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두 정당, 노동당과 장마당
북한의 두 정당, 노동당과 장마당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11.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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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北中 경협의 현장, 단둥(丹東) 탐방기

10월 중순의 압록강엔 이미 초겨울 바람이 불어왔다.    

오리 머리의 색을 닮아 그렇게 푸르다는 압록(鴨綠)의 물이라지만, 신의주 강변의 언덕에서 번져오는 짙은 단풍의 빛깔은 압록강의 물색도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불과 30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거리에 북한 땅이 있었다. 

단둥(丹東)에서 일행을 태운 배는 압록강변의 신의주 언덕들을 오른쪽에 두고 천천히 나아갔다. 낡을 대로 낡은 북한의 농가들이 차마 쓰러지지도 못한 채,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안으로 자전거들이 드나들었다. 

▲ 단둥시 압록강 철교.

“쯧쯧…, 사람이 살기는 사는 모양이군.” 

일행 중 누군가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일손이 없었는지, 강변 언덕의 옥수수 밭에서는 옥수수들이 수확도 안 된 채 말라가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북한 초소 주변에 북한 경비병들이 나타났다. 우리를 보며 짝 다리를 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 강에 뛰어 들어 헤엄치면 몇 분 안에 넘어갈 수 있는 거리건만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강변의 언덕 숲들로부터 이따금씩 희미한 오솔길들이 내려와 강에서 끊겼다. 

배가 상류로 올라가자, 끊어진 압록강 철교가 눈에 들어 왔다. 녹이 슨 철교는 압록강 중간에서 끊어졌다. 6·25 당시 폭파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국은 2011년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를 개설했다. 하지만 물동량은 미미한 실정이다. 

해가 넘어가고 강물 색이 검어질 무렵, 북한 쪽에서 경비정이 나타나 우리가 탄 배로 다가왔다. 더 이상 진전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우리는 뱃머리를 돌려 다시 강을 타고 내려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다. 완전히 어둠이 깔린 상태에서 중국 단둥지역에는 가로등과 건물들에 불빛들이 환하게 켜지기 시작했지만, 신의주 쪽에 있던 농가들과 건물들에서는 빛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끔 지나가는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제외하면 극과 극의 대조였다. 

▲ 6·25로 끊어진 압록강 철교.

압록강에 부는 붉은 자본주의 바람 

지난 10월 17일, 단둥에서는 조중(朝中)무역박람회가 열렸다. 개막식에는 빙즈강(志剛) 랴오닝성(遼寧) 부성장을 비롯해 류훙차이(劉洪才) 주(駐)북한 중국대사, 홍길남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광훈 선양주재 조선총영사, 최은복 재중조선인총연합회 의장 등이 총출동했다. 

이날 박람회는 이전과는 달리 북한의 기대가 컸다.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신경제정책에 따라, 동북3성과 북한을 연계한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한 터였고, 박람회 직전 중국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과 북한 김정은이 회담하여 경제면에서 실무적 협력 강화를 다짐했기 때문이다. 단둥시는 박람회에 맞춰 국경 주변의 양국 주민이 상품을 무관세로 교환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이른바 ‘호시(互市)무역구’도 개설했다. 

개막식은 성대하게 열렸고, 박람회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하지만 막상 박람회장에 들어가보니 북한이 내놓은 상품들은 의류나 한약재 등이 거의 전부였고, 장아찌나 된장, 간장과 같은 식품들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제3차 조중 무역박람회 개회식.

정신이 팔려 지나가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도 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메이시(괜찮습니다)”라고 말을 건네 왔다. 바라보니 말쑥하고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아주 스마트하게 생긴 젊은 비즈니스맨이었다. 역시 중국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그의 정장에 달린 북한 배지가 눈에 들어 왔다. 북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저기 세련되고 말끔한 정장 차림의 젊은 비즈니스맨들이 눈에 띄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북한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들은 박람회장의 중국 측 부스를 유심히 살폈다. 북한 외화벌이 무역 관료들이었는데, 대부분이 북한 고위층 자녀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뭔가 돈이 될 만 한 거리를 찾는 듯했다. 놀라운 사실은 북한 내 시장경제가 이제 장마당 수준을 넘어 큰돈을 쥔 ‘전주(錢主)’들이 중국에서 원료를 사들여 북한의 국영공장들을 빌려 생산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북한 국영공장들은 원자재를 구할 수 없어 기계들을 놀리고 있기에 이런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박람회에 나온 북한 부스들은 국영 사업자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장마당을 비롯해 사(私)영업 형태로 자리를 잡은 민간들이었다. 그렇기에 대개 모습들이 꾀죄죄하기는 했지만, 물건을 팔려는 기세와 열정이 우리 남대문시장처럼 대단했다. 

경험 삼아 물건을 한번 사보기로 했다. ‘왕벌젖’이라고 쓰인 벌꿀을 병에 담아 파는 부스에 발걸음을 멈췄다. 벌꿀을 ‘벌젖’이라 부르는 북한의 용어도 기이했지만, 한복을 입고 꿀을 파는 젊은 북한 여성의 지친 모습이 좀 안 되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단둥에서 열린 조중무역 박람회장의 북한 상점 부스.

장마당은 체제 변혁의 신호탄 

하지만 남쪽에서 온 손님과 북쪽에서 온 여성 간에는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하나에 60원(위안)’이라는 벌꿀의 ‘하나’라는 개념은 북한 여성에게는 3병이 하나인 묶음 전체를 의미했고, 남쪽 손님인 내게는 한 병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 하나에 60원이란 말입니다.” 

그녀는 참다못해 병 세 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세트라는 말도, 패키지라는 말도 없으니, 남쪽 손님은 그 하나가 꿀 한 병의 하나인지, 세 병의 한 묶음인지 얼른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세트에 60원이라는 것이지요?” 
“아이 참, 이 하나에 60원이란 말입니다. 하나만 사시겠습니까?” 

우여곡절 소통 끝에 꿀이 담긴 작은 세 병을 ‘하나’로 해서 거래가 성립됐다. 

“같은 민족인데 말 통하기가 참 어렵네요.” 

남쪽 손님의 말에 북한 여성은 수줍게 웃는다. ‘전체는 하나다’라는 북한식 교육 때문은 아니었을까.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단동은 예로부터 복잡한 곳이었다. 거란족, 여진족, 말갈족, 조선족, 위구르족, 몽골족, 한족 등이 얽히고설켜 압록강을 끼고 단둥에서 살아왔다. 고구려 당시 단둥은 안동(安東)이라고 불렸고,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그것은 이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를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중국 동북지방은 이제 중국에 남은 최후의 개발지역이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도 동북3성을 이대로 방치해 두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성 모두 새로운 희망에 분주하다. 그러한 분주함은 북한에도 전파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우리가 한중 FTA를 통해 북한 장마당을 키울 수 있다면, 그것은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사유재산에 대한 각성을 더 높이게 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시장 확산’은 남북 경협처럼 북한 정권이 언제든 착취해 갈 수 있는 국가 원조와는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어찌 보면 북한은 장마당의 확산과 함께 체제 변혁을 겪게 되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빠른 길은 아닐까. 

통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해 볼 때도 되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북한에 장마당과 노동당 두 개의 당이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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