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쯔위와 중국 공산당의 초조함
가수 쯔위와 중국 공산당의 초조함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6.01.2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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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쯔위 사태와 국가

타이완 출신의 젊은 아이돌 가수가 자신의 방에서 태극기와 타이완기를 손에 쥐고 어리광을 떤 동영상에 중국 공산당이 발끈한 것은 ‘하나의 중국’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

한국에서 활동하는 타이완 출신 가수 쯔위. 그녀의 ‘타이완 국기’ 사건은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개인은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숙제,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어려운 질문을 불러냈다.

쯔위 사건으로 중국은 자신의 모토인 ‘하나의 중국’을 다시한번 천명하는 선전의 기회를 얻었고, 대만은 선거와 맞물려 대만 독립의 열기를 다시 확인했다. 그 결과는 타이완의 승리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중국이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한 것이다.

▲ 대만국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쯔위.

단지 노래하고 춤추는 젊은 걸 그룹 아이돌 가수의 행동이 국가 간에, 그리고 국민들 사이에 이처럼 첨예한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에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근대 정치이념이 자리한다.

그러면 정작 우리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개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국가란 무엇일까. 그리고 국민, 혹은 민족이란 무엇일까. 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면서도 정작 그 개념은 모호하다. 모호하다는 말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국가(國家)라는 한자어의 개념은 한(漢)나라 대에 중국에서 황제와 그 일가들이 왕이나 제후로 봉분된 지배 그룹을 일컫는 말이었다. 민(民)이라는 개념은 국가가 지배하는 백성의 개념이지만 사실 피지배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민(民)이라는 글자는 그 상형(相形)이 원래 눈(眼)을 찔러 멀게 하고 목에 칼을 씌워 도망치지 못하도록 한 적의 포로를 의미했다. 이들은 노예가 되었다가 오랜 시일이 흘러 피치자의 지위를 얻는 백성이 된다. 이는 국가의 탄생이 결코 아름답지 않은 폭력적 질서를 수반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한 역사적 전개는 하버드대에서 공공경제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맨슈어 올슨의 책 <지배권력과 경제번영>에서 잘 설명된다.

국가의 탄생

올슨 교수는 경제사적 탐구를 통해 고대 국가들의 탄생에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목형 강도떼(nomad bandit)가 정주민들을 약탈하다가 아예 그들 주변에 터를 잡고 눌러 앉아 정기적 공납으로 정주민들을 수탈하는 정주형 강도떼(sedentry bandit)로 변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질서였는데, 정주형 강도가 유목형 강도보다 비용이 덜 들기 때문이다.

이제 정주형 강도떼는 왕궁을 짓고 자신들을 신성권력화 한다. 각국의 건국 신화는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면서 정주형 강도떼는 자신들이 수탈할 정주민들을 다른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정주민들과 상호 호혜적 묵계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 세금과 안전을 교환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정주형 강도들은 정주민들의 생산력이 자신들의 이익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 피지배층의 재산을 보호하고 내부 갈등도 해결하는 역할을 하면서 서로 융합하게 된다.

이렇듯 포용적 강도떼는 성공적으로 국가를 탄생시키지만,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수탈적 강도떼는 정주민들의 반란이나, 정주민들이 협조하는 외적에 의해 쫓겨난다. 그렇게 탄생한 국가는 더 시간이 흐르면 강도떼의 혈연과 정주민 혈연이 뒤섞이며 융합되었다가 정주민 출신 가운데서도 지배자가 등장한다.

고대 국가에 등장하는 왕도정치란 백성이 군주와 그 일가들에게 있어 부의 원천이라는 해석이 깔려 있다. 올슨 교수의 ‘깡패국가 패러다임’은 우리 홍익인간 단군신화나 고구려 주몽의 건국과정에 적용하는 데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올슨 교수는 이러한 국가의 원리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분석에 활용해서 왜 공산주의가 결국 배타적 소수에 의한 폭력적 사회일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공산주의 경제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중국은 국가로서 성공과 실패의 경계선에 놓여 있다고 보인다.

가수 쯔위 사건은 국가의 지배계급으로서 중국 공산당의 초조함을 보여준다. 타이완 출신의 젊은 아이돌 가수가 자신의 방에서 태극기와 타이완기를 함께 손에 쥐고 어리광을 떤 동영상에 중국 공산당이 발끈하는 태도는 ‘하나의 중국’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에 일어난 사실이다.

마잉주 총통의 착각

올슨 교수의 설명에 따르자면, 타이완인들은 중국이라는 공산 지배질서에 저항해서 섬으로 떠난 ‘자유중국인’들이다. 장개석 군대 홀로 타이완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 상하이와 광동지역에 있던 약 200만의 지식인과 기업인, 그 가족들이 함께 건너갔다. 그들은 이미 19세기 중국에 상륙했던 서구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과 자유의 가치를 깨달은 이들의 후예들이었으며, 그렇기에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재 타이완 국민들은 그들의 부모세대로부터 공산주의는 악(惡) 그 자체이며, 절대로 타협하거나 굴복해서는 안 되는 대상임을 철저하게 교육받은 이들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 마잉주 총통 시기에 크게 흔들렸다. 마잉주 총통은 중국의 경제력을 자국(自國)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했다.

즉, 중국의 거대한 내수시장을 타이완의 세계시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착각에 글로벌 시장보다 양안 협력을 강화했으며, 타이완 기업들이 원하는 미국과 유럽, 한국과 일본 등에 관세협정이나 자유무역 시장 개척에 소홀했다.

결국 타이완 기업들은 중국으로부터 원료와 기계를 중점 수입해서 다시 중국에 팔아야 했으나, 중국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고, 중국은 그러한 타이완 기업을 중국 기업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타이완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평균 18%에 이르는 적자를 봐야 했다.

타이완 경제가 마잉주 총통 시절 곤두박질 친 배경에는 타이완이 글로벌 시장을 포기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중국 시장을 배후지로 봤기에 일어난 정치적 실패가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친중(親中)과 세계화 사이에서 판단을 잘못한 마잉주 총통 하의 타이완 기업에 투자할 외국 자본은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새로 대만 총통으로 선출된 차이잉원(蔡英文)의 승리에 쯔위 사건의 영향력이 컸다는 외신 보도들이다. 타이완 국민들은 자국의 어린 가수 쯔위가 보여준 자기 정체성에 중국 공산당과 중국인들이 ‘하나의 중국’을 외치며 거세게 반발하고, 그 강압과 위세에 눌려 엎드려 사죄를 표한 쯔위를 보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타이완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새 총통 차이잉원이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비롯해 각국과 FTA 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배경도 이 점에 있다. 더 이상 중국에 타이완의 운명을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반체제의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

국가란 그 기원이 폭력적 질서에 의한다고 해도, 시간이 흘러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융합된 상태가 되면 정치공동체(Polity)라는 자생적 질서가 형성된다. 그러한 질서는 만장일치적인 것이며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떠났거나 배제된 상태가 된다. 그러한 정치공동체는 관습적 질서로 개인을 초월하며 국가를 성립시키는 바탕이 된다.

여기에 규약으로 성립한 법이 등장하면 법치국가(State)가 된다. 그렇게 성립한 국가를 국민국가(nation state)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중국도 타이완도 이미 국민국가의 상태에 들어섰다. 타이완에는 타이완 국민들이 세운 주권이 있으며, 이는 배타적인 것이다. 과연 중국이 타이완의 주권을 그들의 의사에 반해 접수할 수 있을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타이완은 중국의 체제 이념에 반대해 스스로 독립한 정치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그 가치는 자유였다. 역사 어느 시기에도 자유를 가치로 한 정치공동체를 반(反)자유적 가치의 정치공동체가 흡수한 예는 없었다. 중국의 역사는 다를 것인가.

쯔위 사태를 바라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정치공동체는 단일한가? 서로 다른 이념을 갖는 것은 사상과 표현과 양심의 자유이지만, 개인을 초월한 공적 질서로서 정치공동체(즉 Polity)에는 단일한 가치, 단일한 이념이 만장일치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헌법정신이 된다.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리의 헌정이념이라면 그것에 반하는 어떤 정치질서도 제도권에서는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정치철학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反)정부적 행위를 정치적 양심의 자유로 인정하지만, 반(反)체제의 자유는 인정할 수 없게 된다.

하나의 정치공동체는 그들의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정치공동체의 가치는 변화시킬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반대자가 정치공동체를 떠나든지, 정치공동체가 그런 이들을 배제해야 한다. 정치공동체에는 절대적, 초월적 이념적 가치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명과 자유, 재산을 지키자고 개인들의 연대로 정치공동체를 자발적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정치공동체는 국가주의의 발로가 아니다. 국가에 선행하는 것이며, 모든 개인들은 그 합의된 가치에 복종해야 한다. ‘자유의 적(敵)들에게는 자유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자유민주주의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제퍼슨의 다음과 같은 말로 잘 표현된다.

‘자유라는 이름의 나무는 애국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자유를 얻은 대가는 영원한 감시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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