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 금융정책에서 손 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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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5.10.2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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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 외환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동일한 위기에 속수무책…

위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중국 경제의 성장둔화로 대중(對中) 수출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대중 자원수출 의존도가 높은 자원부국 신흥시장국들의 수출이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머지않은 미국의 금리인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영국, 일본, 유로존의 양적 완화 통화정책으로 풀린 돈이 흘러갔던 신흥시장국으로부터 자금이 유출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동안 선진국의 양적 완화로 풀린 천문학적인 자금들은 상대적으로 금리수준이 높은 신흥시장국으로 흘러가 채권투자와 금융기관 대출, 주식투자에 이용됐다. 그 결과 신흥시장국들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비틀거리던 선진국의 부진을 메우면서 세계의 경제 성장을 견인해 왔다.

이제 양적 완화 통화정책을 먼저 단행한 미국과 영국이 성장이 회복되고 고용 사정이 개선되면서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직 미국의 금리인상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강달러를 예상한 글로벌 투자자금들이 미국으로 역류하면서 달러 강세가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선진국에서 흘러온 외화 자금으로 인해 호황을 누리던 신흥시장국들은 외화가 빠져나가면서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 

설상가상 중국마저 성장이 둔화되면서 외국 투자자금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 신흥시장국들은 미국 금리 인상과 중국 성장 둔화라는 원투 펀치를 맞고 있다. 성장의 축이 신흥시장국에서 선진국으로 대이동하면서 위기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위기는 자연재해와는 달리 정책당국의 정책실패로 인한 인재(人災)다. 글로벌 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국가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 가운데 추진하는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내다보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이 공명심으로 과감하게 추진한 정책의 결과는 언제나 위기를 초래한다. 과거의 위기에서 교훈을 배워야 할 때다. 

▲ 1997년 11월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한 사실을 발표하고 있다.

1997년 한국은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를 겪었다. 100만 명이 넘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절반에 가까운 재벌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부실화 된 금융산업을 정상화하기 위해 135조 원의 구제금융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국가재정이 악화됐다. 

1962년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35년 동안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온 국부(國富)를 헐값에 외국 자본에 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금융위기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200억 달러의 급전 대가치고는 너무나 비싼 대가였다. 위기 전 한국의 주요 기업과 은행들은 대부분 한국 정부나 국민들의 소유였지만, 광풍이 지나 간 후 이들 자산의 절반 정도는 외국 자본 소유가 되었다. 

위기의 원인으로 강성노조의 강경투쟁, 급격한 임금인상, 부실대출을 걸러내지 못한 금융기관과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금융정책 등 여러 문제들이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통화, 환율, 자본거래 등 거시경제정책의 에러다. 이러한 거시경제정책 수립과 추진 과정을 통해 위기가 왜 인재(人災)인지 살펴보고 교훈을 찾아보고자 한다. 

준비 안 된 세계화가 초래한 1997년 금융위기 

1997년 금융위기는 과잉 경기부양과 준비 안 된 세계화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1992~93년은 성장률이 9%대에서 5~6%대로 둔화되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영삼 문민정부는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19일, 경기부양을 위해 ‘신경제 100일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박재윤 경제수석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신경제 100일 계획’의 주요 내용은 금리인하, 통화공급 확대, 기업투자지원 등 경제 활성화에 역점이 두어졌다. 

‘신경제 100일 계획’으로 경제 체력을 보강한 다음 본격적인 성장잠재력 제고를 위해 국제화정책을 포함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7월에 발표했다. 그 결과 콜금리는 1992년 말의 13.5%에서 1993년 4~5월 중에는 10.8~11.0% 수준까지 하락했다. 경기부양 정책에 힘입어 성장률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1995~96년 성장률이 9.2~9.6%로 급등하는 등 잠재성장 수준을 넘어서면서 1995년 0.3%를 기록해 균형수준을 유지했던 경상수지/GDP 비율이 1996, 1997년에 -1.0, -1.7%로 악화되고 물가도 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94년 11월 16일 김영삼 대통령은 호주 순방 중에 느닷없이 세계화 정책을 선언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습 선언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정책은 과제연구, 공청회 등 충분한 연구와 여론 수렴을 거쳐 하는 것이 통상적인 수순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해외 순방 중에 전격 발표된 것이다. 

충격적인 세계화 정책 선언으로 정책 당국은 대혼선이 야기되었다. 대통령 귀국 시 세계화 정책 추진 방향에 대한 개요라도 보고해야 하는데, 도대체 세계화란 무엇인가. 이미 추진되고 있는 국제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대외적으로 발표할 때 영문으로는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가 등등 야단법석이었다. 

국제화는 우리의 이익을 지켜나가면서 의식과 제도를 국제사회에 맞춰 나가자는 측면이 강한 반면, 세계화는 세계 속의 주역이 되기 위해 우리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세계화에 대한 경계감도 대두됐다. 

세계화란 무역과 자본시장의 개방, 즉 무역과 자본시장을 선진국 수준으로 개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경제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바람직한 정책이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으로 갑자기 확대된 무역과 자본시장 개방을 감당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이 자본시장 개방을 최대한 늦추면서 한국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고 할 정도다. 

이미 무역은 1980년대 후반 경상수지 흑자를 보이면서 슈퍼 301조를 앞세운 미국의 통상압력 등으로 상당 수준 개방되어 있었다. 환율제도도 1990년 3월부터는 자유변동환율제도에 근접하는 시장평균환율제도를 시행 중이었다. 외국인 직접주식투자도 1992년부터 개방되어 있었다. 

때문에 자본시장 개방을 어느 정도 확대하느냐가 중요 포인트였다. 자본시장 개방을 통해 자본시장을 발전시키고 풍부한 외화유동성을 활용해 성장잠재력을 확충한다는 목표였다. 당시 추진되고 있던 금융자유화, 즉 금융규제 완화와 개방과도 연관이 있는 정책이었고, 1996년에 가입하기로 협상 중이었던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도 염두에 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계화 정책에 따른 자본자유화 폭의 확대는 급속한 자본유입을 초래했다. 1994년에 62억 달러에 불과하던 외국인 순증권투자액이 1995년 117억 달러, 1996년 151억 달러, 1997년 143억 달러로 급증했다. 

설상가상 금융자유화의 일환으로 종합금융회사(종금사)들이 30여 개나 난립했다. 종금사들은 마땅한 사업모델이 없던 차에 이들에게 외화 차입을 허용하자 해외에서 저금리로 돈을 빌려다 국내에 고위험 고금리 대출을 일삼았다. 덕분에 금융기관 차입이 1994년 108억 달러에서 1995년 162억 달러, 1996년 193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러한 자본수지 흑자 급증은 원화가치 절상을 초래했다. 1994년 1월 달러 당 810.48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1997년 2월에는 757.01원까지 하락했다. 당시 엔화는 약세로 반전되고 있었으므로 원/100엔 환율은 1994년 7월 817.05원에서 1997년 2월 704.65원까지 하락했다. 그 결과 평균 20% 증가율을 기록해 오던 한국의 수출증가율은 1996년 하반기에는 -1.3%까지 추락해 1997년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마추어 관료들의 정책 과오

문제는 당시 정부 관료, 청와대 경제팀, 한국은행 등 국제금융을 담당하는 정책 당국은 국제금융정세와 별개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1994년 4월 미국은 금리인상을 시작하고 중국은 위안화를 달러 당 5.8위안에서 8.7위안으로 대폭 평가 절하했다. 일본은 1985년 9월 플라자 회담 이후 지속되어 온 엔화 절상을 종료하고 1995년 6월 달러 당 84.48엔에서 1998년 8월 144.58엔 까지 절하를 시키고 있던 때였다. 즉 미국은 금리 인상, 중국과 일본은 자국 통화를 절하시키면서 수출증가를 꾀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한국은 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외국자본 유입이 급증해 오히려 원화 가치를 절상시키고 있었으니 수출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20% 안팎의 수출 증가율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투자했던 기업들은 과잉 투자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수출하면 할수록 적자가 누적되어 기업부실과 부도가 급증했다. 기업들은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금융부실로 전이되면서 은행들이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국제금융정세를 모른 채 추진되었던 세계화 정책으로 인한 자본시장 개방은 원화가치 절상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995년에 1만 달러 고지에 올라섰다. 하지만 마침내 금융위기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국제금융을 전혀 모른 채 공명심과 출세욕만 가득했던 아마추어 수준의 관료들이 저지른 충격적인 정책과오였다.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섰던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대해 법원은 정책판단 잘못은 형사 처벌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밖의 정책 최고책임자들은 책임은커녕 오히려 영전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애당초 전문성을 따져 자리를 준 것이 아니었기에 잘잘못을 가려 상벌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 모른다. 

이들에게 법률적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도 이들이 저지른 정책상의 과오마저 용서해서는 안 된다. 애꿎은 은행장들만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의 민사배상을 지고 파산하고, 기업가들은 공적자금이라는 국민세금을 사용하게 했다는 이유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고금리 저환율 정책이 초래한 2008년 외화유동성 위기 

2008년 9월 15일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한국에서는 외국인 주식투자자금과 외국 금융기관대출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외화가 모자란 상태가 되기 시작했다. 

국가신용상태를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급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불안해지자 10월에 한국은행은 미국 연준과 300억 달러 통화스왑을 체결해 위기를 모면했다. 만약 한미 통화스왑이 없었으면 또 다시 외환위기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 경제가 위기 국면에 빠진 것은 금리 환율정책 기조가 1997년 위기 이전과 유사하게 고금리 저환율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은행은 2008년 초부터 5.0%를 유지해 오던 기준금리를 리먼브라더스 파산 불과 한 달 전인 8월에 5.25%로 인상했다. 이것은 국제금융 동향에 얼마나 어두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었다. 

미국은 2007년 중반부터 이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해 연준은 2004년 1월부터 인상해 오던 연방기금 금리를 2007년 8월부터 낮추고 있었다. 2007년 7월 5.26%였던 미국 연방기금 금리는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린 2008년 8월에 이미 2%까지 낮췄다. 이 와중에 한국은행은 금리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금리 차이를 노린 외국인 채권투자자금과 외국금융기관대출이 대거 유입됐다. 그 결과 2003년 12월 1192.95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2007년 10월 915.86원까지 하락했다.

그러나 엔화는 2004년 12월 달러 당 103.80엔을 정점으로 상승하기 시작, 2007년 6월에는 122.63엔까지 상승했다. 원/달러 환율은 하락하고 엔/달러 환율은 상승하니 원/100엔 환율은 2004년 1월 1112원에서 2007년 7월에는 755.57원까지 하락했다. 

원/엔 환율이 이처럼 하락하자 주력 수출제품이 일본과 경쟁 관계에 있던 한국 이 무사할 수가 없었다. 20% 대를 유지해 오던 우리나라 수출증가율은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월평균 -19.3%로 추락, 외화유동성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환율 하락으로 대선이 있었던 2007년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돌파했으나 수출 급락으로 기업 부실이 증가하고 외국 자본 유출로 외화유동성 위기를 초래한 점은 정책적 과오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2008년 당시 환율정책을 책임지고 있던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환율론자로 알려진 강만수 전 장관, 금리정책을 책임지는 한국은행 총재는 이성태 전 총재였다. 

다시 반복되는 고금리 저환율 논쟁 

미국 금리 인상을 앞둔 이 시점에 금리와 환율수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최근 중국 위안화 평가절하, 2002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엔저 와중에 한국의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 수준, 2002년 중반 이후 엔화에 대해 55%나 절상되고 있는 원화 고평가 추세와 그에 따른 수출급락과 수출기업들의 부실증가 문제는 예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기업부실이 증가해 구조조정 문제가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점도 역사의 반복을 보는 듯하다. 

수출급락과 수익악화로 기업들은 쓰러지고 있는데 국제금융 동향이나 국제금융 외교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책당국의 정책 스탠스도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제는 정부 관료들도 과거와는 달리 공부도 많이 하고, 한국은행 수준도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번의 위기를 불러와 국민들을 도탄으로 몰아넣었던 비슷한 문제들이 재연되고 있어 안타깝다. 

이제 비전문가는 정책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규모도 커지고 복잡다단해진 한국경제를 이끌어 가는 데는 프로페셔널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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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2015-11-22 19:46:16
누가 프로페셔널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