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견가(愛犬家) 이승만
애견가(愛犬家) 이승만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3.2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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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인간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이 애지중지했던 애견 해피, 태평양 건너 하와이로 떠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성미가 급해 미국 생활 시절 습관적으로 과속을 했다. 한번은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게 됐다. 이승만이 속도 위반을 하여 두 명의 기동경찰이 따라붙자 이승만은 무섭게 속도를 냈다. 

이승만은 순찰차를 계속 앞질러 강연장에 도착한 후 성공리에 강연을 마쳤다. 강연장 입구에서 강연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경찰들은 감동을 한 탓인지 박수를 친 다음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기동경찰 20년 만에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유일한 교통 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 사람뿐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이승만은 미국 망명 시절 외국을 방문하기 위해 여권을 신청할 때마다 미 국무성 담당자가 이승만에게 “미국 시민권을 얻으라”고 설득했다. 그 때마다 이승만은 “우리 조국이 곧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달라”면서 거절했다. 

이승만은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다. 83세 때인 1958년 9월 북한산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가 휘호를 써 줬다. 이승만은 미식가였고 독서가였으며 낚시, 테니스, 정원 손질, 서도(書道)를 즐겼다. 대통령은 가볍고 규칙적인 운동과 담배와 술을 금하고 검소하고 간단한 식사를 통해 건강을 유지했다. 저녁 예배를 마친 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1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 애견가로 유명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 시절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애견 해피가 하와이로 보내졌다.

“자네가 내 대신 대통령 하게!” 

이승만이 사용하는 한글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말투처럼 구식이었으며, 구식 맞춤법을 썼다.  이승만은 담화문이나 성명서를 직접 작성하기도 했고, 때로는 비서들에게 구술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승만의 구술 내용이 문맥이 통하지 않아도 수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손을 댔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승만의 비서였던 박용만의 회고다. 

‘어느 날 이 박사가 구술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난 후 “다시 읽어보라”고 해서 다시 한 번 읽었다. 읽어보니 글이 잘 맞지 않아 몇 구절을 고쳐야 옳은 글이 될 것 같아서 “각하, 이 구절은 말이 좀 이상합니다. 이것을 이러저러하게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자네가 유식하니 자네가 내 대신 대통령하게! 나는 무식해서 그래!” 하며 필기한 종이를 팽개쳤다.’ 

기적같이 나타난 애견 해피 

후손이 없었던 이승만은 개를 좋아해 애견과 자주 산책을 했다. 그는 해피와 스마티 등 여러 마리의 애견을 키웠는데, 검은 반점이 있는 발바리 해피를 특히 귀여워했다. 이 발바리는 이승만이 마포장에서 생활할 때 이기붕이 가져와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경무대에서 4대째 새끼를 낳았다. 

해피와 스마티는 이승만이 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면 자동차 소리만 듣고도 쫓아나갔다. 대통령은 늘 식탁에서 남은 음식을 애견들에게 주는 바람에 개들이 잘 따랐다. 개들은 이승만이 일을 시작하면 발끝에 와서 누웠고, 정부 고위층 회담이 열릴 때면 사무실 밖에서 주인을 기다렸으며, 주인이 정원을 산보할 때면 언제나 뒤를 따랐다. 

인민군이 남침하여 서울이 위태롭게 되자 이승만은 1950년 6월 27일 새벽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을 떠났다. 창졸간에 나선 피난길이라 애견을 챙길 상황이 못 되어 개들은 경무대에 방치됐다.

유엔군의 서울 수복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집무하던 대통령 내외가 서울로 환도하여 경무대로 귀환한 지 사흘 후인 10월 1일, 애견 해피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주인 곁으로 돌아왔다. 애견 해피의 귀환 장면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필동 한국의 집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다시 경무대로 돌아왔다. 멀리서는 아직도 포성이 들려오곤 했지만, 참으로 청명한 가을 날씨는 맑은 햇볕과 공기로 전쟁에 시달린 우리의 마음을 달래줬다. 그런데 해피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경호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굶어죽었거나 행방불명 된 줄 알았던 대통령의 애견 해피 아닌가. 열어젖힌 현관으로 해피가 달려왔다. 해피는 곧바로 쏜살같이 대통령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분명히 해피였다. 바짝 마르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해피였다. 워낙 갑작스럽던 피난길에 그를 돌보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약은 이 녀석이 그 험난했던 나날을 어디에 숨어서 무엇을 먹고 지냈을까? 이제 돌아온 주인 옆을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저토록 정답게 반기는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 내외는 1951년 1·4후퇴 때는 애견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전했으며, 그 후로도 계속 애견들과 함께 생활했다. 4·19로 하야할 때 해피와 스마티, 그리티 등 발바리 세 마리를 이화장으로 데리고 갔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떠나면서 애지중지했던 개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이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가 워낙 영물이어서 그런지 주인이 이화장을 떠난 후 애견들은 밥을 먹지 않고 낑낑댔다. 이화장에서 개 시중을 들 여력이 없어 예전부터 이 대통령 내외를 모시던 방재옥에게 돌봐줄 것을 부탁했으나 밥을 안 먹는다고 다시 가져왔다. 그러던 중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낸 정운수가 세 마리를 가져다 길렀다. 다음은 우제하(이승만 대통령 누님의 아들)의 증언이다. 

해피, 태평양 건너 하와이로 가다 

‘정운수 씨와 부인 편정희(전 국회의원) 씨가 정성껏 개를 돌보았다. 가끔 전에 마담(프란체스카 여사)의 비서로 당시 미 대사관의 외교관 부인이던 스미드 여사가 발바리들이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커미서리에서 개밥을 사다주곤 했다. 

정운수 씨 집으로 발바리들이 옮겨간 지 두어 달 뒤 하와이에서 “의사 말이 이 박사가 마음을 붙여야 할 데가 있어야 하니 개를 보내 달라”는 편지가 왔다. 

당시 이 박사와의 연락은 체크가 심해 인편을 통해 소식을 전할 때인 만큼 발바리를 보낸다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할아버지(이승만)가 사랑하던 해피는 널리 알려져 있어 특히 난감했다. 그래서 개에 물감 칠까지 해보았으나 보낼 인편이 마땅치 않았다. 정 씨는 스미드 부처와도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은 적극 돕겠다고 했다. 

어느 날 주일대표부에 근무하던 교포 운전사가 개둥우리를 갖고 서울에 왔다. 그에게 스미드 부인이 거짓말로 “마담께서 발바리 한 마리를 선교사에게 주라고 하시더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눈치를 채 마포에 있는 정 씨 댁에 가서 부인 편 여사에게 그렇게 얘기하고 해피를 개둥우리에 넣어 가져왔다. 

정 씨는 스미드 부처의 주선으로 운크라 소속 설계기사 디한 씨가 귀국하는 배편에 해피를 하와이에 보냈다.’ 

미국에는 동물을 반입하려면 한 달 이상 검역소에 둬야 한다. 해피가 하와이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날로 개를 보러 검역소에 와 해피를 껴안았다. 그리고 검역기간 동안 매일 검역소에 나와 해피를 보는 게 낙이었다. 

이승만이 매일 검역소에 나타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기자들에게 들켜 해피의 하와이 도착 소식이 신문에 보도됐다. 이 소식은 당시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내무부 장관과 치안국장이 국회에 불려가 의원들로부터 호되게 추궁을 당했고, 정운수 내외도 크게 고초를 겪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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