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왜 박정희를 그토록 증오했나?
지미 카터, 왜 박정희를 그토록 증오했나?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3.11 18: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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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 교수의 심층 추적] 親北 대통령 지미 카터 해부(上)

북한 취재 다녀온 샐리그 해리슨 기자 주한미군 철수 논문 발표,  이것이 카터의 정책으로 표출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39대)이 암으로 투병생활(카터는 2015년 8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신장의 암세포를 제거했으나 뇌로 전이돼 자신의 뇌에서 암이 발견됐다고 알렸다)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그의 주요한 일과일 것이다. 더구나 최근 1월부터 전개된 북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폐쇄 조치 등으로 진행된 한반도의 숨 막히는 전쟁위기 상황을 보면서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필자의 뇌리에는 꿈 많던 젊은 대학 시절, 카터에 대한 가장 깊은 기억이 새겨져 있다.  1979년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였다. 이때가 해방 이후 한미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 베트남전에서 보여준 한미 간의 밀월관계도 끝났고, 한미관계는 살얼음판을 딛고 있던 시절이었다. 

국내에서는 미군 철수 소문이 퍼져서 불안감에 싸였고, 미국 내에서는 의회 의원들에게 불법적으로 뇌물을 준 혐의로 검찰조사에 들어간 ‘박동선 게이트’(1976)와 전직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미국에 망명하여 한국 정부의 기밀 정보를 터트리는 청문회가 열려 미 언론은 연일 한국문제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기에 바빴던 시절이었다. 

한국 대통령을 모욕한 미국 대통령 

필자에게는 카터 대통령이 여의도 의사당에서 연설했을 때, 옆 좌석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카터는 연설 도중 “Human Right, Democracy in South Korea”를 반복하여 외쳐댔다. 그럴 때마다 야당 의원석에서는 환호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카메라맨이 짓궂게도 박 대통령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박 대통령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 장면은 필자가 본 가장 분노에 찬 박 대통령의 얼굴이었다. 필자의 대학 시절, 박 대통령은 유신체제와 장기 집권으로 인해 청년들에게는 그리 인기가 없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이라 반항심이 강했었지만, “그래도 일국의 국가원수인데, 저렇게 창피와 모욕을 주다니 카터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방송을 지켜본 필자의 심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석 달 정도 지난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이던 부하 김재규에게 참혹하게 암살당했다. 

유신체제의 종말은 1970년대 말의 한미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간밤의 홍두깨처럼 미 정계에 등장한 카터라는 정체 모를 인물이 갑자기 등장한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의 진정한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미국 내 친북인사들의 인맥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독자들은 지난호(미래한국 517호, 도날드 커크의 ‘미국에 친북세력 늘고 있다’는 칼럼(pp.70~72)의 후속편으로 이해하면 된다. 

1976년 11월 포드 대통령(공화당)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미 카터가 미국 대선에서 맞붙었다. 포드 대통령은 전임자인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인물이다. 이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무명의 카터, 대통령에 당선 

카터의 입장은 미 지상군을 아시아 본토의 전방기지에 묶어 두는 것은 미국의 전쟁 개입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즉 주한미군이 북한을 자극하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독을 끼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핵 공학도였던 카터는 미국이 수백 개의 전술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한 것에 대해 경악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음흉한 한반도 적화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한미 양국이 먼저 북한에 전향적으로 선의를 보여야 한다는 전형적인 평화주의자들의 논리를 신봉했다. 

카터는 워싱턴 정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교회의 성경교사로 일한 적이 있는 카터는 독실한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다. 1970년대 후반기 미국 사회는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미국의 대외정책에 크게 실망했고, 닉슨의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으로 정치 지도력의 도덕성이 상실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미국 사회는 계층 간, 정파 간, 세대 간에 대립·분열이 심화됐다. 

카터는 조지아 주지사를 역임하면서 이런 민심 이반의 사회적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그래서 대외정책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을 선거 아젠다로 설정하여 캠페인을 벌인 결과 현직 공화당 대통령을 미세한 차로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만약 포드가 당선되었다면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박정희 유신정부는 워싱턴 정계의 이방인인 카터가 당선될 것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심각한 대응책을 모색하지 않고 있었다. 카터는 미국민들의 예상을 깨고 당선되었고,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자신의 공약을 서둘러 실천에 옮기려고 했다. 

▲ 카터 미 대통령(左)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중화학공업 추진 정책 문제로 박정희 대통령에 반감이 있어 박정희 정부에 타격을 주기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한다. 사진은1979년 6월 카터 미 대통령의 방한 때 공식 환영 행사 모습.

미국의 골칫덩이가 된 박정희 

카터는 왜 박정희를 그토록 증오했는가? 그 첫 번째 이유는 1970년대 중반기 미국 내의 반전(反戰), 반한(反韓) 분위기 속에서 카터가 박정희에 대한 혐오감을 키워나갔던 점에 있다.  

1974년 주월 미군 철수, 다음해인 1975년 월남 공산화 이후 미국에서는 월남전이 잘못된 개입이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월남전의 수모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1960년대 베트남에서 미국의 맹방으로서 병력을 가장 많이 파병하면서 용전분투한 한국군의 이미지는 사라졌다. 

두 번째 이유로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알리는 유신체제가 미 진보언론의 맹렬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인권을 강조하는 민주당의 프레이저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 하원의원들이 수시로 청문회를 열어 박동선 게이트와 김형욱 망명사건을 추궁했다. 미 진보언론들은 이를 연일 대서특필하면서 한국정치의 부정적인 면을 경쟁적으로 들춰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야당 지도자 김대중, 김영삼과 종교인 지학순 등을 박해하여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 공포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조야에서는 양 김 씨를 민주투사로, 지학순 주교를 종교 지도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김대중과 김영삼 씨는 미국 민주당 인사들과 서신을 왕래하고 있었고, 그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했으며 국내 정치에서 미국의 개입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카터가 박정희를 혐오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더 첨가된다. 국가이익의 문제다. 박정희는 미국이 반대한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것이다. 원래 한국은 1960년대에는 가발, 장난감, 의류 등 경공업 제품 등 싸구려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였다. 1960년대 말에 와서 이런 방식의 대미 덤핑 수출이 벽에 부딪쳤고, 그 타개책으로 박정희는 중화학공업에 도전했다.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자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은 한국이 자국의 경쟁자로 부상할 것을 우려하여 모두가 반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중화학공업 추진 과정에서 차관과 기술 공여를 거부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비밀리에 추진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은 포드 행정부 시절부터 미 국방부와 CIA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미국의 국익에 상충되는 이런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박정희는 카터 행정부 시절 이전부터 이미 미국의 고위층에게 미운털이 박힌 말썽꾸러기 인물로 각인되었다. 1970년대 미국 행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골칫덩어리는 김일성이 아니라 박정희였다. 

카터는 누구와 주한미군 철수 의논했나? 

카터는 대선 후보 시절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의 주둔이 전쟁 개입의 위험성을 키울 것이라고 강변했지만, 우방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에 대해서는 군사지원 이외에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주월 미군 철수 이후 월남 공산화를 목격한 박정희로서는 카터의 제안을 순순히 수용할 수는 없었다. 

카터는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가장 큰 타격을 주려면 주한미군 철수밖에 다른 카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박 정권에 대한 일종의 ‘레짐 체인지’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주한미군 철수 과정은 철저히 보안과 비밀에 싸여 있었다. 누가 철수를 조언했으며, 언제, 어떻게 해서 주한미군 철수정책이 추진되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카터의 브레인 역할을 한 안보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와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도 철수정책의 입안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입을 다물었다. 카터도 자신의 대통령 회고록 <신념을 지키며(Keeping Faith)>에서 자세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확실한 사실은 카터와 같이 백악관으로 갔던 조지아 마피아 사단(청바지 차림에 장발을 휘날리며 지미 카터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친 조지자 주 출신 인사들)의 팀플레이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면, 주한미군 철수라는 국가 중대사를 도대체 누구와 상의했는가. 

그가 상의한 ‘그림자 참모’는 누구였던가? 혼자서 결단을 내리고 강행했다는 것인가?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로서 대권의 야망을 품고 있을 시절인 1974년 말 주한미군 철수와 미북 관계 개선의 이론적 틀이 구체화되는 글이 나타난다. 1972년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미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5월 말에서 6월 말까지 한 달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면담했던 셀리그 해리슨이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에 기고한 글에서 그 구체적 이론으로 나타났다. 

해리슨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언론계에 진출하여 동남아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1968년부터 1972년까지 도쿄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동북아 지국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북한을 총 11번이나 방문하게 된다. 언론인과 아시아 전문가로서 활동한 해리슨의 북한에 대한 역할은 과거 중국을 바깥 서방 세계에 연결한 언론인 에드가 스노(<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의 역할에 비견할 만하다. 

1974-75년 겨울호에 실린 그의 논문 ‘하나의 한국(One Korea)’에서는 북한의 탈중·소(脫中蘇) 자주노선과 한반도에서 미·일·중·소가 배제된 탈강대국 관계를 제안했는데, 다분히 북한에 동정적인 논조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샐리그 해리슨의 북한 방문 

해리슨의 논리의 핵심은 북한을 외교로 다루자는 것이고,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미 해군력의 무력시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북한과 평화협정과 한반도 비핵화를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써 주변 강대국의 긴장이 항상 고조될 수밖에 없으므로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미국이 태평양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카터가 해리슨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관보로 영전한 리처드 홀부르크가 <포린 폴리시>의 편집장으로 있을 때, 해리슨의 논문을 게재해 줬다는 점에서 해리슨-홀브루크-카터의 3각 관계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홀브루크는 1979년 카터의 방한 시 밴스 국무장관, 브라운 국방장관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외교 실세였기 때문이다. 카터 후보가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왔을 때, 신바람이 나서 대미 접근을 서둔 인물이 북한의 김일성이다. 이미 김일성은 1973년에 미 의회에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하고 한반도로부터 미군과 핵무기를 철수하기 위한 직접 협상을 제의한 바 있었다. 

그 당시 파리에서는 키신저-레둑토 간에 평화협정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고, 다음해 파리협정 이후 주월 미군은 철수했다. 주월 미군의 철수가 월남 공산화의 기폭제가 된 것에 박수갈채를 보낸 김일성은 한반도에서도 미군 철수 책략을 적용하려고 잔뜩 몸이 달았다. 

1976년 11월, 카터가 당선된 직후 물실호기(勿失好機)의 찬스라고 간파한 김일성은 알리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직접 접촉을 원하는 친서를 조지아의 플래인스에 머물던 카터에게 보냈다. 다음 해 2월에는 북한 외무장관 허담이 파키스탄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국무장관 밴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일성의 對美 공작 

이 메시지에서 김일성은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구할 것이며, 한국을 배제한 채 미·북 간 직접 협상을 원하며, 미국과의 대결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표시했다. 그러나 카터는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는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북한과 협의할 수 없으며, 북한이 남북대화에 성의를 보여줄 것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조총련 간부인 이계백은 미국 특파원들을 만찬에 초청하여 카터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한껏 추켜세우며 지금이야말로 미북 관계를 정상화할 시기라고 주장했다(<뉴욕타임스>, 1977년 3월 18일).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김일성은 미국 내의 좌익 진보 성향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언론에 대한 치밀하고도 은밀한 선전공작에 열을 올렸다. 김일성의 대미 공작팀이 어떻게 미국의 진보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을 친북 성향으로 만들어 갔는지는 향후 한반도의 통일 이후 북한 문서를 채집할 역사가들의 몫이 될 것이다. 

1976년 늦가을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삼은 카터의 백악관 진출로 미국 최초로 친북 대통령이 등장했다. 한국인들은 불안감을 가지고 태평양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지평의 급속한 변화가 그로부터 21년 후 우방 한국에서 다시 친북 대통령들의 등장을 초래할 신호탄이 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과연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어떻게 추진해 갔으며 그 파장은 어떤 결과를 낳았나? 또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유화 시그널을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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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h 2019-11-28 22:52:45
대통령 그렇게 우러러 보던 사람들이 지들딴엔 만만해 보이는 문재인 되니 그리 무시하나? 내로남불 시전하냐? 창피한줄 알아야지

박혜연 2017-10-23 22:00:19
걱정마라~!!!! 지미 카터 곧 북한방문해서 김정은 심장마비로 40세안에 죽게 해줄테니까 됐냐? 문제는 지미 카터가 만93세의 고령이라는 사실....!!!! 그래도 죽기전엔 꼭 정으니 만난다니까 걱정끄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