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는 이념적 기회주의
중도는 이념적 기회주의
  • 미래한국
  • 승인 2016.01.28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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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경계해야 할 중도

진실과 오류 양자 사이에 중간 지점은 있을 수 없다. ‘제3의 길’은 일관된 원칙이 없어 나침반을 잃고 헤매는 정치적 방황 

중도는 개념 자체로 긍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중도라는 말은 양 극단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말이다. 철학에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용이라고 했다.

▲ 신중섭 강원대 교수·고려대 철학 박사·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동양에서도 중용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극단을 기피하는 인간의 심성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것은 균형을 유지한다거나 치우치지 않는다거나 온건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도가 항상 긍정적인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정국에서 좌익과 우익이 극도로 대립하면서 중간에서 어정대는 세력이 생성되었다. 이때 이도 저도 아니 사람들을 중도파라고 했다. 이들은 주로 기회주의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양동안, <사상과 언어>, 북앤피플, 2011, 52∼53쪽). 

이념적으로 중도란 말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생성된 이후에 나온 개념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지나치게 대립하여 그것들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어 사회가 불안해지자 그것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나온 개념이 중도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허용할 수 없는 중도도 있다. 중도라는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나 전체주의와의 중도를 주장하는 경우다.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려는 세력과 자유민주주의 사이에는 중도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중도를 허용하면 자유의 역설과 민주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 

좌파와 우파 구별법 

이러한 중도는 양극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지닌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헌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정책이 존재할 수 있고 극우와 극좌 사이에서 중도적인 것처럼 보이거나 중도로 통칭되는 정책 결정이 있을 수 있다.

중도주의는 우파와 좌파 또는 보수와 진보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정책을 실시하자는 이념이고, 이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중도파다. 중도우파(中道右派)는 좌파와 우파의 사이에서 우 쪽으로 약간 기운 것을 뜻하며, 중도좌파(中道左派)는 약간 좌 쪽으로 기운 것을 말한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이렇게 정의된다. 

따라서 중도를 설명하려면 우선 우파와 좌파를 설명해야 한다. 좌파와 우파를 구별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정규재는 좌파와 우파의 구별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했다(“좌파와 우파 구별법”, 한국경제신문, 2011.04.24.).

‘시장경제가 정의로운 체제라고 생각한다면 우파다. 그러나 약탈이며 약육강식의 체제라고 생각한다면 좌파다. 국가의 개입이 공익을 증진시킨다고 주장하면 좌파가 분명하고 국가 아닌 시장이 결과적으로 공익을 증진시킨다고 생각하면 우파다. 국가가 국민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좌파지만 국가가 내 밥그릇을 책임질 경우 결국에는 나의 자유도 가져갈 것이라고 본다면 우파가 된다.

세계 금융위기가 시장경제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면 좌파이며 정부의 포퓰리즘과 화폐 타락의 결과라고 본다면 우파다. 임금을 투쟁의 결과라고 본다면 좌파가 되고 노동활동, 다시 말해 생산성의 결과라고 본다면 우파다. 거리 폭력에 대해 관용적이면 좌파요 법치주의면 우파다. 

산업 활동을 중단시키지 않으면 지구환경은 파괴될 것이라고 본다면 좌파요, 가난한 나라의 강물이 깨끗할 수 없으며 과학기술을 통해 환경 문제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면 우파다. 지식재산 보호법이 인류 공동의 자산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어 특혜를 주는 악법이라고 본다면 좌파요, 역으로 개인의 지식을 인류 복지에 기여하도록 장려하는 법이라고 본다면 우파다.

자유가 인간의 본질적 가치라면 우파이며 복지가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좌파다. 민주주의를 기회의 평등이라고 본다면 우파요 결과적 평등의 체제라고 보면 좌파다. 현실을 천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파요 지옥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좌파다. 

이들 기준은 보편적이어서 세계적으로도 다를 것이 없다. 한국에서만 작용되는 세 가지 기준이 더 있다. 집단지성이 투표소와 시장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면 우파요, 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위 군중의 지혜라고 주장한다면 좌파다.

한국 현대사를 성공의 역사라고 보면 우파가 되고 오욕의 실패한 역사라고 본다면 좌파다. 김정일 체제로는 동포의 인권도 없다고 생각하면 우파요 북한 인권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보면 좌파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중도를 표방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일부 좌파는 평등만을 강조하던 입장을 버리고 변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제3의 길’, ‘사회투자국가론’, ‘생산적 복지’와 같은 중도좌파의 슬로건을 표방했다.

영국의 노동당이나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서 시장의 효율성과 생산적 복지를 결합하려고 했다. 이 경우는 좌파가 우파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경제민주화’, ‘상생’ 등은 우파가 좌파 쪽으로 이동한 결과다. 

개별 정책에서 중도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적으로 우파와 좌파, 중도가 표방하는 확정된 정책의 꾸러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구분은 정도의 문제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 물음에서 당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10점, 확신이 없으면 5점, 정부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0점을 준다. 그런 다음에 다이아몬드 차트에 당신의 점수를 표시한다(데이비드 보아즈, <자유주의로의 초대>, 강위석·김이석 외 역, 북코리아, 2009, 161~163쪽). 

위의 그림에서 경제적 자유에서 100점, 개인적 자유에서 100점을 맞으면 완벽한 자유지선주의자다. 경제적 자유에서 100점, 개인적 자유에서 0점을 맞으면 완벽한 우파(보수주의자)가 된다. 반면에 개인적 자유에서 100점, 경제적 자유에서 0점을 맞으면 완벽한 미국식 자유주의나 좌파가 되고, 양쪽 모두에서 0점을 맞으면 권위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개인별 이념 조사에서 이런 경우는 드물고 대체로 섞여 나온다. 사람들은 이념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우파적 의견이나 정책을, 때로는 좌파적 의견이나 정책을 선호한다. 개념적으로 ‘중도’는 존재하지만, 구체적 의견이나 정책에서 ‘중도적 의견이나 정책’은 없다. 

우파란 상대적으로 우파적인 의견이나 정책을 많이 취하는 사람들이고 좌파란 상대적으로 좌파적인 정책을 많이 취하는 사람이다. 중도파란 우파적인 것 절반 정도, 좌파적인 것 절반 정도를 취하는 사람들이다. 

중도, 제3의 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를 좌파와 우파를 넘어 ‘제3의 길’로 해석하려는 관점도 있다. 중도는 좌와 우를 모두 포괄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비유적으로 서울과 부산의 중간은 대전이지만 서울과 부산의 중도는 대한민국 전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중도는 단순히 좌와 우 사이의 이념이 아니라 전체를 포괄하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통합과 조화를 높이 평가하는 우리 정서에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념이 수반하는 구체적인 정책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은 구체성을 띨 수밖에 없어 전체를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국민들의 이념적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여론 조사에 잘 나타나 있다. 한 중앙 일간지는 국민들의 이념적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보수(우)―진보(좌) 이념의 자기 평가를 0(진보)―10(보수)의 범위 내에서 선택하도록 했다.

이 조사는 ‘정치 차원’, ‘경제 차원’, ‘사회 차원’으로 구별하여 질문을 작성했다. 2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한국정치학회와 중앙일보가 2002년 1월과 2004년 1월에 국회의원들과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념성향 조사). 

가장 보수(10), 보수(6.7), 진보(3.3), 가장 진보(0)를 선택지 1·2·3·4에 부여하여 정책 항목별 각각에 대해 선택한 선택지에 점수를 부여하고 평균을 산출하여 이념 성향을 결정한다. 모든 문항에 대해 1을 선택한 사람은 총점이 100점이고 평균은 10점이 된다. 2004년에 국민이념 평균은 5.32가 나왔다. 평균 5.32이지만 설문자들의 이념 성향은 0에서 10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이념적으로 중도 성향이 많다는 해석은 평균값 5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지를 단순화하면 보안법 유지와 개정 또는 폐지다. 입장은 3가지로 나누어지지만 개정을 선택한 사람들은 중도가 아니라 진보, 폐지를 선택한 사람들은 가장 진보의 값을 얻게 된다. 따라서 구체적인 정책 선택에서 중도적이라는 말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다만 중도는 평균값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론조사 기관의 설문지 문항 10을 보자(‘2006년 국민 이념성향 조사’,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2006년 5월). 

이 문항에 대한 답변 결과는 흥미롭다.

전체 응답자 883명 가운데 1이 15.5%, 2가 42.2%, 3이 26.7%, 4가 15.6%가 나왔으며, 1·2를 합하면 57.7%, 반대한다고 답한 3·4를 합하면 42.3%이다. 편의상 찬성한 사람을 우파, 반대한 사람을 좌파라 한다면 중도파의 자리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1·2·3·4에 일정 값을 부여하여 가장 낮은 점수에서 가장 높은 점수까지 분포도를 조사하면 중도파가 나올 수 있다. 곧 구체적인 정책에서는 중도파가 있을 수 없고, 여러 정책에 대한 대답을 종합하여 평균을 내면 중도파가 나온다. 

이 여론조사에서 “본인의 이념적 성향이 다음 중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매우 보수는 8.3%, 다소 보수는 27.9%, 중도는 47.4%, 다소 진보는 13.0%, 매우 진보는 3.4%가 나왔다. 종합적으로 보수는 36.2%, 중도는 47.4%, 진보는 16.4%가 나왔다.  이것은 스스로 판단한 자신의 이념적 성향이다. 

이 결과가 말하는 것은 스스로 보수(우)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41.6%가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반대하며, 진보(좌)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55.7%는 민영화에 찬성하고 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전형적인 우파 경제 정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이는 개인의 이념적 성향과 정책 선호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도 강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 

좌파와 우파, 중도파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보자. 예를 들어 어떤 사안에 대한 좌파 정책은 L, 우파 정책을 R로 표시할 때, 그 사안에 대해 L, R이 아닌 M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좌파와 우파와 구별되는 중도파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좌파와 우파의 존재를 전제로 한 중도파는 아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경우가 정책과 관련해서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다. 

이념에 따른 개별 정책은 우파적 아니면 좌파적이다. 예를 들어 10개의 문제에 대해 일관적인 좌파는 모두 좌파적 정책을 제시하고, 일관적인 우파는 모두 우파적 정책을 제시한다고 하자. 그러나 일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좌파적 정책을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우파적 정책을 선호할 수도 있다. 

10개의 정책에 대해서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몇 가지 예만 들어 보자. 

(1)은 좌파 (2)는 우파 (3)은 중도파 (4)는 중도좌파 (5)는 중도우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도파·중도좌파·중도우파를 L과 R의 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기계적인 판단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L과 R의 수가 하나 늘 수도 있고 줄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좌파와 우파, 중도파의 존재를 개념적으로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만 좌파가 될 수 있고 우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좌파는 분배 문제에 대해서는 분배를 강화하는 정책을 선호하고, 우파는 성장 정책을 선호해야 한다.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좌파라면 북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선호하고, 우파라면 강경한 입장을 선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 강화는 R의 숫자를 L로 대체하려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체가 어느 시점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대체된다면 ‘중도 강화’가 아니라 중도를 지나 좌파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남북문제와 대미관계에 대해서는 계속 R을 유지하면서 분배 문제와 세금 문제,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L의 요소를 더해간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도 강화’는 “국가적 정체성,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법치 그리고 세계로 열린 대한민국 등의 중심적 가치는 지키면서 중도에 서 있는 세력들을 좀 더 포용해 다가가자는 의미”이지 “가운데 서서 양쪽(보수·진보)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변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적 가치를 확고하게 지킴으로써 보수층의 지지를 유지하면서 여러 사정으로 잠시 등을 돌린 중산층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중도의 다른 표현인 ‘제3의 길’과 같이 대립적인 두 패러다임의 장점만을 뽑아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 개념이나 정책은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유기적으로 얽혀 의미를 획득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요소들을 선별적으로 결합하면 모순을 일으키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이것이 모든 절충주의나 ‘넘어서려는(beyond)’ 이론들이 갖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다. 

‘제3의 길’의 실체 

‘제3의 길’은 이것저것을 한꺼번에 꾸려 넣을 수 있는 여행용 가방처럼 보인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주장까지도 ‘제3의 길’에 들어갈 수 있다. ‘제3의 길’이 내세우는 ‘사이’, ‘위’, ‘넘어서’라는 수사(修辭)는 중용(中庸)이라는 전통적 미덕과 결합하여 우리의 심성에 호소한다.  

‘제3의 길’이 많은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끌어 모아 적(敵)이 없는 정치를 원하는 정치가들의 본능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모든 정책은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반대자가 없는 정책’은 미덕(美德)이 아니라 악덕(惡德)이다. 

하이에크의 지적과 같이 진실과 오류 사이에는 중도가 있을 수 없다. 서로 상충하는 원리들 사이에서 조화는 창조될 수 없다. ‘제3의 길’은 ‘경제의 효율’과 ‘분배의 정의’를 추구하지만, 이들을 동시에 추구하기는 힘들다.

생산과 분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부의 분배 방식이 부의 생산량에 영향을 미친다. 좌파가 말하는 ‘사회 정의’와 시장 경제는 서로 상충한다. 사회 정의의 원칙을 받아들이면 시장 경제를 온전하게 보전할 수 없다. 양자 사이에 중간 지점은 있을 수 없다. 

시장과 개인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국가를 사회 정의의 주체자로 설정하는 사회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경제 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상대적 빈곤과 차별이 없을 수는 없다. 의료와 교육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정부 지출을 줄일 수는 없다. 중앙 정부의 역량이 확대되면서 지방 정부의 권한이 강화될 수는 없다. ‘제3의 길’은 요술 단지가 아니다. 

‘제3의 길’은 일관된 원칙이 없어 나침반을 잃고 헤매는 정치적 방황에 비유될 수 있다. 상황만을 고려하는 실용주의적 정책 운영은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 정책 혼선만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상황과 편의에 따라 정책을 세우면 혼란만 야기하고 불필요한 정책 실험 비용을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제3의 길’은 공정성과 사회 정의, 자유와 기회의 평등, 연대와 타인에 대한 책임이라는 불변적인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오늘의 세계에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의 감상적인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제3의 길’은 “중대한 개혁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정책을 다 포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지만, 그 어느 것을 보장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중도는 실체가 불분명한 개념이다. 정치적으로 중도는 ‘온건한’ 입장,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입장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에 대응하는 정치적 입장을 설정하기는 어렵다. 좌우, 보수와 진보의 중간에서 양자의 이념과 정책을 선별적으로 선택한 것이 중도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중도’라는 말보다는 ‘이념적 혼합주의’ 또는 ‘이념적 기회주의’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의 주관적 이념은 조사할 때마다 변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 표(한겨레신문 2011년 5월 11일)는 이런 경향을 잘 보여주며, 정치권은 이런 경향에 반응하기 위해 중도를 표방한다. 

현실적으로 여론조사에서 중도파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념적 일관성을 갖지 못하고 사안에 따라 좌우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선거 때가 되면 ‘당신은 이념적으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중도파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나온다. 중도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아직 좌파를 찍을 것인가 우파를 찍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이나 정당은 이런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오기 위해 중도를 표방한다. 중도 표방을 하는 정당이 많으면 정당 정책의 이념적 특성은 사라져 정당 정책들이 비슷해진다. 우파 정당이 좌파 정책을 택하고 좌파 정당이 우파 정책을 선택한다. 우파 정당과 좌파 정당이 ‘중도 강화’를 표방하면 이념적 성향이 분명한 유권자들은 혼란스럽게 된다. 

선거 때가 되면 유권자들의 표심을 살펴 특정 정책이 인기가 있으면 그것을 양 정당이 표방하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지난번 대선 때 양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 사이의 이념 격차는 넓어진다는 조사도 있다. 다음 오른쪽 표가 보여주듯이 정치권에서는 이념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어떤 정책에서는 또 어떤 정책에서는 상반된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나 복지에 대해서는 유사한 입장을 취하면서 남북관계나 대미관계에 대해 서로 상반된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한 나라에서 이념 격차가 좁은 것이 좋은지 넓은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위의 사실을 보도한 중앙일보(중앙일보, 2014년 1월 8일)는 “국민은 중도로 가는데 여야 이념 더 벌어져 ‘정치가 갈등 키운다”고 했다.

좁은 것이 좋다고 믿는 사람들은 넓은 것을 갈등의 소지가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의 차이가 선명할수록 이념 격차가 넓어지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국민의 선택도 쉬워질 수 있다. 

중도는 이념적 기회주의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중도는 정해진 내용을 갖는 이념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중도는 ‘온건한’ 입장,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입장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에 대응하는 정치적 입장을 설정할 수 없다.

이념적 일관성의 결핍으로 좌파와 우파의 이념을 체계 없이 섞은 것뿐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중도’라는 말보다는 ‘이념적 혼합주의’ 또는 ‘이념적 기회주의’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중도가 갖는 이념적 내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도라는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중도를 표방하는 정당이나 정책이 나오는 이유는 유권자들의 주관적 이념 조사에서 중도가 많이 나오고 정당이나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이에 영합하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은 포퓰리즘으로 흐른다. 우리는 중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여 그것의 부작용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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