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코프가 교과서 목차까지 작성해줘
스티코프가 교과서 목차까지 작성해줘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3.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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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 북한 역사 교과서의 몸통은 소련군정

스티코프 일기에서 발견된 ‘북한 교과서 편찬계획’의 그 증거물

북한의 역사교과서를 소련군정이 목차까지 작성하여 만들도록 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 2004년 12월 발간한 해외사료총서 제10권인 <쉬띄꼬프일기 1946~1948>을 통해 밝혀졌다.

스티코프

쉬띄꼬프(이하 스티코프로 표기)는 소련군 상장(한국군의 중장에 해당)으로서 북한 정권을 탄생시킨 막후 실력자로서 소속은 극동군사령부 예하 제1전선군사령부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이었다. 그는 스탈린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정치군인으로서 “소련군이 점령한 지역은 반드시 친소 정부를 수립한다”는 스탈린 전쟁정책의 시행을 위해 연해주군관구가 있는 하바로프스크에서 수시로 모스크바와 평양을 분주히 오가면서 제25군의 민정활동을 감독한 인물이다.

스티코프는 1945년 여름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한 이래 1951년 초 주북한 대사에서 물러나기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스티코프가 남긴 1946년 12월 26일자 일기에 북한의 역사 교과서 편찬내용은 물론, 목차까지를 작성하여 제시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스티코프는 ‘교과서 편찬계획’이라는 제목 하에 북한에서 만들 역사 교과서의 성격과 목적 등을 다음과 같이 지시하고 있다.

스티코프의 ‘교과서 편찬계획’

“서론.

교과서는 어떤 목적을 지니는가? 누구를 독자로 하는가? 교과서는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 교과서는 조선역사 교과서나 당사(黨史) 교과서가 아니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책임 있게 밝혀야 한다. 조선의 지리적 역사적 과거, 독립을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 일본인들의 지배와 착취, 교과서는 일제 압제로부터 해방 이후 북조선의 정치적 고양기, 민주개혁의 시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서론 아래 각 장별로 담아야 할 자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말하면 북한의 역사 교과서 준거안을 소련군 지도부가 작성하여 넘겨준 셈이다.

‘제1장. 조선-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①조선의 지리적 위치

②영토와 인구

③국가제도

④사회경제제도 : 농업관계, 공업의 발생과 발전, 민족문화, 신분제도, 법률관계

제2장. 1895년 이전 외세의 조선침략 기도

①일본의 침입 : 1592~1598년

②몽고의 침입

③만주(청)의 침입

④유럽 열강(프랑스, 미국)의 조선 침입

⑤1876년 조일조약

외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한 조선인민의 투쟁을 기술한다.

제3장. 조선의 국권상실과 일본 식민지화(1904~1945년)

①청일전쟁(1894~1895년)과 그것이 조선에 미친 영향

②조선 쟁탈을 위한 로일전쟁

③로일전쟁과 일본의 조선 강점

④일본의 조선병합(1910년)

⑤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 착취

제4장.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조선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조선

①독일, 일본, 이탈리아 군벌의 전쟁준비

②아시아 강점을 위한 일본의 준비와 지향

③일본이 중국과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조선을 활용

④일본의 대미전 참전

⑤조선에 대한 카이로, 얄타, 포츠담 협정

⑥일본의 정책과 조선부르주아지의 반역행위에 반대한 조선인민의 투쟁

제5장.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일본 압제로부터 조선의 해방

①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

②일본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최후통첩과 일본의 반응

③대일 최후통첩에의 소련의 참여

④소련의 대일전 참가. 일본의 투항

⑤소련군대의 조선 진출

⑥인민대중의 정치의식 고양과 인민정권의 수립

⑦정당 사회단체의 조직

⑧모스크바 삼국외상회의의 조선 문제에 대한 결정

제6장. 인민위원회 정권의 강화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창설

①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창설과 당면과업

②진정한 인민정권기관으로서의 인민위원회

③민주개혁과 인민위원회의 제법령

④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제7장. 북조선 공산당과 북조선 신민당의 북조선 노동당으로의 통합

①조선공산당 약사, 인민대중의 이익을 위한 조선공산당의 투쟁

②조선신민당 약사

③합당, 서신 교환과 회담, 합당 절차

④합당대회와 대회에서 결정된 사항들

⑤조선로동당 강령

⑥조선로동당 규약

⑦사회단체에 대한 당의 방침

⑧(남)조선공산당에 대한 당의 방침

제8장.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수립

①통일전선 수립의 목적

②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가입한 정당들

③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가입한 사회단체들

④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강령, 규약, 사업’

김일성대학 개교도 스티코프 작품

지금까지 소련군정이 북한의 헌법을 제정하고, 남한의 좌익 투쟁에도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해 상당 부분까지 밝혀졌는데, 역사 교과서에 담아야 할 기본 내용은 물론 세세한 목차까지를 작성하여 지시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스티코프가 제시한 북한 역사교과서 준거안의 내용에 따라 북한의 교과서가 집필되었고, 그 핵심인 계급투쟁 사관, 민중사관 등이 남한의 친북세력 및 주사파들에게 전해져 남한의 사관까지를 오염시킨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친북사관의 한국사 교과서 문제가 제기되어 국정 교과서를 새로 집필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격전의 진앙지가 스티코프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자료다.

스티코프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북한 최고 대학으로 발전한 김일성대학 개교 과정에도 일거수일투족 개입했다. 1946년 9월 1일 개교한 김일성대학은 초대 총장에 김두봉이 취임했고, 김일성은 자기 이름을 딴 대학의 개교 축하식에서 “민주주의적 국가건설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해달라”고 당부했다. 축하식에는 미군정청에 의해 강제 해산된 서울 법정학교 출신 학생 40여 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장학금을 받으며 북한의 엘리트로 성장했다. 이로써 스탈린대학도 없고, 모택동대학도 없는데 김일성대학이 존재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김일성대학도 소련군 지도부가 학과목이나 교재, 교칙, 학생들 중 10%에게 장학금 지급, 강사진 구성 등 세세하고 시시콜콜한 것까지를 정해져 지령했다는 점이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1946년 10월 3일 로마넨코가 상관인 스티코프에게 김일성대학에 일반 교과목으로 러시아어, 세계사, 철학, 다원주의, 정치경제학 과목을 개설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스티코프는 1946년 10월 26일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강사 및 학생들과 대화했는데, “교과서와 실물 교수용품의 준비 정도가 매우 열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대학뿐만 아니라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가 설립한 무용학교의 정원을 100명으로 정한 것도 스티코프였다.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다”

스티코프는 평양에 파견된 레베데프 소장, 로마노프 소장, 후르소프 소장, 그로모프 대좌, 이그나티에프 대좌 등 정치장교들을 지휘하여 북한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국가를 창조해냈다. 그 지휘계통은 민정기구의 총관책임자 스티코프 중장→실무책임자 로마넨코 소장→총무부장 이그나티에프 대령을 통해서 나온 명령과 지시를 김일성이 위수사령부인 평양시 사령부 책임자 무르이진 소령을 통해 건네받아 실행에 옮겼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다”는 기록이 발견된다(1946년 9월 26일자). ‘훈시(訓示)’의 사전적인 뜻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경계하거나 주의해야 할 일 등을 지시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신분이었고, 스티코프는 소련군 중장이니 ‘훈시를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스티코프는 김일성에게 훈시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발표할 연설문 초안도 직접 검토하여 자기 의견을 달아서 내려주었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11월 1일 김일성의 발표할 연설문 초안을 검토하다”는 기록이 발견된다(1946년 10월 28일자). 이틀 후인 10월 30일자 일기에는 “김일성의 연설문에 논평을 가하고, 내가 수정한 김일성의 연설문 초안을 전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의 일거수일투족은 소련군에 의해 조종되고 지시대로 움직였음을 증빙하는 결정적인 증거물인 셈이다.

스티코프는 김일성뿐만 아니라 김두봉을 비롯하여 북조선 천도교청우당 지도부, 북조선 민주여성동맹 지도부 등을 수시로 호출하여 지시를 내렸음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특히 박헌영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소련군정에 의견을 구했다.

박헌영은 1946년 12월 25일, 로마넨코를 통해 스티코프에게 “김규식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처럼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스티코프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전했다.

“나는 흥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하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그의 옳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고 조언하다.”

이처럼 소련군정의 지시와 지령에 의해 탄생한 집단이 북한이다. 김일성은 스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이 스탈린 헌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한다.

“조선 인민은 위대한 스탈린 헌법―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의 영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스탈린 헌법은 그 천재적인 기초자가 말하고 있듯이 파시스트의 야만성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는 전사들의 최전선에 있는 조선인민에게 정신적인 원조와 실제적인 지지를 주고 있다.”

1949년 2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조선 인민 680만 명, 그리고 남한 인민 994만 명의 서명이 담긴 감사 편지를 30개의 상자에 담아 모스크바로 보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준 스탈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었다. 이 편지함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국 지하실에 던져졌는데, 그 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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