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투쟁
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투쟁
  • 미래한국
  • 승인 2015.11.04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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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한국사 교과서 논쟁의 본질

한국사 교과서 논쟁은 마성화된 민족주의 권력으로부터 우리의 자유이성을 해방하는 종교전쟁

교과서 논쟁이 벌어진 지난 12년간 국사학계는 어떠한 수준의 개방적이거나 창조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을 가능케 할 이념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국사학계가 공유하는 이념은 민족·민주혁명 이론, 흔히 말해 민중사관이다.

▲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03년에 보급된 금성사판 근·현대사 교과서가 “미국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장애가 되었다”든가, “통일을 바라는 국민의 열망을 짓밟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의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시행되었다”고 한 것은 이 같은 역사관에 입각해서다. 

건국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를 친일·친미·독재세력과 민족·민중·민주세력의 투쟁과정으로 그린 것도, 4·19를 민족·민주혁명의 출발로 미화한 것도, 지난 세대의 위대한 사회경제적 성취를 반(反)민중·기득권 세력의 잔치였을 뿐이라고 폄하한 것도, 지난 12년간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현행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개선이라고 하나 편언절구 수준의 눈가림에 불과한 것도, 이 같은 역사관에 의해서다. 

193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정립한 민족·민주혁명 이론은, 나라에 따라 신민주주의 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다양하게 불렸던 공산혁명의 이론은, 그것을 실천한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것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건재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고도 경제성장이 불가피하게 그에 걸맞은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성립시켰을 때, 그에 저항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으로 발전한 민중사관 

1988년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드디어 그들의 시대가 열렸다. 민중사관으로 훈련된 젊은 역사가들이 교과서 집필 권력을 취득했다. 2003년 검인정 제도 시행과 더불어 이 문화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왜냐하면 국사학계 내에 민중사관과 경쟁할 다른 역사관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민중사관은 정치 권력으로 발전했다. 민족·민주혁명 이론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 이론은 한국인이면 꿈에도 소원인 민족통일 논리로 훌륭하게 위장했다. ‘우리민족끼리’ ‘민족경제’에 입각한 통일을 이룩하자는 2000년의 6·15 선언은 그 절정이었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 위험한 약속은 너무나 달콤했기에 한동안 온 한국의 지성과 정치를 마비시켰다.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민련)을 위시한 야당 세력은 아직도 그 깊은 유혹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민련의 당 강령은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정신과 헌법적 법통, 4월 혁명·부마(釜馬)민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6월 항쟁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을 계승하고, 경제발전을 위한 국민의 헌신과 노력,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향상을 위한 노력을 존중한다”고 밝히고 있다. 민중사관의 충실한 복사판이다. 

그들은 1948년 8월에 이뤄진 대한민국 건국 사건을 깔아뭉개고 있다. 공산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린 당대 한국인들의 위대한 선택을 부정하고 있다. 1950년 국제 공산세력의 침공을 맞아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100만 호국영령의 희생에 침묵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시장과 기업의 논리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새민련의 당 강령은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소중한 가치로 받드는 다수 국민들이 다시는 이 집단에게 집권의 기회를 베풀지 않을 저주와 같다. 

민족·민주혁명의 민중사관을 대체할 새로운 역사관은 인간 개체의 자유와 독립 이념에 바탕을 둔 자유사관이다. 자유사관에 입각할 때 우리의 역사는 밝고 긍정적으로 재해석된다. 

67년에 달하는 우리의 건국사만이 아니다. 개항(1876) 이후, 나아가 17∼18세기의 역사도 자유사관이 재해석할 대상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정이나 검인정이냐의 논쟁은 한갓 발행제도를 둘러싼 다툼이 아니다. 국사학계가 주장하듯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권력자의 음모는 더욱 아니다. 

▲ 우리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로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언론매체들. 신기하게도 야당 및 좌파 단체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절체절명의 이념전쟁 

우리의 어두웠던 시기에 장차 도래할 민족독립을 위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한 세력을 친일로 모는 것은 원래 공산주의자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휘두른 혁명 전략이었다. 그 전략에 입각하여 모택동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1945년 9월 북한에 독자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의 비밀지령은 광범한 반일 블록의 결성을 전제했다.

1948년 5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은 “이승만과 김성수의 친일 도당을 분쇄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국사학계와 새민련이 그들의 정치적 경쟁자들을 친일로 매도하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그들의 실패한 선배 세대가 구사한 상투적인 언설에 사로잡혀 있음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12년간 자유사관 역시 진화했다. 당초에는 논쟁을 제기한 소수 그룹만의 고군분투였다. 2008년에 집권한 우파 정권은 의도적으로 이 논쟁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했다. 그들은 자유사관에 입각하여 쓰인 대안교과서에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 논쟁 따위는 그들이 상관할 바 아니라는 실용주의를 표방했다. 

따지고 보면 실용주의도 아니었다. 그들은 실용주의 철학이 전제하는 인간형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역사 허무주의에 가까웠다. 집권 한나라당이나 새누리당의 강령에는 지금도 역사가 없다. 그들이 기껏 용기를 발휘하여 자당(自黨)의 역사적 기원을 소급하는 것은 1997년부터이다. 그 이전 49년의 역사를 그들은 해석할 수 없다. 그 역시 일종의 허무주의다. 

그에 비하자면 작금의 사태는 새로운 전개다. 그 단초가 집권자의 혼란스런 선택일 수 있으나, 이 나라가 정체하지 않고 넓고 큰 길로 진보할 것임을 시사하는 새로운 국면이다.

논쟁의 본질은 국정이나 검인정이냐를 둘러싼 제도의 수준에 있지 않다. 자유 이념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학문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즐겨 성명서를 발표하는 획일화된 집단이 다양성의 깃발을 내걸고 있다. 거기에 말려들거나 망설여서는 곤란하다. 

새로운 사태의 본질은 자유사관과 민중사관의 투쟁이다. 우리 역사를 해석할 권병을 누가 장악하는가라는 절체절명의 이념전쟁이다. 마성화된 민족주의 권력으로부터 우리의 자유이성을 해방하는 종교전쟁이기도 하다.

아마도 장기에 뻗칠 이 전쟁에서 자유사관의 애국진영은 승리할 것이다. 인간 개체의 자유와 독립 이념이 아스라하게 사라진 부족주의와 그 현대판인 민족주의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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