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기념 특별기고 2.>
50년만에 접한 형님의 순교 소식
<6.25 기념 특별기고 2.>
50년만에 접한 형님의 순교 소식
  • 미래한국
  • 승인 2002.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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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조 극동방송 고문
▲ 주광조 극동방송 고문
6월이 오면 생각나는 것이 6·25 동란이고, 6·25 동란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6·25 때 순교당한 큰 형 주영진 전도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까 벌써 53년 전이다. 열 일곱…. 한참 꿈이 많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떠날 결심을 했다. 공산당 체제 하에서 사회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져갔고 당시 이념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신앙의 자유가 없는 것만으로도 떠나야 할 이유는 분명했다.그리고 나를 더 못 견디게 했던 것은 배움에 대한 갈증이었다. 당시 반탁시위에 연루되어 중학교 1학년 재학 중에 퇴학처분을 받아 자유롭게 공부할 수가 없었던 처지였다. 그러기에 나에게 학업은 최우선 순위였다. 그래서 장현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큰 형님 주영진 전도사님을 찾아갔다.당시 팔순이 넘으신 할머님을 모시고 있던 큰 형님은 함께 월남하자는 내 말에 전혀 머뭇거림 없이 이렇게 말했다. “다 평양을 떠나면 누가 아버님이 순교하신 이 곳을 지키겠냐? 가라. 난 여기서 교회를 지키겠다.”그것이 큰 형님과의 마지막이었다. 울먹이며 막내 손자의 손을 놓지 못하시던 할머니에게 방학 때 찾아오겠노라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긴 채 버스에 올라탔었다. 그땐 정말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월남해서 얼마 안 되어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형님과 할머니, 그리고 형수님과 조카들에 대한 막연한 소식을 여러 사람을 통해 들었을 뿐, 정확한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이… 그렇게 53년을 보냈다.그리고 지난 4월 오랜 노력 끝에 나는 일본에서 팩스 한 장을 받았다. 형님과 형수님에 대한 북한 측 공식 문서였다.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형님 주영진 전도사는 악질 종교인 예수교 목사로 1950년에 반동단체에 가담, 악질적으로 만행하다 체포, 처단되었다. 그리고 형수님은 반국가적 악질 선전행위를 감행하다가 1970년 10월 26일 체포되어, 다음해 1월 15일 처단되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주영진 전도사는 8·15 해방 다음해 북한 공산당에 의하여 두 번 구속당했었다. 첫 번째는 교회 안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달 수 없다고 한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교회를 투표장소로 개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수주일을 위해 교인들로 하여금 투표에 참여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6·25 동란이 발발하기 전, 다시 검거되어 서른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교의 길을 갔던 것이다.그리고 형님이 가시고 이십여 년 간 처참하게 생활을 해 왔을 형수님 역시 쉰을 넘긴 나이에 반국가적 악질 선전행위를 한 죄목으로 또한 처단되셨다. 많이 배우지 못한 아녀자가 무슨 반국가적 악질 선전을 했겠는가? 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복음을 전하다 순교당한 것이다.이렇듯 형님과 헤어진 지 50여년 만에 접한 북한의 소식에 나는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그렇지 않아도 해가 갈수록 우리 뇌리 속에서 6·25 전쟁과 분단 조국의 아픔이 잊혀져가고 있다. 게다가 월드컵 주최와 6·13 지방선거로 인해 들뜬 분위기 탓인지… 어느 해보다 올해는 더욱 6·25가 멀어진 느낌이다.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다. 북녘 땅에서의 종교적 탄압은 53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오늘도 그곳에서는 수많은 익명의 순교자가 고난 중에 있음을 말이다. 무식한 아녀자의 몸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처단 당하는 현실이 지금 북한의 모습이다. 한참 젊은 서른 나이에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회자의 양심을 지키려다가 순교당한 이 땅의 젊은이의 일이 백년 전 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차로 겨우 1시간 정도 달려가면 닿는 그 곳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화려한 월드컵의 축배를 들고 있는 사이에 누군가 또 외로운 신앙을 지키며 죽어가고 있다.아버님 주기철 목사의 기일인 4월 한 달 내내 나는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서류로 확인된 형님과 형수님의 순교 앞에 복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순교, 분명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러나…일제치하에서 신사(神祠)참배 반대로 7년간의 옥살이와 고문 끝에 평양형무소에서 쓸쓸히 돌아가신 아버님, 고된 옥바라지 끝에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 그것도 모자라서, 공산 치하에서 목회자의 양심을 지키려다 젊은 아내와 핏덩이 두 아이를 놓고 먼저 가야했던 큰 형님, 그리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남편을 따라 몰래 복음 전하다가 ‘악질 선전’을 한 죄목으로 처단 당한 형수님… 이런 가족사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나는 내 가족에 대한 하소연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은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국교회 앞에, 그리고 조국 앞에 나는 말하고 싶다. 젊은 우리 후손들에게 말하고 싶다.축배의 팡파레 속에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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