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지도자만이 통치에 성공한다
강한 지도자만이 통치에 성공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6.01.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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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초점] 마키아벨리 <군주론> 방식의 좌익 척결론

지도자는 법을 공공연히 무력화하려는 좌익세력들의 실제 모습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고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지도자의 척결 능력을 증대시킨다. 

16세기에 출간된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의 관점에서 해방 이후 한국인을 보면 우리 모두 야수와 같이 처신하고 살아온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 안정석 자유기고가·정치학 박사

마키아벨리는 이 책 18장에서 ‘법(law)’과 ‘힘(force)’이라는 두 통치수단을 언급하면서 전자는 인간에게 합당하나, 야수에게는 통하지 않으므로 야수(beasts)에게는 힘을 쓰는 것이 가장 합당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2년 전 한국 최고의 대학 법대를 나와 고향에서 30년 이상 변호사를 하는 친구에게  “왜 우리는 법치가 안 되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해방 이후 한국 사람은 법을 지키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강했다. 누가 손해 볼 일을 하겠나? 그래서 지금도 법치가 잘 안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해방 이후 한국인은 인간이 아니라, 야수의 삶을 살아온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어떤 사회든 인간의 절반이 법을 준수하지 않는 야수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린 대다수가 사실상의 늑대였던 셈이다.

우리 가운데엔 더러 이 늑대를 쫓는 사자의 역할이나 늑대가 파놓은 함정을 피하는 재주가 있는 여우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는 셈이다. 어차피 이들 역시 법으로 살아온 것은 아니다. 뭔가 법 이외의 방식으로 살아온 것이다. 

해방·법치·좌익과 늑대 이미지 

그럼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 <군주론>의 비유에 해당되는 ‘늑대’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이 물음에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좌익세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큰 변화의 하나다. 

소위 이전의 박정희 식 개발독재 시대엔 경제적 권리와 정치권력을 같이 장악하거나, 아니면 그 주변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갖은 불법과 부조리를 통해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억울한 사람을 만들거나, 약자 위에 군림하여 늑대와 같은 짓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시대에는 공정하고 엄격한 제도로 근대화라는 국가적 정책을 실행했다기보다는 정치와 인맥, 각종 인연으로 그 정책을 밀고 나갔을 것이라 평가된다. 제도가 없는 곳에는 부조리가 성행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있었다면 대개 이런 것에 연유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이 바로 ‘늑대’였다. 

그러나 그 동안 한국 사회는 전 세계와 교류해왔고 사회가 성장, 진화하여 많은 제도와 민주주의적 정치, 사회의 기제가 정비되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우리는 1990년대 중반에 이미 OECD 국가가 되고 세계 10대 무역국가가 되었다. 이젠 과거의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나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나라에 이전 못지않게 판치는 불법과 부조리는 제도적 결함의 차원이라기보다 주로 이념적, 정치적 이유에서 자행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 주요 세력은 지난 1980년대 이래 거대한 민족·평화·통일·복지라는 운동권식 담론을 사실상 장악해온 이념적 좌익세력이다. 지금은 좌익세력이 이런 레토릭으로 다양한 종류의 불법을 저지른다. 

현재 이 나라 좌익은 사회정치적 만악(萬惡)의 근원이 되었다. 사실상 모든 악은 여기 이 세력에게서 나왔고, 또 여기로 되돌아간다. 좌익을 척결해야 이 나라 선(善)의 구조가 제대로 정립되고 애초의 선의(善意)대로 집행될 문제가 된 것이다. 

좌익세력들이 국가의 공안적 근간인 국가보안법을 어기는 것은 이젠 하나의 상식이자 일상사가 되었고, 그것을 철폐하자고 주장하거나 무력화를 시도한다. 사법부에서 이미 법외노조로 판결을 내린 전교조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조직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민노총이나 각종 좌익단체들은 평화적 시위에 대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잘 지키지 않고 자주 폭력적인 시위 수법에 의존한다. 공권력을 담당하는 경찰에게도 폭력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복지를 빙자하여 어떤 운동권 시민운동가는 대기업의 약점을 문제 삼고 그걸 빌미로 하여 큰돈을 뜯어온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너무 자주 보아온 일들이라 일상사가 되다시피 한 지 오래다.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늑대’를 경험하고 있다. 그게 바로 이 나라에 종횡무진으로 횡행하고 발호하는 좌익세력들이다. 우리 정치사회의 질서는 이들로 인해 크게 훼손되고 있다. 

▲ 현실적 정치철학의 최고 이론가로 꼽히는 마키아벨리(좌)와, 그의 정치사상을 담은 저서 <군주론>.

<군주론> 18장의 핵심어들 - 법·사자·여우, 그리고 늑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키아벨리 <군주론> 18장의 교훈을 좀 더 정밀하게 추리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엔 ‘늑대’와 함께 사자, 여우, 그리고 법이 핵심어다. 

이 장의 교훈은 군주가 된 사람은 인간과 짐승을 같이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통하므로 ‘법’을 적용할 수 있고, 짐승에게는 법이 통하지 않으므로 이들에겐 용맹스러운 사자와 교활한 여우의 행위방식으로 대해줘야 효과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은 사람을 대하는 수단이고, 사람이 가진 이성이 통하지 않는 야수에게는 법 이외의 수단으로서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사자와 여우의 특성을 잘 모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자는 용맹과 힘을 상징하고, 여우는 교활한 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늑대는 약자들을 괴롭히고 억울한 사람을 잡아먹는 악한을 상징한다. 

<군주론>에서 단 한번 나오는 늑대 이미지는 부정적인 존재를 상징한다. 악한의 이미지다. 지금 대한민국과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다수 국민을 괴롭히는 세력인 북한, 남한의 친북·종북 세력, 그리고 민노총과 좌익 종교집단 정의구현사제단과 조계종 등의 좌익화 된 성직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들 세력이 아직도 분단되어 있고 국가의 민족사적 정통성이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대한민국과 이 나라의 선량한 국민을 괴롭히는 악한 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자’는 박정희 같은 무서운 지도자를 상징한다. 국가적 프로젝트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집행하는 힘 있는 지도자를 상징하면서도, 국민 중 누군가에 의한 불법과 부조리가 있을 때, 이를 다루기 위해 법대로 엄격하게 집행하는 강인하고 정의로운 지도자 이미지가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자비심(mercy) 내지 사랑(love)이 여기에서 나온다. 

여우는 교활한 지도자의 이미지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에서는 이 교활한 지도자가 대개 좌익 대통령 같은 인물들이라 이해된다.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지금의 거대 좌익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보인다. 물론 우익 대통령도 있다. 적대진영이 파놓은 함정에 잘 속지 않고, 교활한 이성을 가진 지도자는 모두 여기에 속한다 할 것이다. 

이런 여우형 지도자는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자신의 적이 몰래 깔아놓은 함정을 쉽게 탐지하고, 그 위험에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그 위험을 재빨리 알아채고 필요한 조처를 미연에 한다. 마키아벨리는 여우의 이런 교활성까지도 군주는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모로 이 <군주론> 18장의 동물과 군주의 이미지는 정치세계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여러 짐승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정치인과 정치세계를 논하는 마키아벨리는 동화를 마스터한 대가(大家)다. 

그리고 이 18장에서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약 50% 정도에 불과하다는 간접적인 교훈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절반은 법을 준수하고 존중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참된 지도자는 악역 감수해야

우리는 이런 수적 차원의 문제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비록 소수 세력이 불법을 저지른다 해도 정치사회를 관찰하는 관찰자나 지도자는 항상 법과 불법의 행동이 50 대 50의 비율로 하시라도 교차 발생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게 건강하다는 교훈이 여기에 있다.

사실상 법은 멀고, 불법은 늑대 같은 짐승들이 상시적으로 저지르는 일이라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힘과 제도의 정비와 대비 태세는 막중할 정도의 중요성을 띠게 된다. 

가장 구체적으로 군주(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는 지도자의 바람직한 이미지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반인반수는 그리스 말로는 켄타로스(centaurus), 영어로는 센토(centaur)라 표현된다. 켄타로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말로 머리는 사람, 몸은 짐승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세상을 다스릴 때 반은 짐승을 대하듯 하고, 반은 법이 통하는 인간을 대하듯 해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그는 지도자의 모습이 이런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하는 모습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다스려야 할 악인이 있으면 그 악인의 모습의 일부를 모방해야 한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이다. 그게 바로 반인반수의 모습이다. 군주 자신이 반인반수가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지도자는 무서운 사자의 용맹스러움이나 교활한 이성을 발휘할 능력을 갖춘 여우의 모습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자나 여우의 모습은 우리 인간에게 늘 귀엽거나, 착하거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누구라도 무서운 상대방이나 교활한 상대방을 유쾌하게 수용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악인이 들끓는 정치사회의 지도자는 악역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지도자의 능력이자 자격이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반인반수란 무서운 말이다. 그러나 이 무서움의 감정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적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마키아벨리보다 1세기 뒤에 살았고, 마키아벨리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던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를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서구 정치철학 사이에 놓여 있는 빈 공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을 이해하기 위해 일별할 필요가 있는 사상가다. 

홉스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저술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괴물 같은 존재, 리바이어던을 정치 지도자의 이미지로 선택했다. 이 구약의 괴물, 리바이어던은 모든 인간이 가진 헛된 정염인 ‘자부심(pride)’을 분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괴물이다. 

인간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진 존재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홉스는 그 구절을 인용하면서 문명적 가치를 실현해줄 수 있는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는 인간의 헛된 자부심을 분쇄하고, 그들을 모두 겸손하게 만들 수 있는 권능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성경 속에서, 헛된 자부심이 분쇄된 개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믿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독실한 기독교인 이미지다. 홉스는 이를 정치사회의 개인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지도자는 괴물이 되어야 야수 같은 인간을 다스릴 수 있다 

홉스가 성경의 괴물을 정치사회 지도자의 이미지로 선택했다는 점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그가 말한 리바이어던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군주다. 정치 지도자다. 지도자는 괴물이 되어야 자부심(pride)으로만 살아가는 야수 같은 인간의 심성을 다스릴 수 있고, 그래야만 야만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연 상태(state of nature)에서 문명적 정치가 통용되는 시민사회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홉스의 가정이다. 

16세기 마키아벨리나 17세기 홉스나, 그들의 공통점은 지도자는 무서움의 감정을 시민의 마음 속에 불어넣지 못하면 정치질서를 수립하고, 그것을 유지해 나가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런 귀중한 교훈을 우리는 그들의 가정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우리 정부는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너무 연약해져서 야수 같은 짐승에게도 법을 적용하려고 하는 듯하다. 그러나 야수가 된 이 나라 좌익세력은 법을 이해하려 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는 게 우리가 늘 보게 된 문제다.

북한에서는 형식으로나마 헌법과 법이 있다고 해도 북한 통치자들은 종이 위에 쓰인 법을 믿는 대신 김일성 시대부터 내려 온 소위 ‘10대 원칙’을 더 중시한다. 헌법과 법은 그들에게는 그들의 선량함을 선전하는 대외적인 선전장치에 불과하다. 

또, 북한이나 남한을 불문하고 좌익이 준거하는 가장 고전적인 텍스트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엔 “법은 이데올로기다”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이 지배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선전하는 허위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법치(rule of law)라는 목표가치는 좌익에겐 냉소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게 지금 이 나라의 좌익에게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우리는 이 나라 좌익세력이 법을 존중하고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인 기대임을 알고 있다. 그들이 법을 준수하고 존중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그들이 현실적 불이익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라는 계산이 설 때뿐이다. 그렇게 보는 게 현실적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야수적인 사람들에겐 법이 안 통하므로, 사자가 힘을 과시할 때 늑대가 공포감을 느끼고 멀리 도망가듯 강한 철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법을 아무리 강조해도 도무지 듣질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자 같은 지도자가 없어서 이를 행하지 못하면 법을 지키는 선량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결과가 반드시 생길 것이다. 어떤 정치사회에서도 이것은 가장 최악의 경우다. 이렇게 되면 어떤 정치사회도 해체의 길로 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좌익들에게 신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 

필자는 마지막으로 <군주론> 18장에서 마키아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최종적 진실이 신의(faith) 문제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가 법과 힘, 사자와 여우, 그리고 늑대를 언급할 때 이 모든 논의의 주제는 신의의 문제다.

이는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법이 통용되는 통치 수단임을 강조할 때의 마키아벨리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법을 이해하고 준수하는 이성과 신의는 같은 현상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에겐 신의가 통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에겐 신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 나라 좌익에게 우리 선량한 국민이 기대할 수 있는 신의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좌익이념과 사상이 과연 그것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정신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교리나 북한의 주체사상, 친북, 심지어 북한 정치를 추종하는 종북 세력까지 나타난 우리의 정치 지평에서 좌익에게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이 18장에서 덕과 도덕성을 상실한 인간에게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게 겉모습으로서의 외양(appearance)의 덕임을 시사한다. 일종의 최소한의 덕론(德論)인 셈이다. 내면(內面)보다 외면적 행태(behavior)가 중요해진다. 야수적 악행을 많이 하는 세력들에게 덕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 이런 야수적 국민을 다뤄야 하는 군주 자신도 천사처럼 선행만을 고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선량한 모든 국민은 모든 사람의 행동과 말의 외양을 중시하는 법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법을 공공연히 무력화하려는 좌익세력들의 행동의 실제 모습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고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지도자의 척결 능력을 증대시킬 것이다. 좌익의 행태에 대한 공개와 폭로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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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깅돌 2016-01-30 11:03:34
그리고 이 18장에서 우리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약 50% 정도에 불과하다는 간접적인 교훈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절반은 법을 준수하고 존중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공감합니다-
글에서 제시하는 지도상은 전탕크 전대통령이 딱인듯 보이는 것은 웬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