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은 무조건 선(善)인가?
통합은 무조건 선(善)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16.01.2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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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통합에 대한 오해 깨기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개인이나 집단을 용인할 수는 없다. 공동체의 역사, 우리 체제의 정당성, 헌법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대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소속기관으로 발족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들어 대통령 소속기관으로 만들어 운영했다. 두 정부에서 서로 다른 이름의 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실제로 별다른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두 정부가 ‘통합’을 우리 사회의 절실한 과제로 인식하고, 이를 풀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그동안 통합에 대한 세미나와 관련 전문가들과 대화하면서, 통합에 대해 일반인들의 기본인식이 너무도 다름을 알게 되었다. 통합 대상과 정체성에 대한 생각은 일부 자유주의 중심의 지식인들 사이에 공유될 뿐, 다수의 생각과는 괴리를 가진다.

특히 ‘경제민주화’라는 정의되지 않은 개념을 토대로 시장경제의 기본 틀을 흔드는 여러 가지 정책들을 입법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정치권이 사회통합이 아닌 사회 분열의 진앙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통합에는 엄청난 비용이 따른다 

일반적으로 통합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회통합에는 사회적 비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물론 사회적 비용이 존재하지 않으면, 통합수준은 높을수록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만약 통합에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높은 통합수준이라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진 않다. 

통합 관점에서 볼 때 북한의 통합수준이 한국보다 월등히 높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 통합 관점에서만 보면, 북한이 한국보다 좋은 사회다. 그러나 이런 논지에 찬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통합에 따른 비용에 대한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통합의 비용은 개인에 대한 자유를 억제하는 비용, 혹은 개인 프라이버시 비용이다. 북한 사회가 높은 통합수준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기 때문에 가능하다. 

통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기 위해 통합 비용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접근해 보자. 통합에는 두 가지 비용이 존재하는 데, ‘정책의 거래비용’과 ‘개인자유 억제비용’을 들 수 있다.

먼저 통합수준이 높을수록 정책을 집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거래비용’이 낮아질 것이다. 아무리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고 해도, 사회통합 수준이 낮을 때는 집행에 따른 엄청난 사회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 있었던 쇠고기 촛불시위가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두 번째 비용인 ‘개인자유 억제비용’은 사회 통합 수준이 높을수록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사회 통합 수준에 따라 두 가지 비용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를 간단히 <그림 1>로 표현할 수 있다.

두 가지 형태의 비용이 존재하면, 통합으로 인해 발생하는 총사회비용은 U자 형태의 모양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사회 통합 수준이란 바로 총사회비용을 극소화하는 Q*임을 알 수 있다. 즉 통합수준이 높을수록 좋은 게 아니고, 통합에 따른 총 사회비용을 극소화하는 ‘적정한(optimal) 통합수준’이 존재한다는 결론이다. 

적정한 수준의 통합수준에 대해서는 사회학자인 송복 교수의 <통합: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도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볼 수 있다. 

“통합의 본질은 ‘적절한 불균형’이며, ‘적절한 불평등’이다. …너무 불평등하거나 너무 불균형 상태가 되면 그 사회는 깨진다. 반대로 너무 균형이 잡혀 있거나 너무 평등하면 그 사회는 정체된다. 성장도 없어지고 발전도 없어진다.” 

국민 100% 통합은 가능한가? 

정부는 통합을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으면서, 국민 100% 통합을 애기한다. 모든 국민을 통합이란 깃발 아래 모이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국민 100%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모든 국민이 통합의 기본 방향을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두고 이에 동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기본 사항에 대해 반대하는 부류와는 절대 통합을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그 자체에만 집착한다면, 이때는 무엇을 위한 통합인가에 대해 답변을 주지 못할 것이다. 

통합 방법에 관한 일반인들의 인식에서 놀라운 사실은 극단 진영에 있는 인사들을 모아놓으면 통합이 된다는 사고다. 정부에서 구성한 통합 관련 위원회의 구성인사를 보면, 이런 사고를 확연히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이 묶어 놓으면 통합될 수 있다는 사고는 심각한 인식상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도 동의하지 않는 몇몇 인사들마저 특정 이념의 대표격까지 부여해 대화 선상에 두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으려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큰 두 극단의 집단으로부터의 비난을 줄이기 위한 관료 혹은 정치집단들의 이기적 행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체성마저 공유하지 못하는 집단에 대해서는 ‘통합’이 아닌, ‘법치’를 앞세워야 한다. 이들 집단은 사회를 ‘통합’이 아닌 ‘분열’로 내몰기 때문이다. 어설픈 감상적 통합의 손짓은 이들 집단에 사회를 분열시키는 명분만 줄 뿐이다. 신중섭은 ‘외칠수록 멀어지는 사회통합’이란 글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통합에는 배제의 논리도 포함되어야 한다.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개인이나 집단을 용인할 수는 없다. 공동체의 역사, 우리 체제의 정당성, 헌법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통합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 통합 수준을 결정하는 대표적 요인으로 소득불균형을 꼽는다.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되면, 소득분포 수준을 정책으로 강제적으로 조정함으로써 통합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득분포를 강제적으로 조정하는 대표적인 정책수단이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이다. 따라서 고소득층의 세금을 높이고, 복지를 확대하는 것을 통합을 위한 좋은 정책으로 생각한다. 

소득이전 정책으로 통합을 달성할 수 있는가? 

필자는 ‘사회통합의 필요성과 추진 방향’이란 논문(2012년 사회통합센터 발족 기념 세미나 발표 논문)에서 설명했듯이 세금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국 국민들이 부담하게 되는 경제적 비용이 존재하고, 복지에는 수혜계층이 공짜이기 때문에 낭비하는 경제적 비용이 발생한다. 따라서 통합수준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이 결국 국민 전체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성장과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소득불균형이 양호해도 절대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다. 소득불균형을 완화하는 정책들은 필연적으로 장기적으로 성장의 희생을 치르게 하므로 통합을 위한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OECD는 매년 국가별로 사회통합지수(social cohesion index)를 발표한다. 이들이 지표산정에 고려하는 변수를 보면, 크게 ‘타인에 대한 신뢰(trust)’, ‘소수 계층에 대한 관용성(tolerance)’, ‘사회제도에 대한 신뢰(confidence in social institution)’, ‘사회행위 수준(level of social behavior)’, ‘투표율(voting)’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사회 통합 수준을 평가하는 데 소득불균형 수준이나, 조세 및 복지정책과 같은 소득이전 정책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OECD 국가들이 고려하는 변수들은 모두 단기적으로 정책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장대홍은 ‘진정한 사회 통합은 자생적 질서’라는 글에서 이들을 시장경제처럼,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고 규정하며, 이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화합 수준이 높은 사회, 진정한 사회 통합에 가까운 사회는 법치주의가 확립된 사회, 자생적 질서가 형성되는 사회이다.” 

▲ 지난 대선 새누리당에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던 김종인 씨와 경제민주화를이유로 국회를 마비시키고 있는 야당의 문재인 대표가 만났다. 정치권에선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통합을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분열로 갈 수밖에 없다.

정치권과 사회분열 

정치권에선 ‘경제민주화’라는 명분을 서로 쌓으려는 경쟁을 하고 있다. 경제민주화란 정의되지 않은 불확실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잘못된 감성적 쏠림 구조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조장하고 선점하려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불확실한 개념을 입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정책화하는 데 대한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경제민주화는 본질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양분하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 수도권과 지방, 대기업과 중소기업, 대기업과 하청업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 정치, 지역 측면에서 양분적인 구분이 가능하다. 이렇게 양분화 시키면 이들 집단들 간에는 수직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약자는 수적으로 많다는 정치적 장점이 존재한다. 

정치인의 관심은 표이며, 다수의 논리로 정치시장의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양분적인 구분은 매력적인 전략이라 볼 수 있다. 사회를 양분화하여 약자인 다수를 위한다는 정치적 제스처는 다수 약자에게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다.

따라서 정치시장에서 선거에서 이기려는 전략은 사회 구성원을 다수와 소수로 구분해야 하며, 이는 통합 관점에서 해석하면 통합보다는 분열시키는 것이 정치인들의 사적(私的) 이익을 더 높일 수 있는 구조다. 

결국 한국의 정치시장에서 정치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전략이 사회분열이다. 따라서 현재의 정치시장은 본질적으로 한국의 장기적 경제성장에 좋은 정책이 생산되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다. 정권을 잡은 대통령은 ‘통합’을 중요한 시대과제로 생각하여 추진하지만, 정치권에선 ‘분열’로 간다. 

정치권에선 겉으로는 분열을 얘기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정치권의 행보가 ‘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명분을 앞세워 통합을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분열로 갈 수밖에 없다. 모든 관계를 ‘갑을(甲乙) 관계’로 양분화해서 접근하면, 강하고 가진 자를 규제하는 정책이 강구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장경제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신분에 의한 소수 집단이 지배하는 고착되는 구조가 아닌,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가진 자가 될 수 있고, 가지지 못한 자도 될 수 있는 동적(動的)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대기업도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쌓아놓은 놀라운 업적을 갑을관계라는 단순한 논리로 흐트러놓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통합을 시장경제와 연관해서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며, 김영용은 ‘사회갈등의 요인과 완화 방안’이란 글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결국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으로 가는 길은 대중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운행질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정부와 정치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것뿐이다.” 

‘강요된’ 통합이 아닌 ‘자발적’ 통합이 진정한 통합 

박근혜 정부는 통합위원회를 발족하고, 통합을 정치적 해결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접근 방향이 옳아야 한다. 통합은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정체성을 인정하는 집단 간에 이뤄져야 하는 공감대다. 이러한 근본 토대를 분명히 해야만 무조건 섞어놓기만 하면 통합이 된다는 그릇된 미신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또한 통합 그 자체에 목적을 두다 보면 정부와 정치권이 정책적 수단을 통해 강제하는 ‘강요된’ 통합으로 흐르기 쉽다. 지난 정부의 통합정책이나, 최근 정치권이 골몰하는 경제민주화 역시 소득이전적인 조세 및 복지정책이 통합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바 크다. 

이런 정책들은 실패하거나 오히려 부작용만 초래했다는 것이 지난 역사의 교훈이다. 소득이전적 통합정책이나 경제민주화와 같은 규제정책 같이 강요된 통합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통합은 시장경제처럼 자생적 질서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생적 질서로서 통합은 민간이 중심이 되어, 오랜 기간 동안 바른 인식을 심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지는 시민이라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도 베풀 수 있다. 

이러한 민간 중심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결국 지속적 성장에서 나온다. 통합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섣불리 사용하는 정책수단, 입법들이 한국의 성장 동력을 꺼뜨리고 발전을 저해해서는 더 큰 분열만 초래할 뿐이다. 

강조하건대 우리 시대의 통합의 지향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에, 방법론은 민간 주도의 ‘자발적’ 통합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통합이 실현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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