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學’의 탄생
‘정주영學’의 탄생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11.25 09: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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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포커스] 정주영 탄신 100주년

한국을 일군 기업가 정주영, 그의 경영원리와 철학, 도전과 창의력이 ‘정주영학’으로 탄생

지난 11월 23일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는 ‘아산, 그 새로운 울림: 미래를 위한 성찰’이라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주최는 아산재단. 뜬금없이 왜 이런 학술대회가 호화로운 호텔에서 이 어수선한 시기에 열렸을까 의문하는 순간, 눈에 와서 꽂히는 대목이 발견됐다. 아산 정주영 탄신 100주년.

1915년 11월 25일 태어나 2001년 가셨으니 올 11월 25일은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탄신 100년 되는 날이다. 그를 기리기 위한 학술대회 정도는 열어서 그의 삶을 기리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당한 배려다. 왜냐. 오늘날 우리는 정주영이 세운 회사의 차를 타고, 그가 만든 회사가 지은 아파트에서 살며, 그가 만든 회사에서 만든 배를 수출하여 먹고 살아왔다.

▲ 탄생 100주년을 맞는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진전에 전시된 사진. 1980년대 초 한국종합전시장(KOEX)에 전시된 포니2 모델과 선박 모형 앞에 서있는 고 정주영 회장이다.

정주영은 어떤 유형의 기업가였을까. 그의 면모를 2년여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하여 4권의 방대한 연구서로 내놓은 것이 ‘아산, 그 새로운 울림: 미래를 위한 성찰’이란 제목의 책이다. 1권 ‘얼과 꿈’ 2권은 ‘사람과 삶’, 3권 ‘살림과 일’, 4권 ‘나라와 훗날’이란 제목이 달린 이 연구서는 기업가 정주영의 경영활동의 총량을 연구 분석한 끝에 ‘정주영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역작이자 거작(巨作)이다.

이 거작을 내놓기 위해 강대중 서울대 교수, 류석춘 연세대 교수를 비롯한 20여 명의 국내의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2년여 매달렸고, 연구 주제도 다양하고 깊이가 있다. 몇 가지 소개하면 ▲유교와 민족주의-아산의 기업관과 자본주의 정신(류석춘, 유광호) ▲발전국가와 기업-아산의 ‘인정 투쟁’(왕혜숙) ▲상상력의 공간-창업·수성에 나타난 아산정신(전영수) 등.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일”

‘경영학의 구루’로 평가되는 피터 드러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라는 저서에서 한국이 주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힘을 경영자의 헌신, 그리고 기업가 정신에서 찾았다. 이러한 한국적 기업가 정신의 본류에서 광채를 발하는 인물이 정주영이다. 그의 생전에 세계 1등 조선소인 울산 현대조선소 공장에는 이런 구호가 걸려 있었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일이며,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일이다.’

정주영은 젊은 시절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식보다는 돈 벌고 회사 키우는 데 급급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기업이 확장되면서 돈이 아닌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국가 의식이었고, 민족에 대한 자각이었다. 정주영의 국가 의식과 민족에 대한 자각은 자동차산업 참여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정주영은 사업 파트너로 GM 대신 포드를 선택했다. 자본과 경영에 참여하여 일일이 간섭 하는 GM의 합작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기업에 대해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노하우를 가진 세계적 기업이라 해도 경영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포드와 제휴했다.

그러나 포드도 현대차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자 포드와 손을 끊고 독자 모델 승용차를 개발하는 모험의 길로 나선다. 1976년 포니가 나오기까지 현대는 그룹 전체의 존망이 흔들릴 정도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고유 모델 자동차 개발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적나라한 압력에 맞서야 했다.

전경련 국제담당 임원으로서 정주영 회장을 보좌했던 박정용은 1977년 5월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가 정주영을 조선호텔로 불러 압력을 넣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자동차 독자개발을 포기해 주시오. 자동차 독자개발을 포기하신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현대를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포드든 GM이든 크라이슬러든 현대가 원하는 조건대로 조립 생산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내수시장은 물론 동남아 시장까지 현대의 몫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중동 건설시장에서도 현대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만일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현대는 앞으로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새 역사를 쓴 사람

이런 직설적인 ‘조언’에 정주영은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님의 제안은 무척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국토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도로는 인체 내의 혈관과 같고 자동차는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같습니다. 도로가 발달하고 자동차가 원활하게 다닐 수 있게 되면 모든 생산과 경제활동 역시 활발하게 돌아가고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이 때문에 좋은 자동차를 싸게 공급하는 것은 인체 내에 좋은 피를 흐르게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제가 자동차 산업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명감 때문입니다.…

제가 건설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한다 해도 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내 후대에 가서라도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을 나는 보람으로 삼을 것입니다.”(박정웅, <이봐, 해봤어?>, FKI미디어, 2002, 15~20쪽).

만약 정주영이 현대차라는 기업의 이윤만 탐하는 기업인이었다면 모험이나 다름없는 고유 모델 승용차 개발을 포기하고 미국 모델을 들여다 조립하여 팔아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고난의 길을 택했다. 당시 정주영이 미국 대사의 협박에 굴복했다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미국에 종속되어 오늘과 같은 위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통역을 담당했던 박정용은 이 날 정주영의 결단이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미래를 결정한 날이었다고 회고한다.

일본경제신문(니혼게이자이)은 한국의 기업가 정신의 특징으로 ①위험 감수성(risk taking) ②무모할 정도의 기발한 아이디어 ③캔 두(can do) 정신 ④톱다운(top down) 시스템 ⑤따라잡기(catch up) 정신을 들었다. 이러한 특징을 압축 상징하는 인물이 정주영이다.

정주영 회장의 기상천외한 창의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불과 3년 만에 모래가 흩날리는 백사장에 조선소를 건설하여 세계를 놀라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할 당시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기가 구상한 공법을 사용하면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하여 재원 조달에 고심하는 박 대통령에게 용기를 주었고, 실제 정주영 방식으로 비용을 크게 절감했다. 서해안 매립공사에서 중고선을 끌어다 마지막 구간을 틀어막는 ‘정주영 공법’도 그의 발상이었다.

정주영의 기발한 창의력

정주영의 창의력과 박정희의 리더십이 합작하여 빛을 발한 대표적인 작품이 소양강댐이다. 일제시대 부전강·장전강 발전소와 수풍발전소를 설계한 구보다 유타카(久保田豊)는 패전 후 일본공영(日本工營)이란 회사를 설립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링 전문기업으로 성장했다.

구보다의 일본공영이 한국에서 건설되는 초대형 소양강댐의 설계를 맡았다. 구보다 회장은 소양강댐을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한 중력댐으로 설계했는데, 일개 시공업자에 불과한 현대건설의 정주영이 이 공법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시멘트, 제철산업이 걸음마 단계여서 중력댐으로 건설하려면 막대한 양의 콘크리트와 철근을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므로 공사비가 엄청났다. 정주영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된 중력댐보다는 소양강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하여 사력(砂礫)댐을 쌓는 것이 안전성도 훨씬 높고 비용도 30%나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갑론을박을 벌이는 와중에 박 대통령은 “댐 건설 방식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본격적인 기술 재검토 끝에 정주영이 주장한 사력댐 방식이 채택되었고, 그 결과 공사비를 30%나 절감했다. 구보다 회장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의견을 제시한 정주영을 찾아가 정중히 예를 표하고 사과했다.

자동차산업도 마찬가지다. 정부 주도론자들은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성공한 것은 정부의 훌륭한 지도와 관료들이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주영이 1975년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인 포니의 개발에 돌입하기 전까지 정부의 지도와 계획은 일종의 도상계획서일 뿐이었다.

정주영은 포니 개발 과정에서 수많은 위험요인을 안고 주요 부품인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을 국산화했다. 이때부터 현대자동차의 국산화율이 해마다 높아졌고 국제 경쟁 규모를 갖추었다. 정주영이 포니와 스텔라를 자체 개발하여 생산에 돌입함으로써 정부의 자동차공업 육성 계획은 실행 단계로 들어가 빛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산업화 성공과 경제성장을 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전문가들은 정부의 역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러다보니 박정희와 동시대의 테크노크라트들이 구국의 영웅처럼 신격화되기에 이르렀고, 박정희와 정부(혹은 관료) 못지않게 기업가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주영에게 조선소를 건설하라고 지명한 것은 박정희와 당시 정부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이 사업계획을 검토하고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건설에 돌입하기 전까지 대통령과 관료들이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세웠어도 그것은 단지 ‘서류상의 도상 계획’에 불과했다. 실제로 사업에 필요한 기술과 인력의 확보, 공장의 입지, 투자자금 동원, 판로 개척, 마케팅 등은 전적으로 기업가 정주영의 몫이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사람

정주영은 미국과 일본의 금융기관에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을 요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일본은 한국이 자신들의 자금과 기술을 빌려 세계 조선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정주영이 자금 동원에 실패한 사실을 청와대에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건 꼭 해야만 하오. 정 회장! 일본, 미국으로 다녔다니 이번에는 구라파로 나가 찾아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빨리 구라파로 뛰어가요.”

정주영은 우여곡절 끝에 유럽 금융기관으로부터 조선소 건설자금 유치에 성공했고, 처음 생산되는 선박을 구입해 줄 선사(船社)도 확보했다. 작업 물량을 미리 확보하여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추진했다. 조선소 먼저 짓고, 그 후에 선박을 건조하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진행했다면 현대는 막대한 이자를 감당할 길이 없어 조선소를 짓다가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현대가 무수한 난관을 돌파하며 조선소와 선박 건조를 동시 추진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제학자이자 경제 사령탑인 태완선 경제부총리가 “현대조선소가 성공하면 내 열 손가락에 불을 붙이고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공개석상에서 발언했다.

그 정도로 대형 조선소 건설은 불가능에 가까운 고난도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정주영은 초대형 조선소는 불가능하다는 체념 대신 현실 가능한 아이디어를 총동원했다.

초대형 선박 건조 경험이 없었던 정주영은 덴마크 조선소 부사장으로 재직했던 세계적인 명성의 조선 전문가를 사장으로 영입했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 우수한 조선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26만 톤급 유조선(VLCC) 건조를 맡겼다. 모든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프로젝트를 이처럼 기발한 방식으로 성공시킨 것은 기업가 정신의 승리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정주영이 사망한 뒤 공개된 그의 방에는 깨끗하게 세탁된 구멍 난 실장갑이 수북했고, 언제 만든 제품인지 알 수 없는 금성 텔레비전, 22년 된 낡은 구두 등이 놓여 있었다. 그는 구두 한 켤레를 사면 뒤축을 갈아가면서 10년 이상 신는 구두쇠였다.

일부 기업들의 무차별적 기업 확장과 부도덕한 이윤추구로 기업 전체가 손가락질 당하면서 급기야 ‘경제 민주화’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혼탁한 기업윤리 실종의 시대에는 창업세대의 기업가들이 주는 교훈이 더 깊고 소중하다. 대한민국을 성공으로 이끌고, 성장신화를 한민족에게 안겨준 기업가들의 빛나는 생애를 갈고 닦는 것은 후대의 몫이다.

우리 사회가 정주영처럼 이 땅에 희망을 준 기업가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아산 정주영 탄신 100주년을 맞아 펴낸 책 <아산, 그 새로운 울림: 미래를 위한 성찰>은 기업가 정주영의 경영철학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정주영학’의 탄생을 알리는 웅장한 서곡임을 기억하자.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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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규 2016-05-21 12:31:40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제 블로그로 옮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