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鐵) 의 장막에서 죽(竹)의 장막으로
철(鐵) 의 장막에서 죽(竹)의 장막으로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3.0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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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처칠 수상, ‘철(鐵)의 장막’ 경고 연설(1946년 3월 5일)

처칠, 세계 최초로 소련 공산주의 팽창전략 경고. 해결책은 ‘평화의 힘’ 키우는 것

윈스턴 처칠은 1946년 3월 5일 미국 순방 도중 미주리 주 풀턴의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날 처칠은 한 시간이 넘는 긴 연설을 하는 와중에 유명한 ‘철(鐵)의 장막’ 발언이 나오게 된다. 

사실 미·영은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와의 전쟁을 위해 공산 전체주의의 몸통인 거악(巨惡) 스탈린과 동맹을 맺었다. 소련은 자신들이 전쟁 중 점령한 동유럽 지역을 도미노 식으로 공산화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일기 시작했다. 이날 처칠은 작심하고 소련의 팽창정책을 비판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결성된 미·소 중심의 연합동맹 체제가 붕괴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나섰다. 

“여러분께 유럽의 현 상황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나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발트 해의 슈테틴(슈데텐란트)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습니다. 그 선 뒤로는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비엔나,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등 중부, 동부 유럽 옛 국가들의 모든 수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 유명한 도시와 그 곳 주민들은 소련의 세력 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소련의 영향 아래 있을 뿐 아니라 아주 강력하고도 더욱 커져가고 있는 모스크바의 통제 장치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 

러시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수많은 국가에서도 공산주의 오열이 결성되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절대적인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미약한 영국과 미국을 제외하고 공산당과 오열이 도전적으로 커져 기독교 문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특히 극동 만주의 사태가 우려스럽습니다. 나도 한 몫을 한 얄타협정은 완전히 소련에게 유리했습니다. …나는 소련이 전쟁을 원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의 열매이며 자신의 세력과 이념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은 1946년 3월 5일 미국 웨스터 민스터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처칠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정책을 막기 위해서 는 평화의 힘을 가져야 한다면서‘철의 장막’발언을 했다.

소련의 팽창, 냉전의 시작 

처칠은 소련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해결책은 ‘평화의 근력’(筋力·sinews of peace), 즉 평화의 힘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평화의 힘이란 “유엔 헌장에 충실하고, 조용하지만 깨어 있는 힘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의 땅이나 재물을 탐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자의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것”이었다. 

세계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처칠의 이 연설이 나올 무렵 전후 세계 질서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 탄압, 1946년 폴란드 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 조작,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아래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 그리고 중국에서는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국공 내전이 재개되었다. 

그 무렵 소련의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곳은 어디나 자유, 민주주의, 자주독립의 싹이 잘리고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이 들어서 파시즘 못지 않은 폭정이 펼쳐졌다.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 때부터의 오랜 꿈이던 지중해로의 출구를 만들기 위해 터키와 그리스 내의 공산 게릴라들을 지원하여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이 친서방적인 그리스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스 정부를 지원하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국내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어 그리스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그 짐을 미국에게 떠 넘겼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산화 위기에 처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위해 4억 달러의 지출을 요청하기 위해 1947년 3월 12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트루먼 독트린’으로 명명된 유명한 연설을 했다. 

“최근 들어,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국가에 전체주의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처한 압박과 위협에 거듭 항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얄타 협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자기 생활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이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첫 번째 생활 방식은 다수의 의지에 기초하며, 자유로운 제도와 대의제, 자유로운 선거, 개인의 자유 및 언론과 종교의 자유, 정치적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 생활 방식은 소수의 의지에 기초해 다수를 강제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테러와 압제, 언론과 방송에 대한 통제, 선거 조작, 그리고 개인에 대한 억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저는 무력으로 국민을 굴복시키려는 소수의 권력자들이나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련의 팽창정책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었던 소련과의 협력정책을 포기하고 대결 및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으로 전환하게 된다. 소련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하고 본격적인 냉전에 돌입했다.

이는 세계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진영으로 갈라지는 것을 뜻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47년 6월 5일 막대한 달러를 풀어 유럽의 전후 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마셜 플랜을 가동했다. 

애치슨 선언 

1946년 말까지 미국의 세계전략의 기조는 국제주의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까지 포함하는 대부분의 국가들과 우호적인 통상 교류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이 전개되면서 미국의 세계전략은 봉쇄정책으로 바뀌었다.

즉 미국은 자본주의 국가들하고만 호혜적이고 우호적인 교류나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진영을 넘볼 수 없도록 포위의 블록을 쌓아 그들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정책이었다. 

이후 봉쇄정책은 억지전략(deterrence policy)과 함께 냉전시대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로 자리 잡았으며,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1949년 4월 4일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서유럽과 미국의 집단안보를 강화했다.

미국의 봉쇄정책에 맞서 소련은 위성국가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공산권 국가 간 경제협력기구인 코민포름을 창설했으며, 세계를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진영으로 구분하는 즈다노프 독트린을 발표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동아시아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미국이 국제주의를 세계전략의 기조로 진행하고 있을 때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중심이 중국이었다. 그러나 트루먼 독트린을 기점으로 중국을 포기하고, 그 전까지 적국(敵國)이었던 일본을 동아시아 정책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즉 패전국 일본 경제를 부흥시켜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삼는다는 전략이었다. 

한편에선 마오쩌둥의 티토화 작업에 착수했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자라는 점에 착안해 미국은 마오쩌둥을 유고의 티토처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로 만들고자 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를 중국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직후 새로운 중·소조약 체결을 위해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3월 4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장장 70여 일 동안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협상을 전개했다. 

이 와중인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시험대’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방어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지나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거쳐 필리핀으로 그어진다”고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애치슨 선언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협상 중이던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의 야욕을 폭로하고, 소련보다는 미국과 협력하는 것이 신중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 1956년 소련의 공산화에 항거해 일어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헝가리에 진주한 소련군.

김일성을 이용, 미·중을 한국전에 끌어들인 스탈린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협상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확인했다. 중공이 유고의 티토 식으로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미국과 손잡으면 소련이 외교적으로 왕따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상황을 간파했다. 애치슨 선언으로 그 가능성이 노골화되자 스탈린은 자신의 극동정책을 전면 재검토했다. 

그리고 새로운 대전략을 구상한다. 즉 김일성이 원하던 남침전쟁을 승인하여 한반도에 미군을 끌어들이고, 중공마저 한국전에 끌어들여 미·중 두 나라가 피 터지게 싸우도록 부추겨 중공과 미국을 동시에 함정에 빠뜨린다. 미국의 군사력을 한반도에 묶어둔 사이 동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한다는 디자인이었다. 

새로운 대전략의 구상이 끝나자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1950년 4월 10일, 김일성이 요청한 남침전쟁을 승인하면서 “소련은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이 ‘아시아 문제’에 정통하니 그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중공은 대만 해방을 위해 15만 병력과 4000여 척의 배를 대만과 마주한 해안에 집결시켜놓고 있었다. 이 와중에 스탈린이 돌발적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허가함으로써 마오쩌둥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친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위해 소련군 최고 정예들을 보내 남침 작전계획까지 수립해 줬고, 엄청난 최신 무기를 제공하여 남침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야콥 말리크 당시 유엔 대사를 유엔 안보리 회의에 불참시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이 한국전 참전을 결의하도록 방치했다. 

인민군이 불과 사흘 만에 손쉽게 서울을 점령하자 한강 도하를 늦추기 위해 도하 장비 제공을 하지 않았다. 한강 도하 후에는 무계획적인 전쟁 수행을 통해 한국이 빨리 점령당하지 않도록 북한군 정예인 6사단(사단장 방호산)은 주력에서 이탈시켜 호남 지역으로 우회하도록 했다. 미군의 참전과 한국군이 낙동강 방어전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돌진하던 7~8월이 중공군 개입의 최적기였다. 미군의 대규모 병력과 무기가 한국에 상륙하기 전에 중국군이 한국전에 투입됐다면 전쟁의 신속한 마무리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공군 조기 파견 요청을 묵살했다.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킨 의도를 충족시키려면 전쟁을 가능한 오래 끌어 미국과 중공이 격돌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북진을 개시하자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군대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면 우리 공군력으로 중공군을 지원하겠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이 파병을 결정하자 스탈린은 소련이 직접 공중지원을 할 경우 미국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면서 “중공군에 20개 사단 분의 장비를 제공할 용의는 있지만 공군 지원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말을 바꿨다. 

‘죽(竹)의 장막’에 갇힌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소련의 공중 지원이 없으면 우리는 북한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같은 날 김일성에게 “중국인들이 재차 파병을 거부했다. 귀하는 북조선에서 철퇴하는 것이 좋겠다”는 전보를 보냈다. 김일성에게 만주로 철수하여 빨치산 투쟁을 준비하라는 지시였다. 

결국 마오쩌둥은 중공 지휘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전 개입을 결정,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총 300만 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보내 미군과 피 터지는 싸움을 벌였다. 

유엔군의 북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 양상은 마오쩌둥과 미국의 전쟁으로 양상이 변했다. 스탈린이 원했던 시나리오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중부지역에서 전선이 교착되어 어느 누구도 승리를 담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휴전을 위해 움직였다. 이것은 스탈린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다. 스탈린은 휴전 문제가 언급되자 중국 측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아주 잘 싸우고 있는데 왜 휴전을 하는가? 계속 싸울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이지 우리가 아니다. 한 명의 미군이라도 더 죽여서 그 관(棺)을 미국으로 보내면 미국 내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의 압력이 더욱 거세져, 마침내 휴전하려고 제의하는 측은 미국이 될 것이다.”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카드지만, 미군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큰일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휴전회담을 시작하면 핵무기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휴전회담을 하면서 전쟁을 계속하면 된다고 중국과 북한을 설득했다. 

스탈린은 1952년 8월 20일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수상과의 회담에서도 “미국이 평화를 거부한다면 우리도 앞으로 1년간은 더 싸울 수 있다”면서 “중국이 전쟁에서 전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미국을 15~20년 붙잡아둠으로써 그들이 3차 세계대전을 계획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결국 한국전은 1953년 3월 5일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휴전으로 물꼬를 틀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제안한 남침전쟁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국을 싸우도록 유도하여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 전후 오랫동안 미·중 양국이 적대관계가 되도록 하는 데도 성공했다.

한국전에 개입한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에서 완전 고립되어 ‘죽(竹)의 장막 속에 갇혀 자력갱생해야 했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한국전 개입이 몰고 온 상황에서 일어난 재앙이었다. 1946년 3월 5일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은 이런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음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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