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공산 엘리트 집단 김정은과 분리시켜야
북한의 공산 엘리트 집단 김정은과 분리시켜야
  • 박상봉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3.1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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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통일 전문가 박상봉의 심층분석] 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독일 통일 과정 곳곳에는 동독 공산 엘리트 집단의 보이지 않는 협조 묻어 있어. 북한도 김정은 정권과 공산 엘리트 집단을 분리시켜 통일의 동력원으로 삼아야 

새해 벽두 북한 발 이슈가 지구촌을 강타했다. 우려했던 대로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013년 3차 핵실험 당시 미국의 핵우산이 “찢어진 우산”이 아니냐며 격노했던 우리 국민들은 좌절에 빠졌다. 국제사회의 충격도 컸다. 이런 상황에 김정은은 또 다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며 치명타를 날렸다. 

▲ 박상봉 독일통일정보연구소 대표·미래한국 편집위원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게 급전을 쳤지만 시진핑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작년 중국 전승절에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푸틴 등 반(反)민주 지도자들과 어울려 ‘그들만의 리그’에 합류했던 박 대통령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응이 시작됐다. 2월 10일 개성공단 가동 중단 결정에 이어 2월 16일 국회 연설에서 북한의 권력 교체(레짐 체인지)를 시사했다. 김대중 정권 이후 18년 동안 유효하던 대북정책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이었다. 유엔 대북결의안에도 적극 참여해 유래가 없이 강력한 제재안 2270호를 이끌어내는 데도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주변국 모두가 놀랐다. 북한이 놀랐고, 중국이 놀랐다. 가장 충격을 받은 대상은 우리 사회였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고르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호른의 오스트리아 국경 개방에 버금가는 결단이었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이와 함께 대북정책의 불문율이었던 남북대화-남북관계 개선-평화통일의 프레임을 부숴버렸다. 그동안 이 프레임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은 반(反)통일론자, 전쟁광(狂), 보수꼴통, 대결론자라는 딱지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적인 희생 제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김정은 정권 교체” 선언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 2차,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천안함 폭침으로 46명의 해군을 수장시켰고 연평도 포격도 감행했다. 민간인까지 희생되었다. 국군 통수권자로서 최악의 수모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단호하게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려 군 미필자 대통령의 대명사로 굳어져 버렸다. 북한이 사과와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남북교류와 협력을 중단한다는 5·24 조치가 대응의 전부였다. 

이런 안보 취약 정권, 말로만 단호했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북 강경론자’ 딱지가 붙었다. 햇볕에 취한 야당, 학자, 전문가, 시민단체가 벌떼처럼 일어나 몰아붙인 결과였다.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 중단에 이어 김정은 정권에 대한 레짐 체인지를 선언하자 또 다시 소위 햇볕론자들의 공세가 재연되고 있다. 야당은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자금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였다고 하자 증거를 내놓으라며 야단법석을 떨었고 홍 장관이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임동원, 정세현, 정동영 등 역대 통일부 장관은 정부가 남북대화의 마지막 카드마저 단절시켰다고 포문을 열었다. 

남북대화는 햇볕론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핵을 쏴도 대화, 미사일을 발사해도 대화…. 그것은 곧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남한 내 여야 대화는 물론 여당 내 또는 야당 내 대화도 사라진 것이 우리의 수준이다. 하물며 김정은과 대화로 핵, 미사일 문제를 풀라고 주문하고 있으니 개도 소도 웃을 일이다. 

북한과 대화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성사시켜 주한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술핵을 철수시켰고, 북한과 대화를 위해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 비자금으로 불법 송금해주었다. 

과거 18년 동안 남북경협 등 화해협력 정책에 편승해 왔던 학자, 전문가들의 점잖은(?) 공세도 이어지고 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은 온갖 피해 규모를 부풀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한계 기업으로 정부의 특혜를 받아 개성공단에 진출했던 적지 않은 입주기업들이 정부의 뒤통수를 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을 상대로 사업의 고위험성을 인지시켜 왔지만 3분의 1 가량이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피해를 정부에 돌리면서 국민 세금으로 피해 보상을 하라고 난리를 치고 있다. 개성공단 폐쇄로 20만 명의 개성 주민들이 생계 위협을 받게 되었다며 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마디로 식자우환(識字憂患),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국내 종북세력들의 저항 

김정은은 3월 4일 “실전 배치 핵 언제든 쏠 수 있게 준비하라”에 이어 3월 8일 “핵 경량화에 성공해 장착할 수 있다”며 도발을 이어가고 있는데 개성 주민을 걱정한다.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해가며 “청와대와 백악관을 폭파할 것”이라고 막말을 쏟아 붓고 있는데도 연일 정부 때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의 편인가, 아니면 아군 편인가. 

개성 주민을 빌미로 김정은에 면죄부를 주고, 핵으로 인한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2500만 북한 주민 전체의 안위를 방치하는 꼴이다. 아무리 박 대통령이 미워도 도가 지나치다. 정치와 안보를 구분하지 못하는 행태가 불안하다. 

우리는 북한이 핵실험을 거듭하며 핵탄두 경량화, 소형화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불안해했다. 4차 핵실험 후 김정은의 말대로 경량화가 이뤄져 핵탄두 정착이 가능해졌는지 알 길이 없다. 이 와중에 개성 주민 동정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일성 우상화에서 깨어나기 힘들 듯 햇볕의 마법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제 우리 사회는 마법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을 길이 사라진다. 

핵과 미사일로 도발한 장본인이자 고모부는 물론 측근 100여 명까지 처형한 살인마에게는 침묵하면서 정부와 대통령을 탓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이 와중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북한 궤멸론”을 거론하고 나섰다.

▲ 박근혜 대통령이 ‘레짐 체인지’를 언급하며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주도하는 가운데 북한의 공산 엘리트들에게 사면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김정은과 주변의 엘리트를 분열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꼼수 

박근혜 정부의 단호한 결의에 점잖은(?) 방해의 지류는 소위 평화협정이다. 북한은 오래 전부터 한반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고 요구해왔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은 미국과 한국이 정전 상태에서 언제라도 북한을 침공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발했다는 논리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은 북한이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것은 한미동맹을 무력화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꼼수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북한의 꼼수에 최근 중국은 물론 한국 내 소위 햇볕론자들이 동참하고 있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한반도 상황을 타결하기 위해 비핵화와 평화협정 카드를 제시하고 있다.  평화협정의 전제조건으로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는 미국과는 다른 시각이다. 

현재 중국은 G2를 자임하며 여러 곳에서 미국과 대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남중국해를 둘러싼 분쟁이다. 중국이 여러 개의 인공섬을 만들고 군사기지화하고 있어 미국 등 주변국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국제사회의 우려도 크다. 센카쿠 열도에서의 일본과 중국의 갈등에도 미국이 일본의 배후에 버티고 있다. 

이 가운데 한미동맹의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북한은 중국 입장에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와 관련, 독일 일간지 FAZ는 지난 2월 7일 중국은 북한의 몰락을 전제로 한 남북통일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사사건건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고 있는 중국은 북한이 망해 한국 주도의 통일이 됨으로써 한미동맹과 국경을 맞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즉 평화협정을 체결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전략이다. 

우리 사회의 일부 평화론자들도 이 대열해 합류해 박 대통령의 기조를 흔들고 있다. 지난 2월 5일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는 “핵 동결과 평화협정 교환이 답이다”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핵 폐기도 아니고 현재 상태로 평화협정을 체결해 핵을 동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칼럼이 과연 누구를 편들고 있는지 의미심장하다. 정확하게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장이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이다. 

이런 대화론자들의 노골적인 북한 편들기가 18년 지속되는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을 하나하나 개선해왔다. 북한은 보란 듯이 이 칼럼이 게재된 지 이틀 후인 2월 7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통일준비와 정치인의 대북관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대북 인식은 “공산당 빨갱이”였다. 1988년 소련 등 거의 대부분 공산국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은 성공적인 올림픽을 치른 데 이어 1990년 소련과 1992년 한·중 수교를 체결하자 빨갱이 정서도 빠르게 희석되어 갔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도 우리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북한에 대한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KAL기 폭파로 대북 인식이 개선될 상황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과거 군사정권 시절 세뇌되었던 대북관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대북관의 변화가 DJ의 햇볕정책으로 구현되었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은 총명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요 인사들의 방북이 이어졌고 ‘김정일 눈도장 찍기’가 경쟁적으로 일어났다.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내 김정일 선물 전시관에는 방북한 남한 인사들이 김정일 장군에게 바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북한은 전시관을 방북 인사들의 관광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대북사업을 주도하던 현대가(家) 정몽헌의 딸 정지이 상무는 방북하여 김정일을 만나고 와서 “김정일 장군님은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국내 애국단체와 보수 언론이 이런 충격적인 행보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 와중에 북한 핵개발 의혹이 불거졌다. 북한이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1994년에는 영변 핵발전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등 의혹이 포착되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 시설의 폭격을 결단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막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 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은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핵을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대북지원금이 핵개발로 악용된다는 얘기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만약 북한에 핵이 개발된다면) 내가 책임지겠다”라며 북한을 두둔하고 나섰다. 정상회담을 위해 김정일에게 상납했던 4억5000만 달러와, 그 후 지속되었던 대북지원금에 대해 면죄부를 준 셈이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은 현실과 달랐다. 독일의 유력 시사주간지 데어 슈피겔(Der Spiegel)은 2004년 1월에 이어 2005년 2월 북한 핵개발 의혹을 커버스토리로 집중 보도하며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유럽에서 이미 권위를 인정받아온 슈피겔이 두 차례에 걸쳐 커버스토리로 북핵 문제를 다뤘다는 사실만으로도 북핵의 심각성은 예고된 것이었다. 북한은 2006년부터 2016년까지 4차례 핵실험을 밀어붙이는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장거리 미사일도 그렇다. 

독일 통일의 교훈: 동독 공산당 엘리트 적극 수용 

분단 70년, 온갖 희생을 치르며 깨달은 사실은 김정은 세습 정권의 교체 없이는 한반도 평화는 물론 통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김정은 집권 후 32세 세습 독재자의 무모한 도발이 이어지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장성택, 현영철, 리영호, 리영길 등 100여 명의 측근이 숙청된 데 이어 대외적으로는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도발이 끊이지 않는다. 정치범 및 탈북자에 대한 인권 침해도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유엔은 유례가 없는 강력한 대북 제재안인 2270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동참도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북한을 오가는 선박을 조사하고, 모든 화물차에 대한 감시도 강화되고 있다.

대북 금융거래도 원천 차단되었고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특정 국가를 포함해 그와 교류하는 제3국 정부나 기업, 금융 등에 대해서까지 취하는 강력한 경제적 제재 조치)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 그리고 우리나라도 독자적인 제재 조치를 취하고 있다. 

향후 중국의 태도에 따라 제재 효과가 좌우되겠지만 이번 제재안의 수위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이번 제재가 과거와 달리 효과적일 것이라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가 제재 조치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개성공단 중단 결정에서 봤듯이 박근혜 정권은 과거 정권과 달리 대북제재에 선제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과거 정권이 개성공단을 통해 조선노동당 39호실로 유입되는 연 1억 달러의 자금을 방치하면서 다른 나라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대북제재에 동참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박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 제재를 가할 것이라며 비핵화냐 정권 붕괴냐를 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정권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통일준비를 시작할 때다. 누가 김정은 정권을 대체할 것인지? 중국은 어떤 식으로 김정은 이후를 계획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가 통일을 감당할 능력은 있는지? 김정은 정권 이후 여야의 입장은 어떨지? 서둘러 이런 질문에 대한 대응책과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이와 함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북한 공산 엘리트들에 대한 사면 대책이다. 김정은의 막가파 통치가 이어지며 파생되는 질문은 과연 북한을 지탱해온 공산 엘리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지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독일을 방문했던 북한 인사들이 남한 안기부(현 국정원)에 끈을 대려 했다는 사실을 접한 적이 있다. 이들은 당시 베를린 주재 우리 외교관들을 만난 자리에서 “만약 북한에도 동독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들을 안기부 직원들에게 잘 부탁해 달라”는 취지의 부탁이었다. 

동독 민주화는 공산 엘리트가 이끌어 

이 사실은 북한 공산 엘리트들이 김정은 정권의 유지와 몰락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공산 엘리트들과 김정은이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깨는 일이 시급하다. 동독의 사례를 보자. 동독 공산당 엘리트들이 시민의 편에 서서 호네커를 몰아내고 통일에 적극 협조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라이프치히 월요 데모가 절정에 달했던 1989년 늦여름, 시민단체들의 정치적 활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정치적 역량을 키우고 1당 독재체제였던 공산당 계열인 사회주의통일당(SED) 및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에 맞섰다. 1989년 9월 4일 1000여 명으로 시작된 월요 데모는 10월 16일에는 12만 명으로 급증했다. 위기를 느낀 호네커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초기 무력 진압에 한계를 절감한 당은 호네커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이틀 후 호네커는 서기장에서 물러났다. 호네커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월요 데모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10월 23일에는 30만 명, 11월 6일에는 4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그 후 3일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2월 3일 사통당은 호네커를 제명했다. 사통당은 시민단체의 연합체였던 ‘원탁회의’와 과도 정부를 구성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정치적 행보를 조정해 나갔다. 

원탁회의는 호네커 실권 후 크렌츠 집권기인 1989년 12월 7일 결성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라이프치히 월요 데모를 이끌었던 시민단체들의 연합체로 동독 격변기 실질적인 주도세력이었다. 주요 시민단체는 ‘뉴포럼’, ‘민주주의 지금’, ‘민주봉기’, ‘동맹 90’ 등이었다. 

과도정부 원탁회의 

원탁회의가 실질적인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자 개혁공산주의자로 총리에 오른 모드로브는 1990년 1월 28일 정부도 원탁회의에 참여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국가 통치는 원탁회의와 모드로브 정부의 이원체제 하에서 이뤄졌다. 

원탁회의는 사통당 일당독재 청산, 슈타지 해체, 헌법 개정을 추진하며 개혁 개방으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일은 1990년 3월 18일을 기해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이었다. 민주적 절차를 거쳐 공산당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일이었다. 

자유선거에는 사통당의 후신인 민사당(PDS)도 입후보해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서독 정당의 자매당으로 동독 기민련, 사민당은 물론 동독 위성 정당들도 참여해 1220만 유권자의 심판을 받았다. 

투표 결과 동독 기민련, 기사련, 독일사회연맹과 민주봉기가 연대한 ‘독일연합’이 48%, 사민당 21.9%, 민사당 16.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독일연합은 드메지어를 내세워 사민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해 동독 최초의 민주정권을 창출했다. 

이 세력이 서독과 통일협상을 추진해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이뤘다. 이처럼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독 공산 엘리트들이야말로 평화적 통일의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김정은 정권 교체에 대한 박 대통령의 결단은 확고해 보인다. 중국, 종북세력, 일부 야당세력들의 저항이 거세게 일겠지만 이 싸움에서 이번에야말로 승기를 잡아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 

북한 공산 엘리트 집단은 김정은 정권의 붕괴와 함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함은 물론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다. 이들과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공동운명체가 그동안 3대 세습독재체제를 가능케 했다는 분석도 틀리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시급한 통일준비는 북한 엘리트 집단에게 화해와 사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북한 내부의 개혁을 이끌어 통일에 기여할 경우 과거의 불법행위나 도발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다. 

서독은 분단 시절 중앙범죄기록소를 설립해 공산집단의 불법행위를 낱낱이 기록함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동독은 28년 동안 기록소를 폐쇄하라는 요구를 해왔으나 서독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렇듯 단호했던 서독 정부가 통일 후 동독 공산집단들이 저지른 불법 범죄행위에 대한 사법처리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공산 엘리트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1989년 가을 동독 무혈혁명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둘째, 드메지어 정권과의 통일 협상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범국과 홀로코스트로 얼룩진 독일 민족에게 통일은 기적이었다. 이런 기적과 같은 통일을 이뤄가는 과정에 동독 공산집단이 나름대로 기여한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사통당 정권이 호네커의 명령에 따라 동독 주민들의 저항을 무력 진압하고 월요 데모를 원천 봉쇄했다면 내전이 발발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전승국과 유럽 주변국들은 독일 통일을 승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동독 공산엘리트 사면 

3월 18일 동독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구성된 인민의회는 “동독은 서독 기본법 23조에 따라 10월 3일을 기해 서독 연방체제에 편입함으로 통일을 이룬다”고 의결했다. 8월 23일 새벽 2시 47분의 일이다. 동독이 스스로 서독에 편입해 분단을 극복한다고 의결한 것이다. 

이렇듯 독일 통일의 과정 곳곳에는 공산 엘리트 집단의 보이지 않는 협조가 묻어 있었다.  드메지어 정권과의 통일 협상도 사통당 엘리트 집단의 협조가 없었다면 신속하게 통일조약을 체결할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결국 서독 정부는 통일(대목표)을 향해 동독 엘리트 집단에 대한 청산(소목표)을 포기하는 대타협을 선택했다. 

통일조약에는 동독 공산집단에 대한 처벌보다는 이들에게 피해를 당한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과 보상에 역점을 뒀다(제17조). 또 19조에는 동독 시절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행정 결정에 대해 무효라는 규정을 뒀다. 다만 기본적으로 동독 형법은 법치주의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했다. 

독일 사회에는 동독 정권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리와 관련해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동독 공산 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한 사법처리를 엄격히 해야 한다는 견해. 다른 하나는 동독 엘리트 집단이 통일에 기여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며, 행여 ‘승자의 심판’이라는 오명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견해였다. 

콜 정부는 공산집단의 불법행위는 동독 형법에 근거해 처리했으며, ‘승자의 독식’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독일 검찰이 동독 공산집단의 불법행위와 관련해 처리한 내용은 국경사살 행위에 집중되었다. 다음과 같은 통계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첫째, 총 고발 건수는 10만명에 7만5000건인데 이중 기소된 건수는 1737명, 1021건으로 기소 비율이 1.4%에 불과했다. 기소된 사건도 50% 정도는 무죄, 기소유예, 기각 등으로 끝났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 중 7%만이 2년 이상 징역형 선고받았다. 

둘째, 국경 사살행위에 대한 처벌은 동독 형법에도 저촉되는 것으로 책임자에 대한 책임은 엄중하게 물었다. 국방장관 하인츠 케슬러, 차관 슈트렐리츠 및 6명의 국경수비대 장군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케슬러는 7년 6개월 징역형, 차관 슈트렐리츠는 4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셋째, 국경수비대원에 대한 처벌은 관대했다. 명령에 절대복종을 강요받았던 국경수비대원을 처벌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예를 들어 통일 전 동독 공산정권은 국경수비대원이 발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0년 징역형을 선고한 바 있다. 또 그들은 늘 당국의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국경수비대원 37명 중에서 36명은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최고 권력에 있었던 호네커 총서기, 밀케 슈타지 총수, 슈토프 내각 총리에 대한 사법처리는 헌법재판소의 권고에 따라 재판이 중단되었다. 호네커와 밀케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슈토프는 심리 불가 판정으로 재판이 속개되지 못했다. 암 투병 중이었던 호네커는 칠레로 망명을 허가해 1994년 5월 29일 사망했다. 

넷째, 잘츠기터 중앙범죄기록소에 기록된 4만여 건 이상의 범죄행위는 통일 후 재임용이나 학술적인 자료로 활용되었고,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증거로 활용하지는 않았다. 

자연과학 이론은 실험을 통한 증명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통일과 같은 작업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고 방향을 찾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독일 통일과 같은 역사가 따끈따끈하게 펼쳐져 있다. 

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한반도 통일을 준비해가야 한다. 그래서 ‘한국통일이 독일통일보다 쉽다’(통일 패러다임과 북한 재건, p.187. 미래한국, 2013년 12월 9일자 참조)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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