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김일성은 자수성가형 민중 영웅”
한홍구 “김일성은 자수성가형 민중 영웅”
  • 정재욱 기자
  • 승인 2015.10.2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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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한홍구(성공회대 교수)만 모르는 한홍구의 진심

“김일성은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한홍구)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찬반 논쟁이 치열한 가운데 지난 9월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 역사 수업시간에 강의 자료로 상영된 동영상이 새로운 논란을 만들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가 지난해 11월 강연한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는 영상이다.

▲ 10월 27일 오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비상시국 기자회견에 참여해 발언하는 한홍구 교수.

이 강연에서 한홍구 교수는 이승만 정부 시절 박정희 전(前) 대통령이 남로당 가담 혐의로 체포됐다가 수사 책임자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선처로 목숨을 건졌다고 주장하면서, 이때 박 전 대통령이 처형됐으면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다분히 박정희·박근혜 두 명의 전현 대통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더 큰 문제는 현직 고교 교사가 이 영상을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영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한홍구 교수는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의 왜곡 보도”라면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어야 한다’고 말한 바 없다”고 반박했다. 또 보수 언론에서 자신이 김일성을 독립운동가로 찬양하고 대한민국을 부인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과연 한홍구 교수의 해명처럼 언론이 ‘마녀 사냥’을 한 것일까. 다음은 한 교수가 또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강연 발언이다.

“저놈(김창룡)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요. 그런데 그때 죽여도 될 사람을 하나 살려줬어요. 남로당이 한국 군부에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였으니까 그때 기준으로 치면 뭐 죽여도 여러 번 죽였어야 할 자인데 그 자를 만주에서 같이 놀던 놈이라고. 그놈이 잡히니까 ‘김 형 나 좀 살려주쇼’ 그랬더니 이제 살려줬어요.

아 그때 딱 죽여 버렸으면 우리 역사가 조금은 바뀝니다. 대통령이 두 자리는 확실하게 바뀌어요. 박정희니까, 박정희 그때 죽여 버렸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죠. 우리 언니는 태어나기도 전이에요.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살려 줬습니다. 오늘의 박근혜를 있게 한, 오늘의 박근혜가 있기 까지는 뭐 이런 분들의 다 은덕이 있는 거죠.”

▲ 지난 9월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에서 상영돼 물의를 일으킨 한홍구의 강연 영상의 한 장면. 여기서 한홍구 교수는 박정희, 박근혜 두 전현 대통령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 가운데 “그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딱 죽여 버렸으면 우리 역사가 조금은 바뀝니다. 대통령이 두 자리 (박정희·박근혜)는 확실하게 바뀌어요”라는 내용을 일부 언론에서 “한홍구가 ‘박정희 죽였어야’ 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물론 한 교수의 발언은 희망이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단순한 가정일 뿐이니, 그가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럼 한 교수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청중을 상대로 박정희·박근혜 대통령을 저주하는 게 한홍구 교수의 본심이라면, 이 정도 표현으로도 그 의도는 충분히 성공했을 것이다.

김일성 찬양과 ‘김일성 박사’ 사이의 애매한 줄타기

흥미로운 점은 한홍구 교수가 이런 줄타기 식의 애매한 화법을 전부터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자신이 김일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김일성 박사’일 뿐, 그를 찬양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그가 미국 워싱턴주립대학에서 김일성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맞다.

사실 한 교수는 김일성뿐만 아니라 박정희 전문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과 북한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한 교수가 어느 정도 전문가인지는 그가 2003년부터 펴낸 저서 <대한민국사(史)>(전4권) 목차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김일성]
‘20세기형 민족주의자, 김일성’(민족의 태양일 수는 없었지만 형제들의 수령이었음은 인정해야) ‘김일성 가짜 설 누가 퍼뜨렸나’ ‘김일성을 영웅으로 만든 보천보 전투’ ‘가랑잎으로 압록강을 건너시고(식민지 조선을 강타한 김일성 전설)’
[박정희]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동네 보스, 왕 보스에 투덜대다(박정희와 한미관계)’ ‘(박정희) 독재정권이 (일본보다) 더 악랄했다’ ‘유신권력에 피 맛을 알려준 최종길 교수 사건’
[대한민국]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고문치사로 본 친일과 군사독재의 계보)’ ‘우리는 무덤위에 서 있다(민간인 학살, 그 죽이는 이야기)’ ‘학살은 학살을 낳고(베트남 전쟁 참전)’ ‘이승만과 우익청년 테러집단의 국민방위군 학살 사건’ ‘주미대사도 외면한, 아아, 노근리(그날의 끔찍한 학살)’

김일성 박사이면서 동시에 박정희 박사인 그는 이 두 인물의 각각 한 쪽 면만을 본다. 그의 시선은 김일성에 대해선 항일(抗日) 미담으로, 박정희에겐 독재로만 향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김일성 찬양론자인가, 아닌가. <대한민국사>의 본문을 보자.

“김일성은 자수성가한 전형적인 민중 영웅이었지.… 해방이 되고 김일성이 나타났다. 그것은 죽은 줄 알았던 홍길동이나 홍경래, 또는 로빈 후드의 귀환이었다.”(3권 p.260)
“그는 분명히 혁명의 창건자로서 위치를 누릴 수 있었다. 이는 스탈린이나 덩샤오핑도 넘볼 수 없는, 한 나라에서 오직 한 명의 혁명가만이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3권 p.261)
“그는 누구보다 부국강병에 기초한 근대화를 추구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3권 p.264)

한홍구 교수에게는 김일성에 대한 이런 평가가 찬양이나 미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는 여기에 비판적인 평가도 한두 줄 덧붙임으로써 물 타기를 시도한다.

“또 그 주된 원인을 설사 미국 탓으로 돌린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이북의 경제난과 인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3권 p.259)
“어버이 수령이라는 봉건적으로 보이는 권위로 무장한 그는 분명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좋아할 수 있는 유형의 지도자는 아니다.”(3권 p.265)

김일성이 세운 나라에는 독립군·빨치산의 꿈이 있다

이어지는 대목은 김일성―박정희―대한민국에 대한 한 교수의 진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김일성이 세운 북한은 항일운동의 연장선이고, 대한민국은 그들을 억압하던 친일파가 장악한 국가였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야 한다.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깎아내리는 일만큼은 용인돼서는 안 된다. … 영하 40도가 되는 추위의 밀림 속에서 밤을 지낸 투사들을 모욕하게 할 수는 없다.”(3권 p.259)
“나중에 비록 왜곡됐을지언정, 그가 세운 나라에는 분명 동학 농민군의 꿈과, 의병과 독립군의 꿈과, 항일 빨치산의 꿈이 담겨 있었다. 그가 세운 나라는 어린 누이가 빚에 팔려 첩살이 가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이 당 간부가 되고, 장군이 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그런 나라였다.”(3권 p.266)

6·25 전쟁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마치 항일 세력과 친일 세력 간에 벌어졌고, 남한이 북한이나 김일성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또 민간인 사상자들이 주로 국군 손에 의해 생겨났다는 식이다.

“(남한의) 친일파들에게 모든 역사는 1950년 6월 25일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이 찾아왔는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처음 군대를 동원한 자가 모두 뒤집어쓰는 그런 게임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사상자들, 특히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이 누구 손에 죽었는가도 상관이 없었다.“(3권 p.259)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는 그는 북한의 독재에는 ‘가족국가’ 운운하며 너그럽다. 항일 운동 경력만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모양이다.

“(북한의 부자간 권력 승계를) 비난만 하다 보면 정치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깨고,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함께 20년가량 북을 다스린 사실을 잊게 된다.”(3권 p.26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거대한 가족국가의 가부장이었던 김일성이 가족국가의 구성원 개개인과 맺은 진한 관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3권 p.260)

한홍구 진심, 너무나 명쾌한 이분법적 역사 인식

이런 역사관은 문제가 된 고등학교 상영 영상에도 담겨 있다. 여기에서 그는 ‘친일 세력→남한 권력’, ‘항일(抗日) 운동→김일성, 북한 정권’, ‘항일 운동→민주화 운동→반미(反美) 운동’의 이분법적 도식을 강조한다. “독립 운동한 사람이 민주화 운동, 노동 운동을 하고, 친일파가 군사 독재 하는 것이다. 역사 흐름은 이처럼 단순하다. 독립 운동한 사람은 (6·25 전쟁) 부역자 처벌로 다 죽었다고 보면 된다”는 게 강연 속 그의 주장이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홍구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1978~1984)를 거쳐 서울대 대학원(1984~1988년)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미국 유학을 떠나 워싱턴주립대에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 독립 전쟁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지지자였던 제임스 팔레 교수였다.

학창 시절 한홍구는 이른바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1987년 6·29 선언 이전에는 남준수라는 가명으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서 발행한 <민중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이 가명은 6·25 전쟁 당시 태백산 일대에서 활동한 빨치산 지휘관 남도부(본명 하준수)의 가명과 본명에서 각각 성과 이름을 따 온 것이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한 교수는 민청련 정책실에서 일하다 민청련 교육위원장을 맡아 민청련 간부들에게 민족해방투쟁사를 가르치는 동시에 대학가 등에서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펼쳤다.

유학 10년 만인 1999년 귀국한 한홍구는 민청련 시절의 동료 이산하 등이 만든 국제민주연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사람이 사람에게> 편집위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그는 ‘김일성 가짜론’을 배척한 ‘진짜 김일성론’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겨레>를 비롯해 각종 좌파매체에 한국 현대사와 현실 문제를 접목시키는 글들을 활발하게 기고했다.

2000년부터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저술 활동 이외에도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이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최근에는 대학, 전교조, 청년단체, 지자체 등을 순방하며 그의 역사관과 시국에 대한 강연에 주력하고 있다. 올해 2월 수원에서 열린 ‘유신의 부활, 2015년 민주주의의 길’이라는 강연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과 관련해 “내란은 이석기 의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저질렀다”고 발언했다.

1980년대 ‘북한 바로알기 운동’부터 이어진 한홍구 교수의 일련의 활동은 김일성 알리기, 친일 청산, 통일, 반미(反美), 국가 보안법 폐지, 반전(反戰), 병역 거부 운동 등으로 요약된다.  김일성 박사인 한홍구 교수가 종북(從北)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의 주의 주장이 북한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홍구는 좌파 지식인 역사 인식의 거울

실제로 1980년대 운동권 지도부가 북한이 주장하는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론, 대남혁명 3대 투쟁과제(반미·반독재·통일)에 입각한 강령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핵심 운동권 출신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운동이 반미와 국가보안법 폐지, 북한 알리기 등으로 한홍구 교수도 이를 충실히 수행해 오고 있는 셈이다.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출신의 이동호 본지 편집위원은 “일반 운동권 학생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면서도 “좌익운동권 지도부는 북한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고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 내보내는 대남방송 등을 통해 북한의 투쟁 방침을 철저히 따랐다”고 강조했다. 북한과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순수한 운동권 학생들은 이른바 ‘쓸모 있는 바보(idiot)’였다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이론과 발언의 강도는 여느 좌파 활동가에 뒤지지 않지만, 그 동안 이렇다 할 공안 관련 조직 사건에 연루된 경력은 없다. 이와 관련, 1980년 학생운동 지도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은 그가 외부에 알려진 명성과는 달리 운동권의 조직과 실체에 대해 잘 모르는 위치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항일 독립운동’의 환상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상이나 역사 인식이 일부 좌파 지식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선 고교 교사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한홍구 교수의 강연 동영상을 수업시간에 상영하는 것처럼 학교나 역사학계도 이런 민중사관에 지배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현행 7종 교과서를 만드는 집필자들도 마찬가지라면 어떨까. 다음은 한홍구 교수의 글이다.

“2000년 여름쯤이었던 것 같다. 두어 군데 출판사에서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동안 국사 교과서는 국정으로만 간행됐는데, 2003년부터 실시되는 7차 교육과정부터는 국사 과목은 그대로 국정으로 가지만, 새로이 신설되는 근·현대사 교과서는 검인정으로 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가 거절해서 실제로 그가 한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한 교수에게 그런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려스러운 일이다. 한국사 교과서 집필 참여 제안이 적어도 한홍구 교수와 비슷한 역사관을 보유한 역사학자에게 돌아갔음을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교과서 검정제가 도입된 7차 ‘한국 근·현대사’ 이후 좌편향 된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들이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표현을 수없이 쓰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결코 ‘독재’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심지어 북한 관련 내용에 대한 교육부의 수정 명령을 거부하는 현실이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좌편향 역사 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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