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우리의 영원한 천사’
‘오드리 헵번, 우리의 영원한 천사’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1.20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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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오드리 헵번 사망(1993년 1월 20일)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1961), ‘로마의 휴일’(1953), ‘마이 페어 레이디’를 아시는가.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선정한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100명의 스타’의 여성 배우 목록에서 3위에 오른 여배우.

살아 있는 천사, 우아한 스타일리스트, 요정, 청순미, 깜찍, 발랄, 모태(母胎) 미인, 만인의 연인, 패션의 아이콘, 마릴린 먼로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배우. 세월이 흘러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아름답되 이지적이고, 우아하되 기품이 넘치는 여왕 같은 이미지…. 

어느 누가 감히 오드리 헵번 앞에서 여성의 미모를 논한단 말인가.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이란 영화에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한 여성이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기타를 퉁기며 ‘문 리버(Moon river)’를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 설레지 않을 남자가 있을까.  

▲ 독일 점령기의 네덜란드에서 자란 ‘은막의 천사’ 오드리 헵번은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

미인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태어난 여성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오드리 헵번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의 궤적은 결코 녹록지 않다. 1929년생인 그녀의 출생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국적은 영국이다. 이버지는 영국인 앤서니 헵번 루스턴, 어머니는 네덜란드인 엘라 반 헴스트라이다. 오드리 헵번의 귀족적 이미지는 진짜 귀족이었던 모계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백일해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오드리 햅번은 의사와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극적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여섯 살 되던 해 나치를 위해 일하기 위해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 남편이 떠난 뒤 집안이 몰락하자 어머니는 딸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궁핍한 독일 점령기를 보내야 했고 헵번은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어려운 성장기를 보냈다. 

혹독한 전쟁의 상처 

전쟁은 이 어린 천사를 절망의 끝까지 몰고 갔다. 안네 프랑크와 같은 나이였던 여린 소녀가 식량이 없어 튤립 뿌리를 씹으며 두 달을 살아야 했고, 사랑했던 외삼촌이 전쟁이라는 광기 속에서 처형을 당하고, 두 오빠는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말라깽이 몸매와 오뚝한 콧날, 호수에 풍덩 빠질 것 같은 왕방울 눈은 이때의 혹독한 영양실조 덕인 것 같다. 어머니마저 떠나면서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발레리나를 꿈꿨던 헵번은 170cm라는 큰 키로 인해 무리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영국으로 건너가 모델로 성공한다. 그녀는 1950년대와 60년대 지방시 모델이 되어 이 브랜드가 세계적 명성을 얻는  데 기여한다.  

그녀는 연기 수업, 드라마 수업 등을 받았고 몇몇 영화에서 단역이나 조연으로 활약하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1953년 그레고리 펙과 함께 출연한 데뷔작 ‘로마의 휴일’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특히 ‘소원의 벽’에서의 장면은 지금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로마의 휴일’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오드리 헵번은 세기의 여우(女優)로 떠오르게 된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른바 ‘헵번 스타일’이라 불리는 숏 커트 헤어 스타일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이후 그녀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전쟁과 평화’, ‘사브리나’ 등에 출연하며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미국아카데미와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스타덤에 올랐다. 

그 동안 미국인 배우와 첫 결혼, 이탈리아 의사와 재혼했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를 떠돌며 살다보니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화려한 배우 생활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가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신념을 위해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1959년에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아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극도의 가난 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아버지를 더블린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그가 죽을 때까지 생활을 책임졌다. 

우연한 기회에 유니세프와 인연을 맺은 세기의 여배우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가 이 자리를 맡게 된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네덜란드에서 궁핍한 생활을 할 때 유엔 구호기관으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한 보수는 1년에 1달러, 교통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대우였지만 그녀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은막의 스타가 이제는 어린이들의 천사로 환생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의 참상을 지구촌에 알린 것이다. 

▲ 오드리 헵번은 인생 후반기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서 아프리카·서남아시아·중남미 등 세계 각국의 극빈곤층 어린이들을 돌보며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유언처럼 남긴 詩 

그녀는 비행기와 버스, 낡은 트럭을 얻어 타고 아프리카 전 지역, 서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 중남미의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을 찾아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살려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이 축복”이라며  질병에 신음하는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끌어안고 고통을 함께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천사를 보며 인류의 양심도 함께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소말리아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명망 있는 의사들이 이 천사를 살리기 위해 나섰으나 암은 그녀의 삶을 몹시도 시기 질투했다.  

그녀는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 아름다운 호반의 마을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리고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자식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유언처럼 시를 남겼다. ‘문 리버’를 부르던 그 목소리로.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눠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1993년 1월 20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 그날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 그를 조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티파니 보석가게는 일간지에 광고를 싣고 전 세계의 매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였다. 

“오드리 헵번. 1929 ~ 1993. 우리의 영원한 친구. 티파니 사.”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은 오랜 기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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