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목 따서 박 대통령 앞에 바치자!”
“김일성 목 따서 박 대통령 앞에 바치자!”
  • 정재욱 기자
  • 승인 2016.01.25 15:2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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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발굴] 전두환 前 대통령의 김일성 제거 작전

전두환 전 대통령, 특전사 여단장 시절 1·21사태 보복으로 특공대 조직해 김일성 암살 시도

“김일성의 목을 따서 박정희 대통령 앞에 바치자!”

김일성 암살을 위해 북한 침투공작을 준비하다 해산된 일명 ‘실미도’ 부대의 구호가 아니다.  1970년대 초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시절 특공대를 조직해 평양에 침투, 김일성 암살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 한미 합동 군사작전에 참가한 미 특전사 장병들을 격려하는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시절의 전두환 전 대통령.

송대성 전 세종연구소 소장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직접 들은 발언이다. 송 소장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면 부하들이 보고하지 말고 그냥 알아서 했으면 하는 일이 있다”며 “나는 1970년대 초반 특전사 여단장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하지 않고 단독으로 작전을 진행한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전 대통령이 말한 단독 작전은 바로 김일성 암살 작전이다. 전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북한 게릴라(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가 붙잡힌 뒤 ‘박정희 목을 따러 왔다’고 기자회견까지 하는 마당에 군인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면서 “내가 단독 작전으로 김일성의 목을 가져와서 박 대통령 앞에 바치려고 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 우리 군이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 북한 최고 명령권자를 제거하는, 요즘 용어로 ‘참수 작전’을 계획했던 것으로, 전직 군 통수권자이면서 동시에 전직 장성으로서의 기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송대성 소장에게 밝힌 당시 상황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전 대통령은 극비리에 특전사 부대원 가운데 최정예 요원 300명을 선발하여 특공대를 조직했다. 그리고 도보로 휴전선에서 평양까지 침투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전라도 광주에서 경기도 남한산성까지 300㎞의 거리를 10일 만에 민간인에 발각되지 않고 도보로 주파하는 훈련을 수개월 동안 반복했다.

실제 북한 침투 시에는 야간을 이용해 인적이 드문 산악지대로만 행군해야 하기 때문에 모의훈련도 같은 조건에서 실시했다. 처음에는 부대원들이 체력적으로 힘들어 하고 야간 산악 행군에 부상자도 생겼지만, 훈련이 거듭될수록 광주에서 남한산성까지 이동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들 특공대는 평양에 진입한 후 실시될 북한의 검문검색에 대응하기 위해 대항군 조를 별도로 편성해 이들의 제지를 자연스럽게 모면하는 가상훈련을 하기도 했고, 주석궁 진입 후 전광석화처럼 경비병을 제압하고 김일성을 제거하는 실전 훈련도 반복했다.

특공대 평양 침투, 주석궁 장악 계획

전 대통령의 계획은 대담무쌍했다. 300명 정도의 특공대를 평양에 침투시켜 주석궁을 점령하고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를 제거하는 작전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거듭된 특공 훈련으로 상당한 자신감을 가진 전 대통령은 성공 가능성도 크다고 판단했다.

불행하게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단독 참수작전은 마지막 단계에서 좌절됐다. 한미동맹의 특수성을 감안해 미군 관계자에게 귀띔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미국이 이때부터 전 대통령과 부대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작전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때 내가 거사에 성공했으면 북한 핵무기 때문에 온 나라가 휘둘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 작전을 성공시키지 못한 게 가장 아쉽다”고 회고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김일성 제거를 결심한 계기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노리다 실패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와대 옆구리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북한 게릴라 31명 가운데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도주했으며, 김신조 1명만 생포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때 이들을 격퇴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당시 청와대 내곽 경비를 담당한 경복궁 주둔 30대대의 대대장(중령)이었던 전 대통령이 박격포를 세검정 사거리에 발사하여 북한 게랄라들의 전열을 흩어지게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유사시에 박격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사전 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의 기억이 군인 전두환의 뇌리에 단단히 박혀 있다 몇 년이 지나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이 된 후 응징작전을 위해 행동에 옮긴 셈이다.

“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이르다”

특전사는 1955년 육군 소위로 임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군인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대위 시절인 1960년 혹독하기로 유명한 미국 포트베닝 레인저 스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50년 시작된 미군 레인저 스쿨 과정은 60일 동안 3단계에 걸쳐 장애물 통과, 독도법, 정찰, 산악훈련, 생존훈련 등의 훈련을 거쳐 최정예 군 지휘관을 양성해 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30세의 나이에 20대 초반의 미군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며 우수한 성적을 낸 것이다. 미군들의 레인저 스쿨 과정 평균 수료율은 45%였다.

비록 최종 단계에서 미국의 제지로 무산됐지만, 만일 이때 김일성 제거 작전이 성공했다면 지금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북한 핵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안보 상황 자체가 변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물론 5·18의 과잉 진압이나 비자금 문제, 거액의 추징금 체납 등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국가 안보를 지키는 국군의 일선 장성으로서 보인 결연한 리더십은 현재 안보 위기 상황에 직면한 우리 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군인 정신으로 맺어진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후배 장성들은 아직도 끈끈한 인간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또는 1주일에 한 번 만나는 식으로 정기적으로 전 대통령의 자택에 모여 식사를 하며 우의를 다지는 식이다.

이 자리에 함께 했던 송대성 소장이 놀란 점은 올해 팔순이 된 장세동 전 비서실장 같은 전직 장성들이 아직도 전 대통령 앞에선 부동자세로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앉아 깍듯이 전직 대통령을 예우한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침략을 받으면 반드시 응징을 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네 번의 북한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징징거리면서 “좌시하지 않겠다”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고 공갈포 날리며 참혹한 변명만 늘어놓는 것은 국가나 군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특공대 300명을 침투시켜 주석궁을 점령하고 김일성의 목을 따오겠다는 대담무쌍한 작전을 대통령에게 보고도 않고 진행하려 했던 그는 진정한 군인이었다. 일베 사이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전땅크’라는 별명을 부여한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비판 여론에 대해 송대성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직은 이르다. 한 100년은 지나야 나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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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밤에 2016-02-01 03:16:41
서울 광수등으로 적화일보 전인데 한가하게 논리만 펴고 있나요? 공산당 때려잡는 행동에 왜 안 나서나요?

한산도 2016-02-01 03:14:53
5.18 이 왜 과잉진압입니까? 1차 대법원 판결이 옳은 것이고 김영삼때 것은 대선자금 폭로방지위해 영삼이가 잡아들인 것인데 무슨 말씀하시는지요?
systemclub.co.kr 에서 북괴군 사진 300명 사진가지 다 비교해 놨는데, 미래한국은 왜 그런 기사 하나도 않 싣나요? 위선 아닌가요? 아니면 정부에서 돈 받고 못 싣게 편집인들이 하나요? 두고 보겠읍니다.진짜 액구자인지 조갑제처럼 가짜 애국ㄱ자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