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소련군 기관총에 맞섰다”
“맨주먹으로 소련군 기관총에 맞섰다”
  • 정재욱 기자
  • 승인 2015.11.23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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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증언] 신의주 반소·반공(反蘇·反共) 학생의거 70주년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신의주 학생의거, 교과서에서조차 외면당해

1945년 11월 23일은 평북 신의주에서 남녀 중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소련군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신의주 반소·반공(反蘇反共) 학생의거는 신의주 동중학교·사범학교·공업학교 등 6개 학교 35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소련군과 공산당들의 무차별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으로 사망자 24명, 부상자 350여 명, 투옥자 1000여 명이라는 대규모 희생을 낳았다. 또 사건 후 처형되거나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간 사람도 200여 명이 넘었다. 

▲ 소련군과 김일성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 학생들을 전투기까지 동원하며 무참하게 진압했다. 사진은 1945년 10월 김일성의 평양 공설운동장 연설 장면.
▲ 사진은 1945년 8월 평양에 진입하는 소련군의 모습.

이 사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 유혈 반소·반공(反蘇反共) 운동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소련은 새파란 애송이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 수립을 강행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발생하자 전투기까지 동원해 폭압적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946년 2월 8일, 실질적인 공산 단독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신의주 학생의거 이후 평양, 함경북도 길주, 함경남도 함흥, 황해도 해주 등 북한 전(全) 지역에서 반소·반공 학생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북한에서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신의주 학생의거 참여자들을 색출해 숙청할 정도로 이 학생의거를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신의주 반공의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반소·반공 저항운동이었던 신의주 학생의거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좌(左)편향된 국사학계는 이 운동에 관심이 없고, 이들이 주도한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조형곤 EBS 이사는 “해방 이후 중학생은 상당한 지식인에 속했는데, 이들이 공산주의와 김일성, 소련에 저항하다 희생 당하면서 북한 지역의 학생 및 시민들이 대규모로 월남하여 남한에서 반공 운동에 뛰어들었다”면서 “월남한 청년들이 만든 서북청년단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한 것도 신의주 의거의 영향이 컸다”고 평가했다. 서북청년단은 미군정하에서 좌우익 대립이 극심할 때 활동한 청년단체로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본지(本誌)는 신의주 학생운동 발발 70주년을 앞두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평안북도중앙도민회 주선으로 신주의 학생의거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생존자들을 만나 당시 상황과 의거의 의미를 들어보았다. 

신의주 동중학교 2학년(당시 14세)으로 소련군과 공산당의 기관총 세례에 맞서 맨주먹으로 저항했던 정일병 씨(84세)는 “신의주 학생의거는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순수한 저항운동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북한 주민들은 소련군이 침략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분개했다”면서 “나이는 어렸지만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중학생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목숨 걸고 반소·반공 운동을 했다”고 회고했다. 

생존자들은 신의주 학생의거가 다른 학생 운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소외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다음은 신의주 학생의거 생존자 정일병(84세·당시 신의주 동중 2년)·김용빈(90세·당시 제2공업학교 4년)·박태종(84세·당시 신의주사범학교 1년) 씨와의 대화 내용이다.  

이들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이 참여하는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는 11월 23일 서울 한국자유총연맹에서 70주년 기념행사와 참배식을 진행한다.

▲ 광복 진후인 70년 전 자유를 위해 맨주먹과 돌멩이로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소련군과 맞서 싸운 신의주 학생의거 참가자들. 왼쪽부터 김용빈·정일병·박태종 씨.

소련 전투기, 도망가는 학생들에게 기총 사격 

- 최근의 국민들은 신의주 학생의거에 대해서 거의 모릅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정)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수준의 시위가 아니었습니다. 6개 학교가 3개 조로 나눠 평북 인민위원회, 평북 공산당 본부, 신의주시 보안서(署)를 공격하는 저항운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맨주먹이었지만, 3500여 명이 11월 23일 오후 2시가 되자 동시에 신의주에 있는 공산당의 주요 시설물을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김) “전날 밤 거사를 주도한 신의주학생자치대가 각 학교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공격 계획을 세웠는데, 거기 공산당 첩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소련군과 공산당 보안기관원들이 권총과 소총,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지키고 있다가 발포를 했어요. 우리도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한 겁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길가의 돌멩이가 전부였습니다.” 

- 어린 학생 시위대에 실탄 조준사격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김) “제1조가 돌격한 평북 인민위원회에 배치된 소련군과 공산당원들은 학생들이 접근하자 출입문을 폐쇄하고 옥상에서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했습니다. 제가 속했던 2조는 공산당 본부를 공격해서 건물 3층까지 진입해 소련군과 공산당원의 총과 칼에 투석전으로 맞섰습니다. 하지만 소련군이 대거 증원돼 의거 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어요. 제3조는 신의주시 보안서를 공격하러 가던 도중 소련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 

당시 소련군은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발포를 했을 뿐 아니라, 신의주시 외곽에 있는 보안서로 공격해 들어가는 학생들을 향해 야크(Yak) 전투기를 동원해 기총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겁에 질린 학생들이 흩어졌는데, 소련 전투기는 도망가는 학생들을 향해서도 기총 사격을 가했다고 증언한다. 

(정) “그들은 정말 주저하지 않고 총을 쐈습니다. 우리는 소련군을 포함한 북한 공산당들의 무자비함을 몸소 체험한 것이죠. 옆에서 친구들, 선후배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애국심 하나로 제가 속한 1조의 목표인 평안북도 인민위원회의 담을 넘어 돌진했습니다.” 

- 무섭지 않았나요? 

(박) “왜 안 무서웠겠어요. ‘탕탕’하고 총소리가 들리고 전투기에서 기관총을 쏴대는데요. 선두에 섰던 선배들이 많이 당했어요. 전 하급생이라 후미에 있어서 큰일을 당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2조는 목표인 평북 공산당 본부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했어요. 결국 돌멩이로 총을 이길 수는 없어서 제압당했지만…. 총을 쏴대니 분산해서 도망했는데 많이 잡혀서 구금됐어요. 전 운 좋게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 학생의거 후에 북한 공산당의 반응은 어땠나요? 

(정) “공산당원들이 한동안 주동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해 무고한 학생들을 강제로 끌고 가 고문을 하는 식으로 괴롭혔습니다. 그래도 여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의거가 일어나고 1주일 후에 김일성이 신의주 동중학교에 직접 와서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놓고 회유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대부분 딴 곳을 봤어요. 당 지도부의 뜻이 아니라 하급 관리들이 실수를 했다고 변명했지만, 이미 돌아선 민심을 돌릴 순 없었죠. 그때 보안서와 학교 강당 등에 구금했던 구속자들을 대거 풀어주긴 했습니다.” 

자발적인 의거 

당시 중등교육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 5~6년 동안 공부하는 편제였다. 따라서 이들 중학생들의 연령은 10대 초반부터 조금 늦게 학교에 간 학생은 2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또 대부분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 공부하러 온 유학생 신분이기도 했다. 향후 학교 선생님이나 행정 관리 등을 꿈꾸며 어렵게 공부하던 학생들이 공산당 시설물을 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 나름의 큰 꿈을 갖고 도시로 나와 유학생활을 하다가 왜 위험한 반공 운동을 하게 됐나요. 공부를 계속하면 성공이 보장된 상태였을 텐데요. 

(정) “처음에 소련군이 진주해 올 때 북한 주민들은 일본을 몰아낸 해방자가 온다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그들의 정체는 침략군이었어요. 주민들을 대상으로 살인, 방화, 강간, 재물 탈취 등 만행을 일삼았습니다. 모두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소련군이 오면 일본말로 ‘러시아놈’이라는 의미의 ‘로스케’라고 외쳤어요. 난 고향이 평북 서쪽의 철산이라 신의주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루는 하숙집에도 소련군이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때리고 집기를 가져갔습니다.” 

(박) “난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님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공산당, 특히 소련군들이 너무하는 겁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반공 의식을 갖게 된 거죠. 중요한 것은 누가 시키거나 조종하는 사람이 없었던 자발적인 항거였다는 겁니다.” 
(김) “당시 소련과 김일성 세력은 김일성 주도의 공산 정권을 세우기 위해 연일 각종 궐기대회를 열고 학생과 주민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저항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죠.” 

反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현실 

- 의거 도중에 희생된 친구나 선후배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분이 계신가요. 

(김) “신의주학생자치대본부에서 의거를 주도했던 황신하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시베리아로 끌려간 후 생사를 모르겠어요. 똑똑한 친구였는데, 그 춥고 험한 곳으로 가서 고생을 많이 했을 거예요. 6·25 전쟁 이후 우리 외무부에 의뢰해서 수소문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신의주 의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5년 11월 21일 발생한 용암포 사건이었다. 공산당에 의해 무단 점거된 용암포 수산학교의 반환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을 공산당원들이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1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교회의 한 장로가 현장에서 타살됐다. 신의주학생자치대가 용암포 소련군 사령관에게 항의했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신의주 의거를 감행했다는 게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 신의주 학생의거의 의미를 평가하신다면. 

(정)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민주화 운동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다 희생당한 항거는 신의주 학생의거가 유일할 겁니다. 이제 신의주 의거를 국가적으로 재평가해서 기념식 등을 공식화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4·19 혁명이나 5·18 민주화운동보다 덜 중요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김) “신의주 의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일어난 민족운동으로, 우리나라 반공 투쟁 역사의 첫 장을 연 기폭제입니다. 신의주 학생의거가 서북청년단 등의 애국활동에도 큰 추진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서북청년단의 역할이 컸던 것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신의주 학생의거가 대한민국을 수호한 셈이죠. 저도 서북청년단에 가입했다가 공직(경찰)으로 진출하는 바람에 탈퇴했습니다.” 

-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신의주 학생의거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조작이 아니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박) “그 부분이 안타까워요. 반공 사건은 모두 조작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잖아요. 신의주 학생의거 생존자가 이렇게 살아 있는 데도 말이죠.” 

(김)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신의주 학생의거가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반공의거이기 때문에 일부러 무시하는 거겠죠. 대한민국이 바로서려면 신의주 의거부터 교과서에 실어야 합니다.” 

“북한에서 공산주의 겪고 내 혼(魂) 자체가 반공이 됐다” 

- 세 분 모두 어린 나이에 중요한 경험들을 하셨습니다. 이 학생의거가 그 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정) “전 국군에 입대하여 26사단 포병대대장을 거쳐 북한 정보 수집 임무를 맡고 있던 육군첩보부대(HID) 서부전선의 군단 대대장을 지냈습니다. 평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중학생 시절의 신의주 의거가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실제로 겪은 후 내 혼(魂) 안에 반공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이런 행로를 걸었다고 봅니다.” 

(김) “저는 공업학교에 다녔으니 이공계로 진출해야 하는데, 서북청년단 활동도 하고 국립경찰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경찰에 입문하여 총경까지 하고 통일부에서 일했어요. 사실 전 농업학교에 진학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공업학교에 가면 군에 안가도 된다 해서 진로를 이공계로 바꿨어요. 그랬던 제가 경찰이 되기 위해 일부러 경찰학교에 들어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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