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살림 검소하게 하라”
“나라 살림 검소하게 하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2.05 02: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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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인간 이승만②

“정부 예산안 편성할 때 국회 심의보다 이승만 대통령 결재 받는 것이 더 까다로워(백두진)”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내로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첫 월급을 받았을 때(1948년)였다고 회고했다. 그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에게 붓글씨로 안빈낙업(安貧樂業)이라는 글씨도 함께 써 줬다. 

이승만은 젊은 시절 한때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한시(漢詩)를 짓곤 했는데, 구국운동을 하면서 나라 위해 중요한 일을 할 때 음주로 실수를 할 우려도 있다면서 술을 끊었다. 자신이 술을 입에 대지 않다 보니 술 마시는 사람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음주와 관련해서는 예외가 두 사람 있었다. 한 사람은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었고, 다른 사람은 초대 사회부 장관 전진한이었다. 

이시영은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종종 경무대를 방문했다. 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경무대 비서들이 현관까지 마중 나가 부축해서 모셔야 할 정도로 그는 고령이었고 거동이 불편했다. 

이승만에게 부통령의 방문 사실을 보고하면 이승만은 “뭘 하러 또 오셨나? 그 분과 만나도 별 이야기가 없어”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만나면 신변잡담에 이르기까지 장장 몇 시간을 허비하게 되니 이승만이 지쳐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승만은 이시영 부통령을 위해 특별히 위스키를 접대용으로 내놓기도 했다. 

초대 사회부 장관 전진한은 자타가 공인하는 호주가(好酒家)였다. 하루는 국무회의가 끝난 후 이승만이 박용만 비서를 호출했다. 대통령은 찌푸린 얼굴로 방문을 열어젖히면서, “거 전진한 장관 보구 박 비서가 말 좀 해! 국무회의 나올 때는 술 먹고 나오지 말라고 전해! 도무지 술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 못 견디겠어. 저기 문들 다 열어. 술 냄새를 없애야겠어”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정부 재정 절약을 위해 국회에서 많은 수고를 해주어 감사” 

박용만이 전진한 장관에게 대통령의 지시를 전하자 “박 동지. 장관도 좋지만 말이야, 아침에 막걸리를 몇 잔 안 하면 종일 기분이 나지를 않어. 그저 몇 잔해야 기분도 상쾌하고 일도 잘 된단 말이야. 막걸리를 못 먹게 하면 나 장관 노릇 못 해먹겠어. 장관 감투보다 막걸리 맛이 좋지” 하면서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막걸리를 마셨다. 결국 전진한은 장관에 임명된 지 4개월 만인 1948년 12월 23일 사임했다. 

이승만은 나라 일을 맡은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면 그런 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고 하여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도 지붕 새는 것을 수리하는 일 외에는 손을 못 대게 했다. 이승만은 일본식인 경무대의 방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경비 절약을 위해 일제 시대에 만든 다다미방조차 개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 1948년 봄 애완용 노루와 이화장 본채 앞에 선 이승만 대통령. 이 대통령은 자기 집을 고치는 곳에서부터 부정이 싹튼다면서 이화장에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신만 검소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나라살림도 검소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백두진이 재무부 장관 시절 정부 예산안을 편성할 때 국회 심의보다 이 대통령의 결재를 받는 것이 더 까다로웠다고 한다. 백두진의 회고다. 

‘어느 날 이 박사 주재로 예산 관계 회의를 할 때였다. 묵묵히 설명을 듣고 있던 이 박사가 “잠깐, 그 공사에 1억 원이 든다고 했는데, 자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나?” 하고 묻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그건 시멘트가 몇 부대, 철근이 얼마, 노임이 얼마, 무엇이 얼마가 드니 1억 원이 나오는 것이라 대답했다. 

이 박사는 책상을 탁 치며 “그걸 아니까 그렇게 비싸게 들지. 자넨 그걸 몰라야 해. 무조건 정부는 이런 이런 공사를 하니 할 사람은 나오라고 큼직하게 써 붙여. 싼 시멘트나 철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고, 싼 노임으로 사람을 쓰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이걸 미리 얼마가 든다고 예산에 딱 박아놓으니까 비싼 공사를 하게 되는 거야” 하는 것이었다.

이 박사가 1951년 여름 정부기관에 경쟁 입찰제의 실시를 명령한 것도 이때부터였다.’(백두진, <재계회고>⑦,  한국일보사, 1984, 148쪽.) 

독수리 타법으로 직접 외교문서 타이핑 

이승만 시절 국회 재경위원장을 지낸 이재형은 1952년 총예산 심의 때 정부 일반경비 중 국방부의 서무비를 대폭 삭감했는데, 이 대통령은 민복기 비서관을 이재형 위원장에게 보내 “정부 재정 절약을 위해 국회에서 많은 수고를 해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왔다. 

이승만은 위로 누님 두 분과 형님이 한 분 있었으나 형은 어린 시절 천연두로 사망했다. 큰누이는 황해도 평산 해주 우 씨 집안의 우태첨에게 출가하여 아들 우종구를 두었고, 그 손자가 후에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했던 우제하다. 작은 누이는 황해도 연백 심 씨 집안의 심원붕에게 출가하여 아들 심종화와 심종철 두 형제를 두었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면 성경 구절을 하나씩 외며 기도했다. 7시 반부터 8시 사이에 토스트와 우유나 홍차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 후 부인에게 성서 한 구절을 읽어줬다. 아침식사 후에는 혼자서 긴급한 여러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일하고, 오전 9시에 중앙청으로 출근했다. 정부 수립 후 오랫동안 대통령은 중앙청 2층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로 출근하여 집무했다. 

서류 결재를 받을 때는 중요한 내용은 미리 메모하여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대통령은 결재를 할 때 도장을 사용하지 않고 ‘가만(可晩)’ 이라고 사인을 했다. 가끔 장문의 각서를 쓰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대통령이 직접 소형 타자기로 작성하거나, 비서 겸 타이프라이터 역할을 했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구술하여 작성했다(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스코틀랜드로 유학하여 영어 통역사와 타자 및 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승만은 타이프를 칠 때 열 손가락을 다 쓰는 것이 아니라 양쪽 둘째손가락만으로 쳤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독수리 타법으로 국가 최고 기밀에 속하는 중요한 외교문서를 작성한 것이다. 

점심은 경무대에서 음식을 가져다 식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점심은 샌드위치나 샐러드였다. 대통령은 가끔 식사 시중을 드는 비서들에게 “지금도 곰탕이나 냉면 있겠지? 함흥냉면은 참 맛있어. 자네들은 더러 먹어보나?” 하고 물었다. “각하, 지금도 곰탕이나 함흥냉면 맛이 있습니다. 시켜올까요?” 하면 “그만 둬, 마미가 알면 야단나지” 하고 웃었다. 

식사 후에는 대개 30분 정도 낮잠을 즐겼다. 퇴근시간이 되면 대통령은 손수 경무대로 전화를 걸어 “마미요? 나 지금 퇴근하오” 라고 알리고 일반 공무원처럼 일정한 시간에 경무대로 퇴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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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이 2020-06-08 21:57:54
이승만학당 개병신이니 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