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애, ‘우남 알리기’에 바친다
남은 생애, ‘우남 알리기’에 바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6.01.22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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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소설 ‘이승만’ 연재 시작한 작가 복거일

"이 작품을 쓰기로 작정하고 동작동 국립묘지 내의 이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지하에 계신 이 대통령께 빌었습니다. 1년은 어떻게든 내 의지로 버텨내겠는데, 그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책을 끝마칠 수 있도록 나머지 2년은 우남께서 제 건강을 책임져 달라고…."

이근미 작가·미래한국 편집위원 / 사진 이모람 객원기자 

작가 복거일 선생이 <월간중앙>에 소설 ‘이승만’ 연재를 시작했다. 개화기의 계몽운동과 일제시절 독립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한 우남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너무 작은 것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전기도 많지 않고 예술작품도 드문 상황인 데다 우남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적대적인 학자들이 수행해왔다.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복거일 작가는 실명소설을 쓴 적이 없는 데다 자신보다 잘 할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해 흘려들었다. ‘역사를 알아야 하고, 우남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우남에게 호의적이어야 한다’는 전제에 이르자 결국 쓸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우남의 판단과 행동을 이해하려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기간의 국제정세를 이해해야 해요. 방대한 세계정세와 역사를 독자들에게 알리려다 역사교과서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게 어려움이죠.” 

전기가 아닌 소설 형식을 택한 이유는 뭘까. 

“전기는 나 말고도 쓸 사람이 많고, 역사보다 소설을 100배 많이 읽으니까. 소설은 아직도 100만, 200만 부 나갑니다. 이념서적이 좌파사상을 물들인 게 아니에요. 조정래의 <태백산맥> 읽고 역사의식을 알았다는 사람이 많아요. 소설이니까 사람들의 가슴으로, 무의식으로 스며든 거죠. 이론은 우파가 우세합니다. 좌파는 감성에 호소하고 구호로 선동합니다. 조정래 씨 훌륭하지. 나는 그에 못 따르지만 써봐야죠.” 

▲ 2012년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복거일 작가는 “1년은 본인 의지로, 나머지 2년은 우남의 힘으로 생을 버텨 소설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원칙을 세운 다음 천하없어도 고집을 안 꺾는 성격 

판매 부수로는 ‘그에 못 따르지만’이 타당할지 모르나 작가 비중으로 봐서는 지나치게 겸손한 발언이다. 복거일 작가는 1987년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로 데뷔했다.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작가가 되기 힘든 한국 문단에서 문학 지망생이 가장 선망하는 문학과지성사를 통과한 것이다. 그해 김춘수 선생이 추천 완료해 <현대문학>에서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데뷔 이듬해 <문예중앙>에 ‘미군 철수는 안 된다. 미군을 용병으로 보자. 돈 주고 붙잡자’, ‘교육도 시장경제 원리를 도입하자’는 내용의 칼럼을 기고해 문단을 발칵 뒤집어 버렸다. 

‘원칙을 세운 다음 천하없어도 고집을 안 꺾는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복거일 작가는 그간 우파 이론가로서 소신 발언을 많이 했다. 2006년 10월 금강산에서 남북 작가들이  ‘6·15 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내가 ‘북한에 무슨 작가가 있나. 다 선동선전 요원이다. 북한에 작가가 있다면 아오지 탄광이나 요덕수용소에 갔을 거다. 작가라는 얘기 꺼내지도 말라’고 하니까 문단이 조용해졌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못하는 얘기를 내가 했으니까. 그 일로 문단에서 완전 따돌림을 받았죠.” 

대체 뭐냐, 와글와글 시끄럽긴 했지만 ‘복거일의 정교한 이론’에 시비를 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그가 역사, 과학 등 다방면으로 축적한 지식을 탄탄하게 펼치자 이견(異見)을 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재미로 보고, 글쓰기 위해 보고, 책을 많이 읽는데 그걸 경제학 이론으로 다시 파악합니다. 다들 상식적인 얘기를 하는데 나는 경제학 틀을 갖고 있으니 유리합니다. 경제학이 가장 정교하고 발달한 학문 아닙니까. 사회과학 중에 다른 건 이론이 형성이 안 되어 있으나 경제 현상은 계량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수학공식으로 풀 수 있어요. 나는 가장 훌륭한 소설가는 아니지만 이론만은 튼튼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바른 말 때문에 가족들이 고생하기도 했다. 

“1992년에 ‘쌀시장 개방하라’고 했더니 안식구한테 ‘당신 남편 모가지 따러 갈 테니 대기하고 있으라’는 협박 전화가 걸려왔어요. 물론 안 오지. 말로만 그러는 거지. 나는 괜찮은데 안식구가 걱정이지. 전화질을 하니까.” 

생애 마지막 작품 

문학과 우파 이론가 활동을 동시에 펼쳐온 그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소설, 시집, 평론집을  낸 독특하고 탁월한 기량의 작가다. 지금까지 문학, 사회정치, 경제경영, 인문, 역사, 국어·외국어사전, 예술, 여행, 인물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60권 넘게 출간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공표한 소설 ‘이승만’은 어떤 책이 될지 벌써부터 관심이 비상하다. 원고지 100장 분량의 1회분 ‘워싱턴의 일요일’에 1941년 전후의 국제정세와 당시 이승만의 심경이 해박한 역사 지식 위에서 유장하게 펼쳐진다. 복거일 작가는 참고 자료가 부족해 답답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이 퇴임할 때 경무대를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문서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소설을 쓰려면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해요. 전기를 쓸 때는 워싱턴 몇 번지의 이층집이라고 하면 되지만 소설은 그 집이 남향인지 동향인지, 햇볕은 얼마나 드는지, 얼마나 큰지, 거기서 뭐가 보이는지 다 표현해야 하니까요.” 

소설의 구도가 궁금했다. 

“펄 하버(진주만)에서 시작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끝낼 계획입니다. 조선을 독립시켜달라는 한규설, 민영환의 밀서를 갖고 미국에 갔다가 대통령이 되어 한미상호보호조약으로 튼튼하게 끝났으니 참 멋있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남이 조국을 위해 해놓은 마지막 업적입니다.” 

소설가 복거일이 보는 이승만 대통령은 ‘애국자’다. 

“평생 나라 독립을 위해 일한 분입니다. 그 점이 서재필 선생과 다르죠. 서재필 선생은 나중에 포기하고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살았지만, 우남은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했어요. 프린스턴대학 박사 학위로 미국에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한 번도 다른 길을 가지 않았어요. 책 인세로 집 한 칸 마련했다가 나중에 팔아서 생활 자금으로 썼죠. 미국 장군들이 우남을 올드 패트리어트(나이 든 애국자)라고 불렀어요.” 

우남을 ‘건국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에 대해 “오해는 풀 수 없고 악의는 피할 수 없다. 진실만 말하면 된다. 임시정부는 정식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준비위원회 비슷한 것”이라고 정리했다. 

말기 암 진단 후 글쓰기에 전념 

“우남 이승만과 백범 김구는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친했고 백범은 우남이 뛰어났다는 걸 인정했어요. 두 분은 똑같은 우파 사상을 갖고 있었으나 우남은 미군정 체제에 적응을 잘 했고 백범은 적응을 못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미국에서 생활한 우남은 미국의 체제와 관행이 자연스러웠지만, 일본과 중국이 전쟁하는 무법천지에서 활동한 백범은 미국 문화를 잘 몰랐죠. 미군정 하에서 설 땅이 좁아진 백범이 탈출구로 남북협상에 나선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연구하면서 읽은 ‘심리’의 키워드는 ‘협박’이라고 한다. 

“우남은 이해가 잘 안 될 정도로 뛰어난 분입니다. 세상을 잘 보는 분이어서 정답 제시를 잘했고, 그 뒤 선택을 강요했죠. 6·25 때 북한이 죽기 살기로 치고 내려오자 미국은 한국사람 일부를 제주도로 피신시키고 일본에 망명정부를 구성하려고 했어요. 우남이 주한 미국대사 앞에서 ‘실탄이 두 발 남았는데 한 발은 마누라 쏘고 한 발은 나를 쏘겠다’고 말했어요. 쇼를 한 거죠. 이승만 아니었으면 남한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소설 ‘이승만’은 3년간 연재할 계획이고 다 쓰면 5권 분량이 될 거라고 한다. 

“우남의 생애가 극적인 데다 변화가 많고, 전쟁을 겪은 분이니 쓸 거리가 정말 많죠. 어려운 대한민국을 처음 이끄신 분이라. 전기로 쓸 때 100이라면 소설은 10으로 줄여야 해요. 자잘한 걸 쳐내는 게 문제죠. 50권을 써도 모자라지만 내 목숨이 짧으니….

이 작품을 쓰기로 작정하고 동작동 국립묘지 내의 이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며 지하에 계신 이 대통령께 빌었습니다. 1년은 어떻게든 내 의지로 버텨내겠는데, 그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책을 끝마칠 수 있도록 나머지 2년은 우남께서 제 건강을 책임져 달라고….” 

2012년 2월 66세였던 그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직후 수술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1983년 소설을 쓰기 위해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를 그만둘 때보다 더 결정이 쉬웠다고 한다. 시인 지망생이었던 그는 세상이 요동치던 1980년에 젊은 연구원들이 미래 전망을 묻자 시보다 소설로 답변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소설은 직장과 병행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졌다. 

“임신한 아내도 교직을 그만 둔 상황이어서 둘 다 실업자가 되었지요. 아버지가 안식구에게 ‘아범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 걱정마라’고 하셨답니다. 2주 정도 식은땀이 나더군요. 안 해도 되는 결정을 했으니. 이번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작가니까.” 

▲ 1948년 정부수립경축일 행사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복거일 작가는 “미국에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은 평생을 나라 독립을 위해 일을 한 분”이라고 말했다.

수술 않기로 결심

5년 정도 치료하고 나면 체력 저하에다 재발 공포 때문에 글을 못 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창조성이 떨어지는 것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문단에서 제일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이 암수술 후 고생 끝에 세상 떠나는 걸 보고 수술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진화생물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암 진단 받아도 몇 년은 원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어요. 건드리면 몸이 약해져요. 술도 먹고 누가 담배 권하면 피기도 하죠. 발병하기 전이 문제지, 후에는 괜찮아요.”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나 눕기만 하면 숨이 컥컥 막혔다. 

“내 이성은 결정을 했지만 무의식과 잠재의식은 ‘내가 죽는구나’ 하니 숨이 막힌 거죠.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뭔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불안감,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치료받기도 할 겁니다.” 

한 달 정도 숨 막히는 증세가 계속 되었다. 봄비 내리던 어느 날 새벽,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내년 봄비를 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는데 어디선가 아이 우는 소리가 나더군요.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했죠. ‘이 비가 아버님 무덤에도 내릴까’ 하는데 눈물이 나면서 시가 막 떠오르는 겁니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라는 소설에 당시 심경과 시가 실려 있었다. 

‘보슬비 내리는 소리에/ 앞집 아기 늦잠 자겠네./ 봄비 내리니/ 뒷산 진달래 봉오리 생기 돌겠네./ 봄비 젖으면/ 냇가 버들 물이 오르고/ 부모님 잠드신 무덤 잔디는/ 속잎 나겠네./ 이 봄비 그치면/ 미 골짜기 눈 녹아 흐르고/ 우리 식구들 가슴에도/ 햇살 들겠네.’ 

그날로부터 두 달 동안 50여 편의 시를 쓰면서 마음이 평안해졌다. 

지식의 지도를 그리는 사람

‘한가로운 걱정들을…’은 ‘높은 땅 낮은 이야기’, ‘보이지 않는 손’에 이은 연작으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저술가이자 우파 이론가이며 강연가인 그는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명명했다.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지도 제작자, 지식의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죠.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식을 체계적으로 아는 게 중요해요. 주류 경제학을 바탕으로 생물학적 바탕, 물리학적 바탕 등 다양한 연구하고 있어요.” 
그렇더라도 그는 소설가 이미지가 강하다. 소설가로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는지 물었다. 

“이것도 한 판이지. 뭘 했어도 성공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신의가 중요해요. 은혜를 입으면 평생 잊지 않고, 먼저 배신한 적이 없으니까. 어느 분야든 신의가 있으면 성공합니다.” 

소설 ‘이승만’을 쓰는 힘도 결국 ‘신의’인 듯했다. 그는 생각보다 오래 살았으니 ‘이승만’을 잘 쓰면 여한이 없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온통 흙빛인 2016년 전망을 문의하자 “그럭저럭 굴러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가잖아. 우리나라가 괜찮은 나라니까 3년은 버티겠지 뭐”라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고민을 물어보았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시장경제가 잘 안 되는 게 문제지. 시장경제 이상에 가까워질수록 사회가 발전하는데 시민 대부분이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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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부 2016-02-10 08:18:41
한국에 복거일 작가님 같은 분이 있다는 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일.. 영국이 아닌 한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