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세대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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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5.11.06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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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찬구의 스포츠 세상만사] 영웅의 등장과 사회적 동기구조

성공 모델을 바라보며 역경을 이길 힘을 얻고, 성공을 위한 투자와 지원이 따른다. 강력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훈련의 양, 더 나은 코칭 추구… 

칠레에서 열리고 있는 FIFA U17(Under 17·17세 이하) 월드컵에서의 대한민국 소년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우리 대표팀은 예선에서 브라질을 1:0으로 꺾어 파란을 일으켰고, 이어서 기니를 1:0으로 이기고, 축구 종가 잉글랜드와 0:0으로 비겨 무패로 16강에 올랐다. 

▲ 심찬구 스포티즌 대표·미래한국 편집위원

비록 16강전에서 벨기에에 0:2로 패해 8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경기 결과뿐만 아니라 이들이 보여준 ‘실력’ 또한 전 세대의 그것과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이어서 더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일찍이 FC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으로 유학, 주목 받던 이승우가 대표적인 선수이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그뿐 아니라 제2, 제3의 이승우들이 무서운 또래집단을 이루고 성장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언론에서 드디어 ‘박지성 키즈’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 세대는 어디서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2000년대 후반, 한 덴마크인 사회학자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다. 스포츠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는 그는 “왜 한국의 여자 골프에 세계적인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한창 KLPGA는 물론, LPGA에서도 한국 여자 골퍼들의 ‘싹쓸이’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국 여자 골퍼들의 활약과 소위 ‘세리 키즈’의 등장은 골프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이야기 주제였다. 

여기에 흔히 등장하는 대답은 한국인은 젓가락을 많이 써서 손재주가 좋다, 혹은 한국 여자들의 은근과 끈기, 그리고 한(恨)의 정신으로 멘탈이 뛰어나다 등등의 설명이 뒤따랐다. 이렇다 할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던 나도 역시 흔히 ‘세계에서 한국인과 유대인이 제일 머리가 좋다’라고 근거 없이 얘기하듯 ‘한국인의 손재주? 혹은 한국 여인들의 우수성?’ 등 애매한 토론을 이어나갔다. 

한국이 세계 여자골프를 휩쓰는 이유 

그는 반문했다. 그렇다면 유럽이나 미국의 신장이 180cm에 가까운 선수들이 뿜어내는 장타는 골프에 있어 결정적 장점 아니냐? 그리고 그들의 멘탈이 한국 여자들보다 약하다는 증거가 있느냐? 같이 젓가락을 쓰는 일본 여자선수들보다도 한국 선수들이 더 뛰어난 이유는 뭐냐 등등…. 

그는 사실 어떤 나라 혹은 사회가 특정 스포츠에 강한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책을 쓰고 있던 중, 한국의 여자 골프선수 세대의 등장을 하나의 케이스로 연구하고자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가 사례로 삼고 있는 다른 케이스들은 케냐의 중장거리 육상,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알파인 스키, 브라질의 축구,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크로스컨트리 스키, 중국의 탁구, 네덜란드의 스피드 스케이팅 등이었다. 

그가 잠정 결론으로 가지고 있는 스토리는 연구 대상 국가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이 특정 시기에 해당 스포츠에서 큰 성공을 거둬 부와 명예를 걸머쥔 영웅이 등장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성공을 보고 약 10년 아래 세대의 많은 어린이들이 그 스포츠를 시작하게 된다. 

스포츠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 열정, 자원의 투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난관을 맞는다. 그러나 성공 모델을 바라보면서 이걸 이길 힘을 얻는다. 여기에 따르는 투자를 하고 역경을 이겨내게 만드는 부모의 지원이 따른다. 많은 수가 경쟁을 하게 되기 때문에 경쟁의 레벨이 높다. 높은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의 양, 더 나은 코칭을 추구하게 된다. 

세리 키즈의 등장 

1977년생인 박세리가 US 오픈에서 우승한 것이 1998년이었다. 해저드 언저리에 간신히 걸친 공을 양말까지 벗은 두 발을 물속에 넣고 스윙, 그린에 올려 일군 극적인 우승 스토리는 당시 외환위기에 신음하던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파가 뭔지, 버디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도 골프에 대해 알게 됐고, 한국의 골프와 골프산업은 박세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그녀의 우승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이 우승과 뒤이은 박세리의 승승장구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소녀들과 그들의 부모가 골프선수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이렇게 등장한 세대가 ‘세리 키즈’다. 최나연, 신지애, 김인경, 김하늘, 박인비, 이보미, 안선주, 박희영, 김송희 등등 세계 여자 골프의 정상을 차례로 점령한 화려한 이름들이 1987~88년생들이다.

열 살 안팎의 소녀들이 대거 골프를 시작, 높은 경쟁 수준을 유지하며 치열한 노력을 통해 탁월한 동년배 엘리트 집단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들의 우승 인터뷰에는 흔히 ‘세리 언니를 보고 꿈을 키웠어요’라는 멘트가 나오곤 했다. 

10여 년 간 옆에서 지켜보고 많은 케이스를 경험했지만, 딸을 골프선수로 키워내는 일은 정말 힘들다. 일단 클럽을 혼자서 가지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차로 부모 중 한 사람이 연습장, 필드, 피트니스, 용품회사 등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의 ‘골프 대디(Golf Daddy)’ 열정은 유명하다. 실제로 특정 시점에서 직업을 포기하고 전업 골프 대디로 나선 아버지들도 상당수 많다. 

▲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듯이 축구에서 박지성 이후 손흥민, 기성용 등 세계 수준의 신예 스타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승우 등이 활약한 축구 청소년 대표팀도 대표적인 ‘박지성 키드’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성공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열심히 연습하는 것은 기본이고, 좋은 코치 만나기, 시합에서의 운, 성장 과정에서의 심리적 발달, 프로 데뷔 과정에서 선택의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 넘어 산이다. 

약 10년 가까이 이 과정을 견뎌내고 투자해야 비로소 과실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마치 등불처럼 다시금 일어서게 해 주는 존재가 ‘영웅’의 존재다. 

또래 집단이 열정을 가지고 한꺼번에 많이 경쟁을 시작한다는 것은 경쟁의 레벨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눈높이를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이 연습하고, 과학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2008년 KLPGA와 LET(유럽여자투어)가 공동으로 인증(co-sanction)하는 대회를 만든 적이 있다.

양 투어의 선수가 60명씩 출전하는 형태인데, 당시 제주를 방문했던 유럽 선수들이 5~6시간에 걸친 피를 말리는 시합 이후 한국 선수들이 다시 퍼팅 연습 한 시간,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샷 연습 두 시간을 하는 것을 보고 기가 질려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유전적 요소와 사회적 동기 

2015년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3대 투어로 성장했으며, 세계 탑 랭커의 절반 이상을 한국계가 차지하고 있다. KLPGA 한 시즌 동안 50등 안에 들면 수령 상금액만 1억 원을 상회하고, 400개가 넘는 골프장과 그를 꾸준히 이용하는 충성도 높은 골프 인구로 대변되는 골프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박세리라는 롤 모델을 보고 경쟁에 뛰어든 소녀들, 20대 후반이 된 그녀들의 뒤를 이어 더 크게 성장하고 있는 후배들이 바친 노력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주어지고 있다. 

어떤 스포츠에 있어 뛰어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요건은 유전적 요소일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키가 크면 농구, 달리기가 빠르면 축구선수를 하란 말을 흔히 듣고 자란다. 실제로 유전적 요소는 특정 국가나 사회에서 특정 스포츠를 압도적으로 잘하는 선수들을 다수 배출해 내기도 한다. 

우사인 볼트로 유명한 자메이카는 약 300만 명밖에 안 되는 인구에서 연이어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는 단거리 육상 선수들을 배출해 냈다. 과학자들은 자메이카 선수들에게 속근의 발달과 작용에 있어 특별한 유전자(ACTN3 gene)가 발달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맨발의 아베베’를 시작으로 올림픽 및 각급 국제육상대회에서 중장거리를 휩쓸고 있는 케냐와 에티오피아의 중장거리 육상과 마라톤 선수들의 체형 역시 열을 잘 배출해 내는 신체 구조와 얇고 긴, 특히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종아리를 가지고 있어 먼 거리를 오래 달리기에 효율적인 체형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과학자들이 또 하나 알아낸 사실은 세계육상대회와 올림픽 단거리 종목의 시상대를 독차지하고 있는 자메이카 육상선수들의 조상이 서아프리카에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서아프리카의 사촌들은 절대 못 내고 있는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를 보면 반드시 유전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유전자가 필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나 충분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자메이카의 소년들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길이 ‘빨리 달리는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점이라는 사회적 동기다.

그 능력을 가진 소년들은 미국 대학으로 장학금을 받고 진학을 할 기회도 생기고, 우사인 볼트와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보상은 자메이카에서 다른 선택을 했을 때 거의 얻기 어려운 수준의 것이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뛰어 마라톤에서 우승한 아베베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우승한다. 이번에는 푸마에서 스폰서로 제공한 신발을 신고 뛰어 더 이상 ‘맨발의 아베베’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없었다. 놀라운 것은 1960년 그가 마라톤을 우승했을 때, ‘흑인은 마라톤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이 육상계의 고정관념이었다. 

‘오대영’ 감독의 마법 

한국 여자 골프의 사회학적 배경을 연구하러 왔던 덴마크 사회학자의 표현을 빌리면, 케냐의 청소년들은 장래가 ‘농부와 육상선수’로 나뉜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케냐의 장거리 육상 영웅들의 영향으로 두 나라의 많은 소년들은 꿈을 꾸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사인 볼트가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뉴욕에서 태어났다면 농구나 미식축구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그가 유럽이나 아이보리코스트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꿈대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9번을 달고 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보리코스트의 소년들은 케냐의 소년들이 장거리 육상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한 테스트에 합격하는 것을 오매불망하듯이, 그들의 ‘신(神)’인 드록바의 뒤를 잇기 위해 축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을 꿈꾼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정부, 특히 스포츠 당국에서는 빙상과 설상 종목에서 메달을 따낼 수 있는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좋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이 나왔지만 네덜란드의 현실을 알면 우리가 스피드 스케이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 아래 있는 네덜란드는 운하와 수로가 발달했고, 이들이 겨울이 되면 얼어붙는다. 네덜란드 국민들은 이동수단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특히 어린이들은 겨울이 되면 무조건 스케이트를 탄다. 1년에 한 번 운하가 얼어붙어 거대한 천연 아이스링크가 생겨나는 시기, 프로선수에서부터 일반인까지 엄청난 사람들이 참가하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FA컵과 같은 대회가 열린다. 

이런 배경에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스케이터가 프로가 되면 국민적 영웅이 되고, 그에 걸맞는 부와 명예가 주어진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알파인 스키 선수들이나 스칸디나비아의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들도 자연환경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달한 스포츠 종목과, 그것이 이루고 있는 사회적 환경과 동기구조, 그것을 촉발시킨 어느 시점에서의 롤 모델로서의 영웅의 존재에 의해 해당 종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이루고 있다. 

이런 스포츠 사회학적 현실을 놓고 보면 충분한 하부체계를 갖춘 선순환적 사회적 동기구조 없이 메달을 목적으로 좁고 깊게 노력하고 있는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 패러다임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2002 월드컵을 앞둔 시점, 아직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유럽인일 것이 분명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별명이 ‘오대영’이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의 모국 네덜란드와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우리가 5:0으로 패배하며 얻은 치욕적인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를 탓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 당시 우리나라 축구는 유럽 축구에 대해 공포에 가까운 심리가 있었다. 차범근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유럽 무대에서 제대로 활약, 경험해 본 선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오대영’ 감독이 마법을 부려 2002년 4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고, 박지성을 필두로 우리 선수들이 앞다퉈 유럽무대로 진출했다. 그 때 전 국민에게 남긴 강렬했던 자극과 뒤를 이은 박지성의 성공 스토리는 소년들과 그 부모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2002 월드컵 유치의 전제조건이었던 프로리그 활성화와 팀 창단, 인프라 구축 등은 월드컵 주최의 유산으로 남아 사회적 환경을 구성했다. 경쟁 수준의 상승으로 인해 코칭과 훈련 방법에 있어 새로운 방법론이 요구되었고, 이것이 그 전 세대와 전혀 다른 선수들을 키워내는 소프트웨어 자산으로 작용했다. 

지성 키즈의 가능성 

아무도 꿈도 꾸지 못했던 유럽 무대에서 마음껏 활약하는 박지성의 모습은 소년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고, 꿈을 꾸게 만들었고, 또 매일매일 이어지는 힘든 훈련을 이겨 낼 동기를 부여했다.

199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구자철, 지동원, 기성용, 이청용, 남태희, 손흥민, 석현준, 이재성, 김진수, 황의조 등 지금 한국 성인 축구 국가대표의 주축을 이루고 유럽 리그에서 겁 없이 활약하고 있는 세대가 바로 2002년의 소년들이다. 

‘세리 키즈’가 박세리를 보며 꿈을 키우고 인고했듯이, ‘지성 키즈’ 역시 박지성의 그림자를 좇아 하루하루를 보내고 과제를 극복해 냈다. 축구에서도 ‘지성 키즈’를 훌쩍 넘어서는 무서운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것을 몇 년 전부터 관찰했다.

마치 골프에서의 이러한 변화가 산업을 견인하듯이 축구산업도 이에 따라 급성장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산업의 성장은 또 다시 꿈꾸는 소년들에게 보상기제를 제공하는 사회적 동기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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