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어느 나라 교사용 지도서인지 두 눈 크게 뜨고 봐야
● “6·25 전쟁을 단순한 북한의 남침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당시의 복합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124쪽)
● “빨갱이의 어원이 partisn이예요. 바로 이들이 끝까지 나치스에 저항했기 때문에 결국 연합군이 승리”(58쪽)
● “(친일파 처벌과 관련하여) 비인도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를 두지 않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임을 주지시킨다”(121쪽)
현재 고등학교에서 채택되어 가르치고 있는 한국사 검정 교과서들의 좌편향적, 친북 민중사관적 내용이 봇물 터지듯 공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교과서들의 교육 방향을 제시하는 교사용 지도서가 더 심각하다는 지적들이 제기되었다. 교사용 지도서란 해당 교과서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교과 내용을 ‘이렇게 가르치라’는 지침을 담은 책이다.
이런 지적들을 확인하기 위해 비상교육의 한국사 교과서의 교사용 지도서를 입수하여 분석해 봤다. 그 결과 수많은 곳에서 문제점들이 발견되었다. 그 분석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근현대사 부분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24~31쪽) 단원의 ‘활동안내’ 목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분열 원인과 과정을 이해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분열의 원인으로 교과서 240쪽 이승만의 청원서(1919. 2. 25), 이승만 불신임안 주문(1925. 3. 11)의 내용을 소개한 다음 ‘자료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여놓았다.
▲ 비상교육의 한국사 교과서 교사용 지도서 표지(左). 오른쪽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라는 장에서 사진을 수업에 활용하라면서 제시한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사진이다. |
자료 01 :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중시하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낸 청원문이다. 이승만과 정한경 등은 즉각적인 독립보다는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것이 미국 내 여론의 주목을 끌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 청원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은 임시정부 내 독립전쟁론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다.”
자료 02 :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정부 자금을 함부로 사용하자 1923년에 탄핵안이 제출되어 의정원에서 통과되었다.”
또 31쪽의 ‘교수·학습 보충자료’에서도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사건은 독립운동가들을 분노하게 하였다. 외교노선에 비판적인 신채호, 박용만 등은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준비회를 열어 이승만을 불신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과 강력한 신정부의 수립을 요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임시정부 분열의 원인’이 이승만이라고 못 박아
이 내용에 의거할 경우 교사들은 임시정부 분열의 원인 제공자는 이승만이라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 분열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돌리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날조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임정은 출범 초부터 투쟁방략에서 온건론과 급진론이 격돌했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정체를 놓고 분열했으며, 기호·관서·함경 출신의 지역적 갈등, 총장과 차장 라인의 세대 차이 등으로 인해 내부적 통일성과 단합성을 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38~41쪽).
게다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기술한 지침서 내용은 역사적 사실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는 이승만·정한경 두 사람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안창호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논의를 거쳐 준비된 것이며,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되었던 김규식도 이승만·정한경의 청원서와 거의 동일한 내용의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미국은 러시아 혁명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일본을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처럼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한국이 자력으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은 당분간 어렵다고 보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국가 독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위임통치 청원서를 작성했다. 안창호는 국민회 중앙총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논의, 승인한 후 승락서를 정한경에게 공문으로 보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무시한 채 위임통치안이 심각한 문제라도 있어 독립운동가들을 격분시켰고, 그 결과 임정이 분열했다는 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유도한 것은 이승만을 폄훼하려고 작정을 하고 역사 서술을 지극히 편협하게 한 것이라고 비판 받아 마땅하다.
더더욱 위험천만한 기술은 ‘4.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운동’(32~39쪽) 부분이다. 이 단원에 대한 ‘지도상의 유의점’ 부분에서 집필자들은 “무장독립전쟁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가장 강력하게 표출한 것임을 설명해 주세요”라고 방향 설정을 해 놓았다.
37쪽에서는 교과서 245쪽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1923)’을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해설이 붙어 있다.
“이 글에서 신채호는 민중을 일깨워 민중 직접혁명을 일으켜야만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민중직접혁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외교론, 문화운동, 준비론 등의 주장은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신채호는 의열투쟁이야말로 혁명의 선구적 역할로 민중을 깨우치는 핵심 수단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등 무정부주의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무장투쟁은 善, 자치론은 惡?
반면에 자치론과 관련해서는 39쪽에 다음과 같이 부정적 시각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일제가 문화통치를 내세우면서 1920년대 중반 이른바 ‘자치론’을 주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이광수는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인의 자치권을 얻자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었던 최린은 우리나라가 금방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조선 의회의 설치 등 적극적인 자치운동을 펴자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자치 운동은 지금 당장 우리 민족이 독립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민족의식을 약화시켜 독립을 더욱 멀어지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설명은 교사들로 하여금 수업시간에 일제하에서 무장독립투쟁이 대단히 중요했고 혁명의 수단으로서 폭력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자치론은 비판적으로 가르치라는 지침이다.
또 하나 문제점은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34쪽)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자치론의 대두가 민족운동에 끼친 영향을 설명해주세요”라면서 수업에서 사회주의를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교사 : 3·1운동 이후 국내의 청년 지식층을 중심으로 확산된 사상은 뭐였지?
학생 : 사회주의 사상이요.
교사 : 그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 :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많이 약화되었어요.
교사 : 그렇지,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공포하여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을 탄압했으니까. 그래서 사회주의 세력 중 일보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의 제휴를 주장했어.”
44쪽 ‘예시 답안’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이 사회운동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자”라는 과제에서 예시 답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3·1운동 이후 사회 각 계층은 민족의 현실에 눈 뜨고 집회 결사의 부분적 자유를 얻으면서 사회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사회운동은 실력양성과 민중계몽운동에서 무산계급 해방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사회주의의 좋은 점만 집중 부각
또 46쪽 ‘식민지 국가들의 사회주의 수용’에서는 식민지 국가에서는 사회주의 수용이 당연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이 교사용 지도서에서는 사회주의가 사상으로서 어떤 한계가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이 무조건 일제 시대에 사회주의 사상이 국내에 확산되었고, 일제가 이를 탄압했다, 사회주의가 민족독립, 식민지 해방투쟁을 앞장서 해 왔으며, 조선공산당도 이런 노선과 방침을 충실히 수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여 볼셰비키 수뇌부가 교체되면서 공산당의 체질이 포악한 1인 독재체제로 변한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세계 혁명을 지향한 이상주의적 단체였던 볼셰비키 당은 1928년경부터 ‘한 나라에서의 사회주의’라는 이념에 따라 전체주의 국가를 지향했다. 경제면에서는 1921년에 실시한 신경제정책(비교적 자유스러운 시장경제체제)을 폐기하여 농업을 집단화하고, 모든 산업을 당이 관리하는 계획경제 체제로 바꿨다. 농업 집단화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살해되었다.
둘째, 전 세계 무산계급의 혁명을 꿈꿨던 볼셰비키는 소련이라는 국가의 영토와 이익을 수호하고 팽창하는 데 주력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자들로 변해 있었다.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처럼 끔찍하고도 파괴적인 변화를 서방 세계의 지식인이나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는 전혀 모른 채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산주의만을 꿈꿨다. 이 교사용 지도서도 사회주의의 끔찍한 변모 과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좋은 점만을 부각시키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빨갱이=정당한 저항자?
40쪽의 ‘주제 5. 사회 각 계층이 추진한 사회 운동’에서는 일제하에서 진행됐던 실력양성운동에 대해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42쪽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에서는 실력양성론에 대한 ‘사회주의 세력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 놓고 있다.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자 사회주의 세력들은 중산계급(부르조아)의 이기적인 계급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이 운동을 통해 실질적 이득을 보는 자는 우리 민족이라기보다는 자본가 계급이라고 비판하였다. 실제로 토산품의 공급 부족과 가격 상승으로 가난한 민중들은 고통을 당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은 인구의 대다수가 문맹 상태인 상황에서 대학보다는 노동자 강습소, 야학 등이 더 필요하다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비판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무장투쟁은 온갖 찬양 일변도로 설명되어 있는 반면 실력양성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은 그 한계, 문제점, 변질, 가난한 대중들에게 고통 가중 등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무장투쟁은 절대선이고 실력양성, 자치론,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을 분열시키고 대중들에게 고통만 준 것으로 이해시키도록 도식화 되어 있다.
심지어 58쪽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에서는 ‘수업 예시’로 빨갱이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라고 예를 들고 있다.
교사 :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사회주의자들을 비하해서 어떻게 불렀지요?
학생 : 빨갱이요.
교수 : 그 빨갱이의 어원이 partisn이예요. 바로 나치스에 저항했던 세력을 말합니다. 이런 비정규 저항군을 프랑스에서는 resistance라고 불렀답니다. 이들이 끝까지 나치스에 저항했기 때문에 결국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예문은 빨갱이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나치스에 끝까지 저항하여 연합군에게 승리를 안겨준 긍정적 의미로 설명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빨치산들이 지리산과 백운산 등 남한 일대에서 양민을 학살하고 식량과 옷가지를 빼앗아 가는 등의 패악질을 저지른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하지 않는다.
김원봉, 김두봉, 무정 등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운동 대대적으로 소개
78쪽 ‘4. 1930년대 민족운동’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84쪽에서는 김원봉을 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 관련 내용, 91쪽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의 주축, 김두봉과 무정’ 이야기,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 등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김원봉, 김두봉, 무정은 북한에서 최고 실세로 권력을 누리며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골수 공산주의자들이다. 반면 미주에서 이승만,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된 외교독립활동과 관련된 내용은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이것은 의도적인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무장항일투쟁 띄우기,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말살하기의 표본이다.
‘8. 냉전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단원에서는 제목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라고 표기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을 실질적으로 부정하고, 6·25의 원인이 ‘남침’이 아니라 ‘남북의 갈등 구조가 결국 전쟁을 야기’했다(98쪽)고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또 단원 개관에서 6·25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의 세계적 대립은 한반도의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는 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남북의 갈등 구조는 결국 전쟁을 유발시켰다.”
6·25를 언급할 때 ‘남침’이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피하여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지,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를 물 타기 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109쪽.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에서는 찬탁, 반탁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반탁 입장은 ‘신탁통치 반대 진영’으로 표기한 반면 찬탁 입장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 지지’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남한 사회에서 찬탁 입장이 수세에 몰리자 소련의 지령에 의해 ‘찬탁’이란 용어를 폐기하고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 지지’로 바꾼 것과 동일한 입장을 수용한 것이다.
이래놓고는 ‘과제 해설’에서 서로 좋은 점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라고 예시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시 답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탁통치기간은 자주적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자연스럽게 조정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기에 신탁통치라는 단어에 매몰되지 않고 임시정부 수립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반면에 우익은 신탁통치 반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제 36년이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외국 세력에 의해 통치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예시 답안은 찬탁 반탁 문제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쪽으로 수업을 유도하라는 지시인 셈이다.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소련이 신탁통치에 찬성한 이유는 5년의 신탁통치 기간을 남한의 공산혁명을 위한 공작기간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심이 반탁으로 확고해지자 좌익 정파들은 ‘신탁통치 지지’ 슬로건을 슬그머니 ‘3상회의 결정 지지’로 바꿨다. 이것이 역사적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교사용 지도서는 신탁통치에 대해 가치중립적인 수업을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남한의 농지개혁 비판
농지개혁은 우리 현대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분배조건이 지주보다는 농민에게 훨씬 유리했다. 농지를 분배받은 소작인은 평년 수확고의 1.5배를 5년에 나눠 현물로 상환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 농지의 92%가 자작농화 했는데, 그 성과는 농지개혁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일본과 타이완의 개혁실적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교사용 지도서 117쪽. 대한민국의 농지개혁 ‘과제 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시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까지 계약직 소작농으로 어렵게 생활해 오던 농민들은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면서 자신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농민들은 5년간 땅값을 나누어 내야 했으므로, 자기 소유의 땅이 생겼다고 당장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 금액을 감당하지 못하면 다시 땅을 처분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토지개혁은 대단히 비판적으로 기술한 반면 120쪽 ‘북한의 토지개혁’에서는 어떠한 비판도 없이 사실 위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빈농과 머슴을 중심으로 지역별로 농촌위원회가 조직되어 일본인, 민족반역자 및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의 땅을 빼앗아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농민들에게 가족 수대로 나누어 주었다.”
121쪽 ‘친일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친일파에 대한 나만의 판결문을 써보자’라는 과제 풀이에서 “참고로 비인도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를 두지 않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임을 주지시킨다”면서 다음과 같은 예시 답안을 내놓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일부 기업가들이나 지식인들의 경우 일제의 압력이 자신들의 생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참여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결국 민족의 독립을 저해하는 활동이었기에 죄가 됨은 분명하다. 특히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바른 길을 모색하기보다 개인의 안녕을 추구했던 이들은 엄벌에 처해야함이 마땅하다.…”
이런 기술은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청산에 비협조적이고 소극적이었고, 친일세력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으며, 처벌은 유명무실했으니 공소시효와 관련 없이 지속적으로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 또 친일파 처벌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결론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라는 뜻이 된다.
122쪽에서는 6·25를 ‘남침’이 아니라 가치중립적인 ‘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교수 학습 지도안’에서도 “김일성이 전쟁을 결심하게 된 근거들에 대해 정리한다”고 기술하고 있을 뿐 남침이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또 124쪽 ‘좋은 수업을 위한 제안’에서 “6·25 전쟁을 단순한 북한의 남침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당시의 복합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라고 제안하고 있고, 125쪽의 ‘활동 응용하기’에서는 “6·25 전쟁의 용어는 외국과 남북한에서 사용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어떻게 부르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조사해 보는 탐구 방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라고 제안하고 있다.
6·25가 남침이 아니라 복합적 배경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127쪽에서는 “당시의 생활 모습을 추론하여 일기로 써보자”면서 다음과 같은 예시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
“몇 발의 총성 소리가 어제 밤에 들리더니 오늘 아침은 적막하다. 거리에 나가보니 국군과 유엔군을 실은 차량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이 모습을 보고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와 태극기를 찾았다. 이내 문에 꽂아 있던 인공기를 떼고 태극기를 꽂았다. 어떤 깃발이 마지막으로 내 집에 걸리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이런 예시 답안은 전쟁을 맞아 조국에 충성하고 애국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남과 북 사이에서 기회주의적 국민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피카소의 학살 그림이 뜻하는 것은?
129쪽에는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피카소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파블로 피카소가 1950년 6·25 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신천 대학살을 소재로 하여 한국전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갑옷을 입은 군인들이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여성과 어린아이를 칼과 총으로 공격하고 있다. 피카소는 이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공포, 인간성 파괴 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신천에서의 대학살’은 10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간 미군이 점령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해리슨이라는 이름의 미군 중위 예하 미군 1개 중대에 의해 신천군 한 군에서만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무려 약 3만5000여 명,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북한 측이 주장하는 사건이다.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가 1951년에 이 그림을 그렸고, 그 후 1년 후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 의해 북한 지역에서 학살 상황에 대한 조사를 하여 신천군 사건과 관련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볼 때 미군이 이런 학살을 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언론이나 학자들은 이 사건이 해방 공간이라는 특수성, 그리고 전쟁이라는 대혼란 속에 격화된 좌우 대립으로 빚어진 비극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북한이 “미국의 소행”이라고 날조하여 주장하는 그림을 실음으로써 미군, 혹은 반공청년단들이 민간인을 학살했음을 은연중에 알리고자 한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
136쪽의 ‘9.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정세의 변화’ 단원에서는 ‘도입사진 수업 활용하기’가 눈에 띈다. 학교 수업시간에 대한민국 발전을 설명하는 시간에 소개하라고 제시해 놓은 사진이 1980년 5월 광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진행된 ‘민주시민 범시민 궐기대회’ 사진이다. 대한민국의 발전이라는 항목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사진을 예시한 것은 이 대목을 민주화에 초점을 맞춰 가르치라는 무언의 요구다.
부정 일변도로만 기술한 베트남 파병
154쪽. ‘베트남으로 파병되는 군인들’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설명하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중 5천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왔다. 또 당시 파병되었던 군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나타난 고엽제 문제, ‘라이 따이한’이라 불리는 베트남의 한인 2세 문제, 그리고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159쪽. ‘3. 산업화와 대중문화의 발달’에서는 산업화를 가르치라는 대목에서 지도상의 유의점에 “경제발전과 산업화로 인한 다양한 변화에 대해 긍정적, 부정적 요소를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세요”라고 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산업화를 설명할 때는 긍정과 부정을 거의 반반씩 지면을 할애하는 반면, 북한과 관련한 내용은 부정적인 내용은 거의 없고 긍정적 서술만 하고 있다.
168쪽. ‘4. 북한의 변화와 통일노력’의 ‘교수 학습 지도안’에서는 지도상의 유의점으로 “북한의 1인 독재체제가 형성되는 과정과 북한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이해시키도록 합니다”라고 해놓고는 말미에 “이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라고 설명을 달아놓았다. 즉 1인 독재체제를 부정적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171쪽.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협력 정책’ 항목은 전체가 긍정적 서술로 구성되었고, 173쪽 ‘김일성 동상’도 긍정적 내용으로만 서술되어 있다. 김일성 동상과 관련하여 지도안은 ‘도움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북한체제는 수령의 사상, 즉 주체사상을 지도 지침으로 혁명과 건설을 수행하며 수령의 사상과 명령, 지시에 따라 전당, 전군, 전민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유일지배체제이다. 유일지배체제는 권력이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령을 중심으로 사회 전체가 일원적으로 재구성 된 체제이다. 김일성 김정일의 절대권력을 정당화시키는 이론들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와 개인숭배를 통해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지도자에게 무조건 충성하고, 주어진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한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에 따라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걸어두도록 하고 주요 도시에는 김일성 동상을 세워두고 주기적으로 참배하도록 하고 있다.”
이 내용을 남한의 지도자 박정희, 이승만, 전두환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교재의 필진들의 사상적 편향성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