산 등에서 수많은 고지전이 벌어졌다. 국군과 미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군사적 요지들을 지켜냈다. |
신녕을 지킨 조림산 전투
北 전차부대 섬멸한 변규영 소위 특공대
다부동 일대에서 돌파 계획이 좌절된 북한군은 신녕 지역의 북한군 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해 대대적인 침투 작전을 전개하여 8월 말에는 신녕 북서쪽 10㎞ 지점의 조림산까지 진출했다. 신녕은 영천의 북방 도시로서 북한군 8사단이 영천을 공격하면 영천 일대의 북한군 15사단과 합세해 남측의 대구와 부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해발 638m의 조림산은 사방 10여 ㎞ 지역의 감제와 중앙선 및 28번 도로의 통제가 가능해 신녕 방어의 전술적 요지였다. 조림산을 빼앗기면서 신녕 지역에 대한 국군의 위기감이 고조됐다. 신녕 방어에 나선 국군 6사단은 8월 28일 조림산 인근 28번 도로와 주변 고지를 장악해 조림산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9월 1일 밤 적 전차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런데 조림산 인근 갑령 고갯마루 20m 전방까지 접근한 선두 전차가 갑자기 화염에 휩싸이며 전복됐다. 미리 첩보를 입수한 국군 19연대 1대대장 허용우 소령이 부대원과 함께 매복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약 20분이 지난 후 1대대의 특공대가 투입됐다. 1중대 3소대장 변규영 소위를 대장으로 사병 5명으로 구성된 특공대는 먼저 적의 전차 후미에 3.5인치 로켓탄을 사격한 후 고개 아래로 뛰어 내려가 적 전차 7대를 파괴했다.
변 소위는 1번 전차 무한궤도 측면에 로켓포탄이 적중되자 2번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포탑 안에 던져 파괴했다. 3.5인치 로켓포도 전차 2대를 더 파괴했다. 당황한 후미 전차가 후진하다가 교량 입구에서 전복돼 나머지 전차들은 앞뒤가 막혀 꼼짝 못하게 됐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적 전차부대는 소위 1명을 포함해 5명이 투항했고, 나머지 전차병들은 모두 도주했다. 특공대는 나머지 전차를 수류탄과 휘발유로 파괴했다. 다음날에는 갑령 고개 북쪽에 있던 적 전차들의 위치를 공군에 알려 유엔 공군기가 파괴하도록 했다.
북한군 8사단은 이 일대에서 21대의 전차가 파괴되어 신녕을 거쳐 영천으로 향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조림산 일대에서 방어 위주의 작전을 펼쳤다. 이 전투 전과 변규영 소위는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받고, 특공대원 전원은 1계급 특진했다.
영천 전투, 최초의 국군 단독 작전 성공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적이 영천을 점령할 경우 아군 유일의 동서 보급로가 차단되고, 대구와 경주가 북한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된다.
영천의 도로망은 서쪽으로는 대구, 남쪽으로는 경주를 거쳐 부산, 동쪽으로는 포항으로 연결된다. 북한군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자 국군은 1·6·7·8사단의 7개 연대가 미군 전차 1개 소대(전차 5대)를 지원받아 영천 일대의 적을 남·서·북쪽 3면에서 포위 공격해 격퇴했다. 9월 5일부터 13일까지 9일 간의 공방전이었다.
영천 전투는 국군 단독으로 전개한 군단 단위(2군단) 작전이 성공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아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전환점이 됐다. 북한군 15사단은 이 전투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났다.
낙동강 동부 전선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 전선은 경북의 기계 및 안강, 그리고 동해안인 영덕과 포항에 이르는 저항선으로,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이 북한군 5·12사단의 남하 공세를 저지했다.
8월 5일 경북 청송에서 남하를 개시한 북한군 12사단이 8일 기계·안강 서북쪽의 죽장을 점령했다. 국군과 미 8군 사령부는 적의 공격 목표가 기계와 안강, 이에 이어지는 경주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북한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군 12사단은 8월 9일 기계를 점령해 안강과 경주로 남하할 태세를 갖췄다.
곤계봉 사수한 기계·안강 전투
경주 북방 4~5km까지 밀렸던 위기의 극복
국군은 8월 18일 기계를 일시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기계 북방의 비학산 일대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북한군은 26일 야간에 대규모 공격을 재개해 기계를 재점령하며 경주-부산으로의 9월 공세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전력을 정비한 북한군은 9월 2일 새벽 공격을 재개해 5일 안강을 점령하고 일부 병력은 경주 북서쪽 4~5㎞ 지점까지 육박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동부 전선에 최대의 위기가 조성됐다. 북한군 12사단의 주력은 안강 남쪽, 경주 북서쪽의 곤계봉까지 진출했다.
낙동강 방어선 동부 전선의 국군과 미군은 위급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9월 5일 안강 이남, 경주의 북쪽인 무릉산~곤계봉 선에 방어선을 형성한 후 격전 끝에 이 선을 지켜냈다.
경주 북방 12km 지점의 해발 293m인 곤계봉은 안강 일대의 감제가 가능하고 안강~경주 간 도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9월 6일 새벽 4시부터 북한군이 곤계봉 남쪽 국군의 방어선을 공격해 시작된 곤계봉 공방전은 이후 9월 13일 수도사단 17연대 2대대가 곤계봉 탈환에 성공할 때까지 15회 이상의 전투를 벌이며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곤계봉을 되찾은 국군은 9월 16일 반격을 개시해 9월 18일 안강과 기계를 탈환했다.
포항을 지킨 71명의 소년 학도의용대
포항여중을 지킨 학도병 71명은 앞서 7월 육군본부가 대구에서 모집해 수도사단 사단장 김석원 준장에 배속시킨 대한학도의용대였다. 이들 대부분은 일제시대 일본 육사 출신으로 충북 진천 등의 전선에서 전과를 올린 김석원 사단장의 명성을 듣고 자원한 학생들이었다. 김석원 사단장이 3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학도의용대도 해산됐다.
이때 일부는 일반 부대에 입대하고 나머지 71명은 귀가조치 됐는데, 이 71명의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3사단장 김석원 소장을 찾아 포항으로 향했다. 포항여중에서 결전을 벌인 학도병들이 바로 이들이다.
서울대 교육과 2학년인 김용섭이 중대장을 맡았고, 배재중 6학년 유명욱, 중앙대 2학년 김일호가 소대장이었는데, 이들 모두는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했다. 자신들을 처음 교육시킨 사단장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를 구하겠다는 애국심으로 목숨을 던진 것이다.
동성중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해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은 생전에 모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백선엽 著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1)> 중에서)
학도병으로서 국군 1사단의 다부동 전투에 참전했던 류형석 씨(당시 대구 농림중 2학년, 16세)는 “피난을 가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적과 싸우다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부산으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 포항
포항은 항만과 철도, 육로의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동해안 최대의 병참기지로서 포항을 점령하면 경주~울산~부산 축선을 통해 부산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8월 공세에서 포항을 탈취했다가 다시 내준 북한군은 9월 공세를 통해 포항뿐만 아니라 국군의 동부 전선 2차 방어선인 형산강을 돌파해 한때 경주까지 위협했다.
국군 3사단은 형산강 방어선에서 북한군 5사단의 남하를 저지해 반격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9월 17일 반격을 개시해 19일 형산강 도하에 성공한 후 20일 포항을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9월 12일과 13일 미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와 국군 18연대가 각각 전략적 요지인 운제산과 형산을 탈환하며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 미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는 미 24사단 사단장 처치 소장이 부사단장 데이비슨 준장에게 운제산 탈환 임무를 부여해 특별 편성한 부대다.
8월 11일 새벽 포항 북쪽 흥해에 있던 북한군 12사단의 1개 연대가 포항에 기습적으로 진입했다. 당시 국군 3사단이 정면에 위치한 강구의 북한군 5사단을 저지하다 배후에서 기습을 당했다.
당시 포항에는 3사단 후방사령부와 보급 및 근무지원부대, 해군 포항경비부 등 9000여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지휘 체계가 확립돼 있지 않아 체계적 방어가 어려웠다. 철수 작전을 벌이는 사단 지휘부가 사령부의 방어 임무를 맡긴 부대는 이틀 전 의성 지구에서 도착한 71명의 학도병들이었다.
날이 밝고 사단 전술지휘소가 있는 포항여중 정문 전방 50m 지점에 북한군이 도착하자 학교 안에서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포항여중을 지키는 학도병들이었다. 잠시 주춤했던 북한군은 박격포 사격으로 공격을 재개했지만, 학교 안에 있는 학도병들의 저항이 거세 교전이 계속됐다.
낮 3시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학도병들은 갖고 있는 실탄과 수류탄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실탄이 고갈되고 나서야 후퇴한 학도병들은 71명 가운데 47명이 전사하고 13명이 포로가 됐다.
학도병들이 50~60명의 적을 사살하면서 포항 시내 진출을 저지하는 동안 3사단 사령부와 기타 지원부대 등은 무사히 피신하고 군 보급품과 무기도 지킬 수 있었다.
1만1000여명을 낙오 없이 구출한 장사동 철수 작전
북한군 5사단이 강구를 점령하면서 강구 남쪽 장사동에 방어선을 편 국군 3사단은 북한군 12사단이 장사동 남쪽, 포항 북쪽인 흥해에 진입함으로써 후방이 차단돼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보급로도 끊겨 탄약이 떨어져 진지 사수도 어려웠다.
이곳에는 3사단 병력 외에도 경찰관 및 노무자, 공무원, 피난민 등 수천 명이 집결돼 있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애초 장사동 사수 명령을 내렸던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해상 철수를 지시했다.
3사단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장사동 남쪽 약 7㎞ 지점에 있는 독석동 인근 해안선을 철수 지점으로 정해 8월 17일 새벽 미 상륙작전용 LST 4척을 통해 철수하기로 했다.
철수 작전의 관건은 부대뿐만 아니라 경찰관 등 공무원과 민간인 피난민을 무사히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석원 준장은 트럭 6대를 동원해 독석동 인근에서 왕복 운행하며 증원 부대가 온 것처럼 기만전술을 펼쳤고, 비밀 유지를 위해 민간인들에게는 철수가 아닌 보급품을 받으라는 명목으로 해안선에 집결을 명령했다.
전날 밤까지 일부 병력이 기만전을 벌인 가운데 17일 새벽 6시경 3사단 병력 약 9000명, 경찰대 1200명, 공무원과 노무자, 피난민 등 약 1000명이 집결해 신속하게 LST 함정에 승선하기 시작했다. 민간인들과 병력을 실은 LST 3척이 먼저 떠나고 마지막 1척이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주변 경계를 한 엄호부대와 김석원 3사단 사단장 및 참모들이 승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함정과 부대를 향한 적군의 박격포탄과 기관총 공격이 시작됐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함장이 함정을 출발시켜 배를 놓친 김석원 사단장을 포함한 나머지 부대는 꼼짝없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헌병대장 김홍걸 소령이 헌병 20명과 함께 수영으로 함정을 따라가서 함정에 올랐다. 이들이 함장을 설득해 배를 돌린 덕분에 나머지 부대도 철수할 수 있었다.
이 철수 작전 후 육군총참모장 정일권 장군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진두지휘였다. 피난민까지 모두 LST에 태우고 나서야 사단장 자신이 맨 나중에 배에 올라탔다”고 극찬했다. 국방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사>는 장사동 철수 작전에 대해 ‘한 명의 병사도 남기지 않고 철수한 전례는 오직 독석동 철수작전 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고 평가했다.
낙동강 서부·남부 전선
낙동강 서부·남부 전선 작전은 경남 창녕~영산 축선과 진주~마산 축선에서 미군 1해병여단이 증강된 미 3개 사단(2·24·25사단)과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5개 사단
(2·4·6·7·9사단) 간에 펼쳐진 공방전을 말한다. 북한군은 창녕~영산 축선을 통해 대구 후방을 차단하고 경부간 도로를 따른 부산 진출을 목표로 한 동시에, 진주~마산 축선에서는 마산을 점령하고 부산으로 진입해 전쟁을 종결을 노렸다.
‘신출귀몰’ 무적(無敵)의 미 해병대
8월 3일 미 본토에서 부산에 상륙한 미 1해병여단의 첫 임무는 킨 특수임무부대에 배속되어 진주 공격과 동시에 마산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미 해병대의 주력인 5연대는 7일 진동리 동북쪽 255 고지와 야반산 정상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해 적을 격퇴했다. 북한군의 저항이 거셌지만, 해병대 전사자는 255 고지에서 16명, 야반산에서 8명이었다. 북한군 전사자는 각각 600여 명, 150여 명이었다.
진동리를 점령한 미 1해병여단은 함재기의 근접 지원을 받으며 11일 고성, 12일에는 사천 근처 주요 고지들을 탈환해 나갔다. 개전 이래 최초의 쾌속 진군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6사단의 206기계화연대를 발견해 격퇴, 200여 명을 사살하고, 트럭 45대, 지프 31대 등을 파괴했다. 진주 진격을 앞둔 미 해병대는 철수 명령을 받고 다시 미 8군 예비대로 편성됐다가 이후 영산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 투입되었다.
7월 14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출발한 미 1해병여단은 함정 안에서 좋지 않은 소식만 접했다. 함정마다 전황을 표시한 지도가 있었는데, 전선이 날마다 내려와 상륙이 임박한 7월 말에는 아군 점령 지역이 지도 우측 하단의 좁은 지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있는 선실에선 ‘수송선단이 부산에 입항할 무렵 유엔군은 이미 바다로 밀려나 있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팽배했다. 그랬던 미 1해병여단이 막상 전선에 투입되자 연전연승의 무적 해병대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영산 작전이 끝나갈 무렵인 9월 5일 미 1해병여단은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후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작전 등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미 1해병여단은 3개의 해병 연대로 구성된 사단으로 증원됐고,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알몬드 중장의 미 10군단에 배속돼 작전을 펼쳤다.
1950년 11월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해 당시 북한의 임시 수도였던 강계 점령을 노렸던 미 1해병사단은 7개 사단 12만 명 규모의 중공군에 포위돼 철수 작전을 벌이게 된다.
1만2000여 명의 미 1해병사단은 10배가 넘는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적의 포위를 뚫고 흥남으로 이동, 철수(흥남철수)에 성공했다. 미 1해병사단의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돼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킨 특수임무부대의 마산 사수
낙동강 남부 지역 전투의 요충지는 마산이었다. 마산은 부산 서쪽으로 인접한 경상남도 제2의 도시로, 북한군은 남측방을 돌파하여 마산을 거쳐 단숨에 부산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북한군 6사단은 이를 위해 6·25 전쟁 초기부터 호남지역으로 우회 기동하면서 마산을 노렸다.
목포와 여수를 점령한 인민군 6사단은 7월 31일 진주 점령, 8월 6일 밤 진동리 주변 감제고지를 장악하고 마산을 위협했다. 6사단장 방호산 소장은 “우리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르는 것이다”라고 마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05전차사단, 83모터사이클연대를 배속 받아 화력과 기동력이 보강됐다.
미 8군은 북한군의 우회 기동이 마산을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의도인 것을 알고 상주 남쪽에서 방어 중이던 미 25사단을 마산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이때 미 25사단은 상주에서 김천, 왜관을 거쳐 마산까지 140㎞ 거리를 36시간 만인 8월 3일 야간에 이동 완료했다.
당시 마산을 지키던 미 24사단 19연대와 급하게 투입된 미 8군의 예비대인 27연대만의 힘으로 북한군 6사단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신속한 부대 증원이 필요한 시기였다.
워커 장군은 미 25사단장 킨 소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킨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미 1해병여단, 미 5연대전투단, 국군 민부대, 김성은 해병부대 등을 배속시켰다. 총 병력 2만여 명, 전차 100여 대, 야포 100여 문을 보유한 특수임무부대로 마산을 사수한 것이다.
8월 7일부터 시작된 반격 작전으로 북한군 6사단에 병력 4000~5000명, 전차 13대의 손실을 가하며 마산의 위기를 극복한 킨 특수임무부대는 8월 12일 이후에는 마산 서측의 서북산 일대를 주저항선으로 북한군의 동진을 저지했다.
진동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승전 김성은 해병 부대
국군 해병대의 김성은 부대는 8월 1일 서남지구전투사령관 이응준 소장으로부터 “마산을 향해 동진하는 적을 진동리 서쪽에서 저지하여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무렵 마산은 미 24사단 19연대와 미 25사단 27연대가 국내와 미 본토에서 증원 부대가 올 때까지 북한군 6사단에 맞서 마산을 사수하고 있었다. 김성은 부대도 사활을 건 마산 사수전에 투입된 것이다.
▲ 김성은 부대장(左) |
김성은 부대는 이날 저녁 6시 마산을 출발하여 밤 10시 30분경 봉암리 계곡의 고사리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방어선을 지키던 김성은 부대는 8월 3일 전차를 앞세우고 다가오는 적 대대 병력을 공격해 전차 2대, 트럭 4대, 지프차 2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4일 함안으로 복귀하기까지 밤을 새우다시피 한 데다, 물 한 모금, 쌀 한 톨 구경하지 못한 김성은 부대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이후 8월 6일부터 미 25사단 미 27연대에 편성돼 진동리를 방어한 김성은 부대는 적에게 점령당한 야반산을 탈취했다. 김성은 부대는 이런 진동리에서의 전과를 인정받아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다.
이후 마산 정면의 고지 일대에 격전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인 8월 17일, 북한군 7사단 51연대의 1개 대대가 경찰중대를 제압하고 기습적으로 통영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진동리 사수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진해에서 정비 중이던 김성은 부대가 다시 출동했다.
김성은 부대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통영상륙작전이다. 김성은 부대는 2척의 함정으로 통영반도에 상륙해 북한군을 격퇴하고 원문고개를 점령했다. 이때 유엔 및 국군 공군기와 해군 함정은 적 집결지와 보급차량을 폭격하고 북한군 함선 4척을 격침시켰다.
몇 차례 북한군의 역습을 막아낸 김성은 부대는 잔적을 소탕하면서 고성, 통영, 거제 등 해안에 숨겨진 북한군 선박을 찾아내 격침했다.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종군기자였던 마거리트 히긴스가 이 통영상륙작전에서 김성은 부대가 보여준 용맹함을 기려 ‘그들은 아마도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극찬한 것을 계기로 우리 해병대의 애칭이 ‘귀신 잡는 해병’이 됐다.
한국 해병대의 단독 상륙작전에서 성공을 거둔 김성은 부대는 전투 능력을 인정받아 미군과 함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고 9·28 서울 수복작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은 부대장은 해병대 사령관을 거쳐 해병대 출신 최초로 국방 장관을 역임했다.
미 해병대가 지킨 영산의 낙동강 돌출부
북한군은 창녕~영산 지역 가운데 특히 경남 영산 정면에 있는 낙동강 돌출부를 돌파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 8군의 강력한 예비대인 미 1해병여단이 북한군의 공격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작전의 관건은 미 1해병여단과 미 9연대가 각각 영산 정면 고지인 오봉리 고지와 클로버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8월 17일 오후 4시 미 1해병여단과 미 9연대는 동시에 공격을 개시해 오봉리 능선 고지와 클로버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미 해병대는 다음날까지 오봉리와 클로버 고지 일대 전 지역에서 소탕전을 전개했다. 북한군 3사단과 함께 서울을 점령해 ‘서울사단’ 칭호를 받았던 북한군 4사단은 미군의 공격으로 완전히 궤멸돼 패잔병들이 포격과 전투기의 폭격을 받으며 100여 명씩 무리를 지어 후퇴했다.
8월 19일 영산 작전 종료 후 다시 군 예비가 됐던 미 1해병여단은 9월 2일 다시 워커 중장에게 호출돼 영산으로 돌아왔다. 영산 정면의 북한군 9사단이 8월 31일 밤 10시 영산을 공격해 9월 1일 오전 미 2사단의 거의 전 방어 지역을 돌파해 위기가 고조됐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는 이번에도 9월 3일 오전 8시 영산 중앙을 공격한 것으로 시작해 전진을 계속해 3일 만인 9월 5일 오봉리 능선을 또 다시 탈환했다. 작전이 끝나갈 무렵 미 1해병여단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후 미 1해병여단은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북진 과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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