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사는’ 야당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사는’ 야당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12.2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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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야당 분열의 정치철학

안철수 의원을 따라 신당에 가담하는 것보다 새민련에 남아 공천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실리적

“잘 되어봐야 야권의 자민련.”
안철수 의원의 신당 창당에 대해 한 정치권 인사는 그렇게 평가했다. 정당이라는 것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대세를 타지 못하는 정치세력이 만드는 정당이 사실상 정국 주도력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 안철수 의원이 새민련을 탈당해 문재인 대표와 결별한 것에 대한 정치권의 시선은 싸늘하다. 정국 주도력이 없는 안철수 의원이 정치권에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한민국 제1야당의 분열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번 사태의 추이를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워낙 정치 불신이 높은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안 의원이 보여준 과거의 행보들에 믿음이 가지 않는 이유가 크다.

이번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민련)의 탈당을 두고 ‘안철수의 세 번째 철수’라는 비아냥거림이 우스개로 저자거리에 나도는 이유가 그렇다.

사실, 안 의원의 탈당은 그가 새민련에 입당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가 대권 티켓을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했을 때 국민들은 안철수 후보의 일그러진 표정에서 그 전조를 이미 목격했다. 그것은 안 의원이 박원순 후보에게 서울시장 티켓을 양보하고 철수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를 지지하는 자, 야권을 지지하는 자, 그리고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자 모두에게 안 의원의 대선 후보 철수는 감동이 아니었다.

안철수의 낙인(烙印) 효과

이후 문재인-안철수의 결합은 기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진보 정치논객들 사이에서 안철수는 ‘비정치의 정치화’로 진보진영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일찌감치 제기됐다. 안 의원에게 그 어떤 정치적 코드를 읽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속담은 이럴 때 ‘개밥에 도토리’라고도 했고, ‘입안의 모래알’이라고도 했다. 남은 것은 언제 안 의원이 자신의 독자적 행보를 개시하느냐만 남았다고 본 이들의 예측은 적중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프레임을 ‘낙인(烙印, stigma)효과’라고 부른다. 즉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히면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과거에 대한 나쁜 기억은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상황을 부정적으로 몰고 가게 된다.

그러한 낙인효과는 다시 ‘인쇄효과’를 만든다. 즉 부정적으로 낙인 된 사람이 무엇을 하면 ‘저것 봐’라든지, ‘또 시작이군’과 같은 평가 절하된 반응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안 의원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이름 안철수연구소’라는 기업의 캐치프레이즈로부터 ‘진격해야 할 때 가장 안전한 철수’라는 불행한 낙인을 받았다.

이런 안철수 의원이 과연 신당을 창당해서 야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은 회의적이다. 그렇기에 정작 안 의원을 지지하던 유력한 비노(非盧) 계열의 인사들마저, 안 의원의 신당 참여에 머뭇거리고 있다고 보인다.

사실 이들에게는 보다 현실적인 선택이 남아 있다. 안 의원을 따라 신당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새민련에 남아 공천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더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남아서 문재인 대표를 비롯해 당 지도부에 협상을 위한 포격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런 문제가 새민련으로서는 다가오는 총선에 짙은 먹구름을 예고하는 위기로 상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야당의 현재 위기는 사실, 야당이 야당으로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해왔다는 냉정한 평가로부터 반성되어야 한다. 어느 나라에든 서로 다른 정치세력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정치세력 간에 경쟁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쟁은 정책 경쟁이 되는 것이 순리건만, 한국 정치사(史)에서 야당의 전통은 집권세력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것 외에 정책 경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해 본 바가 없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혹자는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 ‘승자 독식’이기에 여권이 사실상 모든 권력을 독점하기에 그렇다고 한다. 분명히 그런 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과거 DJP연합(민주당-자민련 연대)으로 나름 안정적인 국정 질서가 이뤄졌던 경험에 의문을 제기한다.

헌법정신의 변질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의 리더로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었을 때, 많은 정치학자들이 DJ 정권의 정체성을 평가하는 데 애를 먹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스스로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진하겠다는 보수적 스탠스를 취했다.

▲ 한국의 야당은 정통 보수의 가치를 견지해 왔다. 그러나 DJP연합이 깨지면서 급격히 좌회전하여 현재는 대한민국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과감하게 보수성향의 야당인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정책과 인물 연대를 통해 소위 ‘DJP 연합’을 구축했고, 박정희의 통치철학을 가진 포철의 신화, 박태준 대표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렇게 구축된 진보-보수의 정치적 연대는 IMF 체제를 돌파하면서 2000년 총선을 통해 ‘호남당’에 머물렀던 민주당을 전국 정당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중도적 스탠스는 정권 재창출이라는 욕망으로 인해 당시 386 운동권 세력을 ‘젊은 피’로 제도권에 수혈하면서 변질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햇볕정책’이라는 퍼주기 식의 대북(對北) 노선을 통해 ‘고려연방제’의 위험한 도박이 시작됐다.

이는 한국인의 정치적 성향을 급격하게 좌편향 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종북 이념의 단체들에게 합법적 활동 공간을 제공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정치공동체(Polity)에는 깊은 구조로부터 헌법정신이 변질되는 양상을 맞게 된다. 정치 시스템에 근본적인 위기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잘 알고 있던 두 현대 정치 철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고전 정치철학의 태두라 불린 레오 스트라우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법철학과 대의(大義)민주주의 정치철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칼 슈미트였다.

이 두 사람의 정치철학의 공통점은 한 정치 공동체에는 ‘지켜내야 할 정치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러한 최종 가치는 상대주의적일 수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자연법적 소유권에는 갈등과 분쟁을 막기 위해 ‘1물1권’과 같은 소유권의 지배적 절대성이 요청되는 것처럼 한 정치 공동체에는 ‘1국(國)1제(制)’와 같은 단일한 가치의 정치 이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변의 힘으로 정한 것이 헌정(憲政)이라고 할 수 있다. 헌정이라는 말로 번역된 Constitutional이란 단어는 ‘필연적’ 또는 ‘필수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헌법률이 아닌, 헌법의 핵심가치는 ‘변경 불가’가 원칙이라는 의미가 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자유는 자유를 파괴할 수 없다’라든지,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없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다른 말로 ‘자유민주주의’가 그러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정치철학을 ‘보수주의적 정치 공동체의 철학’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저서 <폴리테이아, Politeia>는 <국가론>으로 번역될 것이 아니었다. Polity(Politeia)는 국가(States)에 선행하는 자생적, 운명적 정치 공동체의 개념이며, 그런 정치 공동체의 일원들이 만장일치로 세운 정체(政體)가 곧 Polis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국가의 지배적 정치이념은 순수 단일해야 하며, 그것은 ‘선(善)을 지향하는’ 이데아와 전체를 구성하는 파라데이그마(Paradeigma)라고 플라톤은 본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 공동체의 헌정적 가치는 상대화되거나, 일원(一元)적 규범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념적 괴물, ‘노무현 정권’ 탄생시켜

이런 생각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역사와 세계에는 섭리적 질서가 있다’는 초월적 인식이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모두 유한적 존재라는, 즉 절대적이고 무한한 보편적 질서에 구속되는 소산(所産)적 존재라는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다.

이런 정치철학에 비춰 봤을 때, 적어도 DJP 연합과 같은 질서는 진보와 보수 각 진영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헌정질서 내에서 서로 정치적 공동선(善)을 도모했던 경험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2000년 총선 이후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계는 DJP 연합의 룰을 깨고 독자노선에 이르게 된다. 당연히 진보적 민주당 내 가치질서는 급격하게 좌편향에 이르렀고, 결국 ’노무현 정권‘이라는 이념적 괴물을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 대한민국 정치사에 커다란 불행이라면 불행으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헌정질서가 도전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듯 야당이 여당으로서 수권(授權) 과정을 거치기 이전에, 대한민국 야당에는 정치 공동체로서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적 가치를 견지하는 전통이 있었다. 바로 한민당과 구(舊) 민주당의 정강과 이념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야당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치철학에서 분명했다.

애국 한민당에서 분화된 민주당은 4·19 직후 제2공화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고 5·16 혁명으로 인해 다시 반(反)독재 투쟁의 야당의 길을 가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제2공화국의 민주당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대단했다는 사실이다.

4·19 직후 제5대 총선 민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민주당이 의원 정수의 75.1%에 해당하는 175명이 당선돼 과반수를 훨씬 넘었다. 무소속도 49명이 당선됐는데, 민주당의 신·구파 공천연합에서 낙천된 후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이 사실상 의석을 석권한 선거였으며, 자유당은 단 2석을 차지해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그런 민주당에는 건강한 국가관의 전통이 있었다.

민주당 장면 정권은 신구파 간의 갈등 와중에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은 제1공화국에서 진보당 사건으로 1959년부터 금지된 사회주의 정당 결성의 불법화를 비폭력 제도권 내 야당 지향을 조건으로 풀어주면서도 안보를 저해할 수 있는 공무원 노조와 교사 노동조합 설립 추진운동은 불법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을 파면, 해임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당시 민주당의 외교노선은 미국과의 공조를 튼튼히 하면서도 일본과 적절한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전통은 3김(三金)으로 대표되는 지역감정의 정치대결 구도로 말미암아 희석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노무현 정권의 종북주의 등장과 함께 뿌리째 뽑혀나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사는’ 기인한 정당

야당이 정치공동체의 ‘지켜야 할 가치’를 인정하고 보편적 도덕률에 입각해 정치에 참여할 때 국민들은 야당을 지지했다. 그런 전통은 영국에서 ‘여왕의 가장 명예로운 야당(Her Majesty’s Most Loyal Opposition Party)’이라고 부르는 점에도 있다.

영미권에서 야당을 Official Opposition Party라고 부르는 이유는 야당이 정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야당은 여당이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정당이며, 따라서 국민에게 무책임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늘의 야당에는 그러한 고귀한 전통을 찾아 볼 수 없다. 정치 이념에서 이미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 시장경제의 헌정가치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사는’ 기인한 정당이 되어 버렸다.

원칙 없는 이합집산이 마치 정의라도 되는 듯, 야당 정치인들이 분열의 과정에서 뱉어내는 말들에 국민들은 혐오감을 느낀다. 왜 합치며, 왜 갈라서는가? 대답 없는 그들의 행동들에서 읽히는 것은 ‘권력 비즈니스’다. 정치가 생계를 꾸리는 직업이다 보니, 이들로서는 금배지를 다는 것이 생계 유지에 필수라는 생각이 읽힌다.

맹자는 그런 정치를 맹비난했다. 맹자는 자신이 천명(天命)의 아들, 선(善)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정하는 것은 천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주권이 왕에게 있던 왕도(王道)에 대해 영원한 야당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맹자의 정신이 바로 초월성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야당에게는 그러한 초월적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여당인 새누리당에는 그러한 맹자의 천명, 플라톤의 파라데이그마가 있는가? 어제는 경제 민주화요, 오늘은 경제 활성화를 외치면서도, 정작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로부터 회피하는 새누리당에게도 천명이라든지, ‘선(善)의 이데아’는 없는 것 같다. 그러한 현실주의 마키아벨리적 사고는 상대주의 세계관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게 된다.

대중들은 우매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악하다. 그들은 선동에도 잘 넘어가고 군중심리에도 잘 엮여들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적이며 균형을 유지하려는 속성이 있다. 다시 말해 ‘강한 자들을 낮추고, 약한 자들을 높이는’ 신비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 정치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말은 아마도 대중들을 통해 발현되는 그런 ‘섭리적 현상’을 일컫는 것이리라.

따라서 살아 있는 제 정치세력은 천명(天命)에 복종해야 하듯이, 이 천명의 질서가 운행되는 국민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복종은 국민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결단을 포함하는 것이다.

정치란 인간의 뜻을 하늘에 고(告)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 은근히 뜻 깊은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는다.

말에는 영혼이 있고 말에는 메시지가 있어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든다. 세상의 질서는 사람들이 행동한 결과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분열의 정치에서라도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올바른 말, 비전의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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