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와 문화, 선교사 빌헤름의 중국 전통문화이해를 중심으로
계시와 문화, 선교사 빌헤름의 중국 전통문화이해를 중심으로
  • 미래한국
  • 승인 2015.10.22 18: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희국(장로회신학대학교교수, 교회사)
2015. 10. 19. 기독교학술원

 

I. 시작하면서

1899년에 독일 개신교(루터교)출신 선교사로 중국 칭따오에 파송된 선교사 빌헤름Wilhelm은 이때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중국의 전통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 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인들을 형제자매로 대했다. 이 글은 Wilhelm의 선교사역을 개괄적으로 서술하면서 그가 이해하고 주장한 계시와 문화를 살피고자 한다.

II. 빌헤름Wilhelm의 생애와 선교활동

1. 독일 개신교(루터교) 파송 중국 선교사

Richard Wilhelm(1873-1930)은 독일 튀빙엔(Tuebingen)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블룸하르트(Blumhardt)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목회실습(Vicar)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온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겪었는데, 일평생의 반려자가 될 여성을 만났고 또 해외 선교사가 되고자 결단하게 되었다. 그 여성은 블룸하르트 딸 살로메(Salome)였다. 또한 그는 블룸하르트의 영향아래 해외 선교사가 되고자 결단하게 되었다. 1899년에 그는 선교사로서 약혼녀 살로메와 함께 스위스 <동아시아선교회>(Ostasien-Mission)의 파송을 받아 중국 산동지역으로 갔다.  도착하자 마자 그는 곧 바로 독일의 조차지역(Coloniy)인 칭따오(Tsingtau)에서 에른스트 파베르(Ernst Faber)의 후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1919년까지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였다. 

Wilhelm이 칭따오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에 본국의 후원자들에게 규칙적(정기적)으로 선교활동을 보고하였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의 중국은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접어 들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이 약 일천년 이상 그들의 삶을 지배해 온 전통생활방식을 낡은 것으로 간주하였고, 이 해묵은 인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들은 또한 중국을 지배해 온 만주족(청나라)에서 해방되고자 하였고 또 서양의 세력에 대하여도 거부감을 표시하였다. 여기저기에서 외국 세력(청나라, 서양)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혁명의 힘을 중국 정부가 막아 설 길이 없었다. 정부는 개혁의 주도권을 쥐려고 하였으나,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정책은 아쉽게도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못았다. 저소득 낮은 계층일수록 더욱 더 정부의 정책이 전달되지 못하였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헌법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형태를 원하였고 또한 국민의 권리가 확장되기를 계속 주장하였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정부는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교육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독일식 모델을 본받아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독일정부와 함께 칭따오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에서 Wilhelm이 일하게 되었다. 
         
당시의 중국 상황에 관하여 Wilhelm은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중국 정부가 개혁의 설계도는 잘 준비하였으나 이것이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나라에는 아직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지 못하였다.  그는 선교사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만일 그가 독일의 입장에 서서 선교활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선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독일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독일의 경제적 이득을 돕거나 혹은 서양 문화를 중국에 이식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독일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오로지 “예수의 제자”로서 중국인들을 “섬기겠다”고 결단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문화를 척도로 삼아 중국의 문화를 판단하지 않을 것이며, 비록 기독교 선교사 이지만 기독교의 눈으로 중국의 전통 종교들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서양의 동양에 대한 모든 오만한 태도를 철두철미 버리려고 한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섭리하신 중국의 “사람들”에게 다가서기로 결단하였다. 복음 안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추구했다.  그는 중국인들의 가치관, 중국인들의 생활방식, 그리고 중국인들의 문화와 종교를 “이방”(異邦, Heide)이라고 깔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중국의 전통문화와 사상을 이해하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중국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한 Wilhelm은 이들과 더불어 “친구”로 지내기를 원하였다.  여타 다른 선교사들처럼 중국인들에게 서양 기독교를 선전(Propaganda)하고 중국에 기독교를 옮겨 심으려는 생각은 –블룸하르트의 영향 아래-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선교현장에서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이런 뜻에서 그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인 스스로 원하지 아니하면-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세례야말로 서양 기독교의 표상이라고 보았으므로, 세례를 통해 중국인들을 서양식 기독교인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는 중국인들을 복음 안에서 ‘사랑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돕고자’ 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그는 학교를 설립하여서 교육선교에 힘쓰고 병원을 세워서 의료선교에 매진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이 –서양식 기독교인이 되지 말고-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중국의 토양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중국식 신앙공동체”(chinesische Nationalkirche)가 나타나기를 원하였다.   
         
Wilhelm의 이러한 선교이해가 칭따오의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 맨 먼저 상인들에게 그의 자세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상인들은 비록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지내지만, 그들이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Wilhelm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Wilhelm은 기꺼이 이들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또한, 정통주의적 유교 인습에 젖어 있는 학자들이 조금씩 그에게 마음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Wilhelm에게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었고, Wilhelm 또한 이들과 더불어 진리에 관하여 대화하였다. 진리란 사람을 지배하고 강압적으로 통치하려는 이념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 힘이라고 Wilhelm이 설명하자, 유교 학자들은 그의 설명을 받아들였다. 
         
칭따오에서 Wilhelm은 착수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교의 설립과 운영이었다. 그는 초등교육기관, 중등교육기관, 고등교육기관을 차례차례 설립하였는데, 이 가운데서도 여자중학교(Maedchenschule)를 설립한 일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 학교를 설립하게 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있었다. 그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본래 그렇게 낮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중국의 가정에서 여성은 안주인(安主人)이자 어머니로서 그 위상이 대단히 중요하고 높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얼마 전부터 여성이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여성의 인권이 어느 정도 존중되고 있는데 비하여, 중국에서는 여성을 서양에서처럼 개인으로 보지않고 집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로 논하므로, 중국에서는 여성의 인권을 서양에서처럼 그렇게 논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중국 여성은 집 안에서도 본래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가부장적 대가족질서에 매여 있는 까닭에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예컨대, 나이 어린 여성의 발을 천으로 단단히 묶어서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게 하는 풍습이다( 전족, Fussverkrueppelung). Wilhelm은 이렇게 비천하게 된 여성의 지위가 학교교육을 통하여 본래대로 회복되기를 희망하였다.  물론, 지금의 중국 국민들 대다수는 여성의 학교교육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지만. 
        
Wilhelm이 세운 학교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기도회가 있었고 또한 주일에는 예배도 드렸다.  그렇지만 그는 학생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강제로 주입시키려 들지 않았다. 학생들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하여서 자기 발로 예배실에 찾아 오도록 하였다. 그의 일을 돕기 위하여 아내의 형제자매들이 독일에서 이 곳으로 건너 왔는데, Benjamin Blumhardt와 Gottliebin이 이 학교에서 함께 일하였다. 그런데, 중국인들 가운데는 서양문화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것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전자의 경우에 속한 중국인들은 서양문명을 배워서 자신들이 새 시대에 새롭게 나아갈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들을 Wilhelm이 세운 학교로 보내서 서양에서 들여온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속한 사람들은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서양의 세력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전통문화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경계심과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들을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이것은 Wilhelm이 운영하는 학교에도 커다란 타격을 주었는데, 어느 해에는 입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으므로 한동안 학교의 문을 닫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학교운영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 동•서양 정신문화의 중재자(mediator)

대다수 서양 선교사들과 다른 입장을 가진 Wilhelm은 중국의 전통문화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여러 선교사들과 때때로 갈등을 빚었다. 더욱이 자신을 중국으로 파송한 동아시아선교회는 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이 선교회와 결별하게 되었다.

Wilhelm은 중국 전통문화와 고전의 가치를 잘 인식하였으므로 이 유산을 오늘날 새롭게 살려내기를 원하였다.  1904년부터 그는 중국의 고전들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에서 1930년까지 그는 [중국의 종교와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고전 8권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1913년에 그는 청도에서 <공자연구소>(Society of Confucius)를 설립하였다.  1919년부터 약 2-3년 동안 그는 독일에 돌아와서 지내다가, 1922-24년에 다시 중국으로 갔다.  맨 처음에 그는 북경의 독일 대사관에서 학문적인 자문 역할을 맡아 일하다가 그 다음에는 북경대학에서 가르쳤다. 192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 M.)대학에 중국학(Sinologie)이 개설되었는데, 그는 이 대학의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그 동안 10년 이상 중국인 학자 Lao Nai-hsuean 의 인도를 따라 작업해 온 중국고전[주역](I-Ging)번역을 마무리 짓고 출판하였다. 이 독일어 번역본을 근거로 하여서 훗날 [주역]의 영어번역이 착수되었다. 

II. 동서양 문화의  상호작용 가능성(possibility to interaction)

1. 동양과 서양의 인식론차이

Wilhelm은 동양과 서양, 구체적으로 중국과 독일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서로 다르므로 겉으로 보기에 양자가 서로 대립해(constrast) 있는 모습을 띠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Wilhelm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사물이 존재하는 이치를 기계적(mechanic)인 인식방법으로 파악하는 반면에 중국에서는 이것을 유기적(organic)인 인식방법으로 파악한다. 기계적 인식은 사건과 사실의 원인(cause)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또 그 결과(effect)를 논하면서 양자 사이에 서로 어떤 관련(compound)이 있는지 따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과법칙(causality)에 기초한 인식체계가 서양에는 아주 익숙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물인식은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 정적(靜的, statistical)으로 마감된다.

그 까닭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에는 존재하는 원인이 있으므로 그 결과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이미 성립되어 있고, 그러한 논리 속에는 고정관념(fixed idea)이 박혀 있으며 또 이 고정관념은 사물의 존재양식을 고정된(motionless) 물체로 파악케 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전하거나 쇠퇴해 가는 움직임이 늘 있건만, 이것을 바라보는 서양 사람의 눈에는 그것의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세운 인과법칙의 논리 속으로 사물을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중국에서는 사물이 성장하고 발달하며 쇠약해지고 소멸하는 존재현상을 파악하면서 이른바 유기적으로 사물의 존재를 파악한다.

이렇게 파악되는 사물은 가만히 정체되어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며 변화하여 새로운 형체를 갖게 되는 존재로 인식된다. 따라서 서양에서와 달리 중국에서는 인과법칙을 근거로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려는 기계적 인식론이 없으며, 이 곳에서는 존재하는 사물 속에 이미 현존(Dasein)해 있는 “현실태”(現實態, Entelechie)에 따라 그 존재를 파악하고자 한다.  예컨대, 사과나무의 자람을 살펴보자면. 나무의 성장은 ‘공간적’으로 땅을 넓게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키가 자라고 줄기가 굵어진다. 사과나무의 씨가 싹 트고 자라서, 줄기로 자라면, 그 줄기가 나무로 자라면서 수 많은 곁가지가 뻗어 나오며, 나무가 다 자라게 되면 수 백 개 수 천 개의 사과 열매가 맺힌다. 그리고 이 사과 속에는 씨앗이 들어 있다.  이 씨앗들이 땅 속에 묻히면, 이것들이 또 다시 싹이 트고 자라게 된다.  이렇게 생명체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열매 맺고 그리고 열매 속에 있던 씨앗이 또 다시 싹 트는데, 이러한 생명의 순환을 파악하면서 그 생명의 생성소멸을 인식하는 것이 유기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방법을 Wilhelm은 중국의 여러 전통사상 속에서 발견하되 특별히 [주역](周易, I-Ging. Buch der Wandlungen)에서 발견하였다. 그는 이 책이야말론 중국의 지혜가 담긴 중국최초의 고전이며 또 이 책의 사상을 기반으로 공자(Konfuzius)와 노자(Lau Dsi)의 사상이 전개되었다고 보았다. 

공자의 사상은 음(minus-pol)과 양(plus-pol)의 궁극적인 조화(harmony)를 추구하였다. 존재하는 만물을 떠 받치고 있는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힘(Sinn)이 발휘되면, 그 힘을 받는 낱낱의 존재는 움직이고 변화한다. 이 변화가 궁극적인 힘에 따라 그 힘이 이끄는 데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그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자람과 성숙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공자는 특별히 자연과 문화사이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즉, 문화는 자연 곧 인간의 본성(Nature of human)을 거슬려서 그 본성을 찌그러뜨리지(distort) 말고 도리어 그 본성을 잘 살려내고(idealize) 정화시켜야(purify) 한다.   이 점에서 공자는 씨족(family, tribe)이 사회의 기초라고 보았다.  가족은 서로 가까운 감성(affection)을 공유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은 지극히 자유롭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부부사이와 자매형제사이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 사랑은 강요를 받아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nature-drive)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움 속에서 궁극적인 힘의 이끔을 느낄 수가 있다.  이 힘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형체(form)를 띄게 되면, 그 형체는 조화를 이룬 가운데서 가정의 질서(order)를 세워주고 보존해 준다. 예컨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과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은 동일하지가 않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고 양육하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반면에, 자녀는 부모의 말씀과 가르침에 순종하며 부모를 사랑한다. 따라서 사랑이 가족의 공통 기반이지만, 가족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사랑의 형체(shape, Gestalt)는 각각 다르다. 다양한 형체들이 공통 기반인 사랑 위에서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자연과 문화의 조화 또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가족문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화에 기초한 것이 부모에 대한 자녀의 효(孝)문화다.  효는 부모의 가르침에 대하여 순종하고 자식된 의무를 행하기에 앞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의 관계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질서를 바탕으로 공자는 국가의 질서에 관하여 설명하였는데, 그는 가족이 확대되어 하나의 국가를 이룬다고 보았다. 이렇게 형성된 국가는 소위 태평천하를 이루고 가정의 질서처럼 임금과 신하가 하나되는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공자와 달리, 노자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자연에게 폭력을 가하는 모든 행위를 악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보았다. 
         
Wilhelm은 이런 식으로 중국의 전통사상을 배우면서 유기체적 인식론을 터득하였다. 그는 인간이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해 왔듯이- 세상만물을 제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고 또 만물을 소유할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생명결합체” (Lebenszusammenhang) 라고 파악하였다.  존재하는 만물은 각자 이 생명결합체에 자기자신을 순응시키고, 이 속에서 자기자신의 자리를 잡으며, 이 위치에서 만족함을 누리면서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삶과 죽음, 태어남과 사망이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 모든 변화가 생명결합체 속에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사망은 더 이상 삶의 끝으로 파악되지 아니하며 또 죽는 순간은 삶과 단절되는 순간이 아니라고 파악된다. 사람은 시간에 따라 태어나고 시간 속에서 살다가 시간에 따라 사망하지만 사람의 영원한 생명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2. 동양과 서양의 상호보완적인 대칭(one another, together completion)

Wilhelm은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동서양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강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동서양의 대립은 하나의 대칭(Symmetry)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공자의 [大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사회의 4 단계 발전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즉, 먼저 자기자신을 잘 갈고 닦고, 이를 통하여 집안을 잘 다스리고, 이를 통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고, 이를 통하여 인류의 평화를 구현한다는 해석이다.  Wilhelm의 생각엔, 이 4 단계의 사회발전 가운데서 서양에서는 첫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가 발전한 반면에 중국에서는 두 번째 단계와 네 번째 단계가 발전하였다고 보았다.  서양에서는 개인 곧 기계적인 인식에 배여 있는 한 개인이 국가(조국Vaterland, 민족Nation, 백성Volk) 속으로 들어와서, 이러한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 질서가 형성되었다. 마치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공동체성이 전혀 없는 개인을 기초로 하여 사회 질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개인이 강하게 강조되면 될수록 상대적으로 가족의식은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래서 현재의 독일 가족은 중국에서처럼 대가족과 씨족단위로 이해되지 않고 개인들이 한 지붕 아래 함께 모여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는 한 개인이 가족 구성원 속에서 그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번은 Wilhelm이 어느 중국인에게 묻기를, “당신이 이 동네에 몇 년 동안 살고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300년 이요”  “아니, 당신의 나이가 300살이 넘었습니까?” “아니오, 내 나이는 40대 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어떻게 이 동네에서 300년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300년 전에 <우리> 조상이 이 동네로 이사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중국에서 한 사람의 개인은 조상부터 현재에 이르는 부모형제자매 등 모든 가족구성원 가운데 하나로서 그 존재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조상과 후손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이러한 가족관계를 서양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하여 Wilhelm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중국에서는 유기체적 가족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반면에 서양에서는 유리파편조각 같은 개인의식과 “국가기계주의”(Staatsmechanismus)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중국과 서양은 생각하는 방식이나 사회구조를 형성함에 있어서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서로 폐쇄적인exclusive 대립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주는one another complement 대칭이다.  이러한 빌헤름의 견해를 바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동,서양 문화의 상호작용이 여러 가지 점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III. 서양문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과 인류의 위기

기계적 인식론에 바탕을 둔 서양문명의 실체를 살펴본 Wilhelm은 이 문명이 다른 대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관찰하였다.  근세 이래로 서양은 기계문명을 발전시켰다.  이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서양에서는 생활의 개선에서부터 인간 내면의식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 사람의 힘이나 짐승의 힘에 의지하던 일상생활이 기계를 이용하게 되었고, 남성이 여성보다 육체적 힘이 세므로 남성중심으로 짜여 있던 생활문화가 이제는 간단한 기계조작으로 여성이 남성과 꼭 같은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의식구조와 남편중심의 부부질서가 무너져 갔다. 

중국은 오랫동안 서양의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고 또 이 세력과 무력으로 맞서 싸웠는데, 20세기에 중국이 서양의 기계문명을 받아들이게 되자 이곳에서 일상생활과 의식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오랫동안 농경문화를 가꾸어 온 중국에서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이 차츰 사라져 가고 기계를 이용하였다.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물질적인 삶이 이전보다 더 풍부하여 졌다. 그러자 특히 젊은이들이 서양의 앞선 기계문명과 물질적인 풍요를 동경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자기네 전통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예컨대, 이들은 전통의상을 입지않고 그 대신에 서양에서 들어온 양복을 입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미국에서 실용주의적이고 유용성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들어오자 점차 중국의 전통의식구조가 쇠퇴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간단하게”(vereinfachen) 또 “쉽게”(erleichtern) 처리하려는 경향이 높아져 갔으며, 이러한 경향이 근대화와 개혁의 이름을 퍼져 나갔다.  중국인들의 인식구조가 점차 서양식 의식에 동화되어서 이들은 기계적인 의식구조에 젖어 들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유기체적 가족질서가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 하였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도 해체되어서 사회의 구성단위가 각 개인으로 분화되어 파편처럼 낱낱이 부서지는 조짐마저 보였다.  서양의 문명이 흘러 들어 오면서 전통문화가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Wilhelm은 이 현상 속에 심각한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서양문명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이미 우려했던 대로- 서양의 제국주의 정책도 함께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의 의식이 토착원주민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면 거의 예외 없이 전통문화가 소멸되어 간 경험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인디안의 전통문화가 백인들에 의해서 사라졌고, 뉴질랜드의 원주민(마오리족)문화가 사라졌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토착원주민의 문화도 사라지기 직전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서양문명이 들어가는 곳에는 어김 없이 원주민이 주변으로 밀려났고, 서양인이 그 땅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고 원주민들은 2등 3등 백성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서양의 문명이 겉으로는 힘이 세고 번창한 것 같으나 실제로는 지금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았다. 이 위기는 제 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온 세계에 잘 알려졌으며,  슈펭글러(Spengler)가 지은 책 [서양의 몰락] (Untergang des Abendlandes)에서 이것을 지적하였다. Wilhelm이 파악한 서양문명의 위기는 그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몰락에 있다. 서양인들은 현재 자신이 쌓아올린 물질문명을 통제할 정신적인 능력과 도덕성을 상실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인들은 자기자신이 만든 무기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전쟁(제 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서로 총을 겨누고 죽고 죽였으니, 도대체 이 문명의 실체가 무엇이며 또 이것이 누구를 위한 문명인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Wilhelm은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서양의 기계문명이 여태껏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발전해 왔는가?”   이 질문은 또한 여태껏 서양의 정신문명을 담당해 왔다고 볼 수 있는 기독교의 책임을 심각하게 묻는 것이었다. 서양문명의 몰락과 함께 기독교 역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해석이 이 질문 속에 담겨 있다. 

Wilhelm이 보기에, 서양문명의 위기와 몰락은 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 대륙의 많은 민족들이 이 문명을 받아들여서 여기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또한 20세기 이래로 이 문명에 상당히 젖어 들고 있으며, 이제는 그 길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따라서 서양문명의 위기는 곧 인류전체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것은 Wilhelm의 심각한 질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서양인들은 기계문명 속에 스며있는 소유의식과 지배의식을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서양인들은 다른 대륙의 여러 종족/민족들을 그들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기계문명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 원시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고, 이에 대응하는 대안을 중국의 전통사상 속에 있는 삶의 지혜, 특별히 인간과 우주에 대한 유기체적 인식이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유기체적 인식은 본래 서양에서도 있었고, 특별히 괴테Goethe의 사상에서 그것이 크게 돋보였는데, 아쉽게도 그 이후로 서양의 인식론은 괴테를 잊어버리고 기계적인 인식체계를 세워 나갔다고 보았다. 

IV. 중국의 전통사상을 통하여 서양이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

Wilhelm에 따르면, 중국의 고전에 있는 유기체적 인식론의 근거는 사랑이다. 노자의 말에 따르면, “나에게는 세 가지 귀중한 보물이 있는데, 이 셋 가운데서 첫 번째가 사랑이고  두 번째는 욕심 없는 넉넉한 만족이며 세 번째도 남보다 앞서 출세하려는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또한 공자의 핵심 사상인바, 그가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그가 사람답게 살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의 사람다움은 유기체적 생명질서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중국 고전의 지혜를 서양이 배우고, 이를 통하여 유리파편조각처럼 흩어져서 존재하는 개인들이 사랑의 띠로 서로 묶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Wilhelm은 또한 중국의 유기체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서양의 자유이해를 수정하고자 하였다. 서양에서 기계적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자유는 –공간적으로- 모든 얽매임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기체적 인식론에 근거한 개인의 자유는 –시간적으로- ‘자기 발전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 발전과 성숙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마치 나무가 자라듯이- 씨앗에 싹이 트고 자라고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 자유는 생명의 운동과 우주운행의 유기체적 질서에 맞추어서 자기완성을 향해 발전해 가는 것과 같다. 이 자유는 기계적으로 항상 앞만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로 물러 서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며, 이 자유의 발걸음은 감성이 없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미움과 사랑이 엇갈리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에로스이다. 남자와 여자는 이러한 에로스 가운데서 하나되는 경험을 하는데, 이것 또한 자유이다. 그래서 여성의 자유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해방되는 것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성과 하나되는 에로스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여기에서는 자기 주장 뿐 만이 아니라 자기절제와 자기부정도 요구되며 이러한 가운데서 두 사람은 함께 느끼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한다, 또한 모든 성공과 실패 그리고 모든 행복과 불행을 함께 나누면서 한 몸을 이루는 자유를 성취해 간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우주운행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자유, 이것이야 말로 서양이 중국의 전통문화로부터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Wilhelm이 생각하기에, 사랑과 생명과 자유는 본래 기독교의 가르침이었으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반복해서 강조해 온 것이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서양은 이 귀중한 유산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Wilhelm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서양은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삶의 지혜를 크게 배워야 하겠으며, 그러나 중국을 애써 본받아 모방할 필요는 전혀 없는데, 그 까닭은 서양이 잃어버린 자기의 전통을 다시 발견하여 그것을 회복함으로써recur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V. 계시와 문화

Wilhelm은 서양이 잃어버린 자기네 유산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성취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자유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자유가 아니고 또 더 이상 자기 절대화를 추구하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절제하고 포기하는 자유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자유가 서양에서뿐 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절실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Wilhelm은 계시와 문화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마치 땅 속에 심겨진 씨앗이 싹트고 자라면서 땅 위로 솟아 오르듯이, 문화의 발전 역시 처음에는 바닥 아래에 숨어 있다가 점점 자라면서 그 모습과 성격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 문화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조건 속에서 계속 자라기도 하고 혹은 환경에 따라 시들고 소멸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치 나무가 흙과 땅을 떠나서 서 있을 수 없듯이, 문화의 성장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어진 환경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만일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필요하다. 오직 계시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인식이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발전된 문화를 통하여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할 수 없다.  서양문화는 물론이거니와 동양의 전통문화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이를 수가 없다. 

오직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계시를 통해서 만이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점을 깨달아 알게 되며, 또 이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영원함에 이른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나서야 가능한데, 하나님인식은 결코 인간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를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계시해주셔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으며, 그분은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셨다. 이 점에 관하여 오늘날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시지만 거기에 매여 있지 않고 초월해 계신다. 성육신 곧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한 Wilhelm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서 태어나시고 유대인들과 더불어 사셨으나 그는 유대에 매여 있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다가가셨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가 당신의 성령으로 지금 온 세계 모든 인류 가운데 거하신다고 보았다. 모든 인류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있다.  

Wilhelm에 따르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자유, 죄악에 얽매여 있는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얻는 자유”,  이 자유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인간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당신의 자유 안에서 주시는 선물이다. 마치 하늘에서 비치는 빛이 어둠 속을 환히 밝히듯이, 그렇게 얻어지는 자유이다. 동서양의 여러 종교인들이 명상이나 수련을 통하여 헛되이 이 자유를 얻으려고 시도한다. 유교에서는 공자를 참된 인간의 표상으로 삼고 있고,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를 참된 선생으로 모시며 따르고자 하지만(문화적 기독교), 이 모든 종교적인 훈련은 한갓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게 되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참된 자유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 자유는 세상 속에 있는 자유가 아니라 세상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세상에 베풀어 주시는 자유이다. 

Wilhelm은 강조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는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우주적인 영역으로 임한다.  이 자유함에 참여한 인간은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이제부터 더 이상 이 세상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는 또한 ‘세상 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한 가운데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기 위함이다.  세상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며 타자를 위해 사는 삶은 세상 한 가운데서 누리는 초월적인 자유이다. 이것은 또한 죽음의 세력 한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VI.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제까지 우리는 중국에서 일한 독일 선교사 Richard Wilhelm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았다. 지금도 칭따오에는 그가 일하던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다. 학교건물, 병원건물,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세워진 파버(Faber)-병원, 그가 살던 집, 그리고 그가 설립한 공자연구소건물에서 그의 선교활동을 돌아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비록 그가 1930년에 세상을 떠났으되, 그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해석한 중국의 고전들은 후학들 사이에서 계속 연구되었고 또 그가 독일에 설립한 중국학연구소는 계속해서 그의 작업을 계승하였으므로, 그의 업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전통문화와 서양 기독교 사이의 상호대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선교사 Wihlelm의 선교활동에서 특이한 점은, 그가 선교현장인 중국 칭따오에서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세례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여타 다른 선교사들에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선교신학은 분명하였다.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의 가르침에 기초해 있는 그의 선교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서양 기독교를 동일하게identify보지 않았다. 그는 양자를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더욱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리가 서양의 기계적 인식론 위에다 그 체계를 세웠고 또한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서양의 제국주의 정책을 대변하고 있는 한, 그는 그러한 기독교를 선교현장에서 전파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Wilhelm에게는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그러나 Wilhelm은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일하였다. 서양 기독교의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사로서 일하였다. 중국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파악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였다.  그는 또한 중국의 전통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그 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서 여러 고전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의 번역작업은 개인적인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서서 서양인들이 이제는 중국의 전통문화에 담긴 삶의 지혜를 잘 배워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교현장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 문화를 ‘배우려는’ 자세는 오늘날 선교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Wilhelm은 서양의 기계적 인식론보다는 중국의 유기체적 인식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전통사상과 문화가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하는데 이를 수는 없다고 보았다. 문화와 계시 사이에는 접촉점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고, 언제 어디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 계시가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시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사랑, 생명, 그리고 자유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나는 곳에는 새로운 인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이 탄생한다. 

끝으로, 우리는 Wilhelm을 통하여 한 가지 과제를 제시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증언한 성경과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이 -서양 기독교라는 다리가 없이-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면서, 동아시아의 전통사상으로 성경에 증언된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개연성을 상정한다.  만일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신학은 복음의 빛 아래에서 상대화(Relativierung)될 것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