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홍종우의 엇갈린 운명
김옥균과 홍종우의 엇갈린 운명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3.28 08: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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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김옥균 암살(1894년 3월 28일)

한 사람은 급진개화파로, 또 한 사람은 왕당파 개화파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두 사나이의 이루지 못한 꿈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上海)의 미국 조계지 철마로(鐵馬路)에 위치한 일본 호텔 동화양행. 김옥균은 2층 호텔 객실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자치통감(資治通鑑)> 책을 폈다. 잠시 독서를 하는 사이 홍종우는 리볼버 권총을 꺼내 들었다. 

첫 탄은 김옥균의 머리를 겨냥하고 발사했는데, 얼굴에 가서 박혔다. 김옥균이 놀라 일어서는 사이 두 번째 총탄이 복부에, 비칠거리며 홍종우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세 번째 총탄이 어깨를 관통했다. 김옥균은 바닥에 나뒹굴며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의 나이 44세. 풍운아 김옥균은 10여 년 망명생활 끝에 상하이의 한 호텔 객실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요란한 총성이 연이어 울리자 같은 층에 투숙해 있던 일본 해군 대령이 방에서 뛰쳐나와 총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을 때 유혈이 낭자한 김옥균은 이미 숨을 거뒀다. 

김옥균의 수행원 와다 노부지로(和田延次浪)는 암살된 김옥균의 시신을 일본으로 운구해가려 했으나 청국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김옥균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청국 군함 위정호(威靖號)에 실어 4월 7일 상해를 출발, 12일 조선 정부에 넘겼다.

김옥균의 시신이 도착하자 의금부는 김옥균의 죄상은 모반대역부도율(謀叛大逆不道律)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 능지처참형을 주장했다. 보고를 받은 조선 국왕 고종은 “즉각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 대역죄로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옥균.

능지처참형 당하다 

4월 14일 밤 9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대교 북쪽 강변의 양화진 백사장에서 김옥균의 시신은 왕명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능지처참형이란 죄인의 목을 벤 뒤 시신의 몸, 팔과 다리를 토막 내는 형벌로서, 사형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김옥균의 시신은 목과 손·발을 자른 다음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손과 발 하나씩은 전국 팔도에 돌아가며 효시했다.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1894년 4월 28일자)는 참혹했던 김옥균 능치처참형의 현장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김의 시신을 관에서 꺼내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그리고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 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걸어 놓았다.” 

상하이 언론들도 김옥균의 사망 소식을 열흘 이상 머릿기사로 다뤘다.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가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려는 움직임을 눈치 챘으나 이런 움직임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한 동안 김옥균을 지지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하여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886년 망명객 김옥균을 도쿄에서 남쪽으로 1000㎞나 떨어진 태평양상의 오가사와라(小笠原), 요코하마를 오가는 정기 배편이 1년에 네 차례밖에 없는 낙도 중의 낙도로 유배를 보냈다. 2년여 병마에 시달리던 김옥균은 2년 후 홋카이도 삿포로로 이송되었고, 얼마 후 도쿄로 돌아왔다.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던 김옥균은 일본 야쿠자의 거두이자 극우적 국수주의 집단인 현양사(玄洋社)의 창시자 도야마 미치루(頭山滿)와 접촉한다. 김옥균은 도야마와 현양사의 힘을 빌려 조선 정부 전복을 논의했다.

일본의 무뢰배 수백 명을 고용해 폭약을 소지하고 조선으로 가서 정부를 전복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들이 사전에 알려져 일본 신문에 보도되는 바람에 김옥균의 입장만 난처하게 되었다.

▲ 김옥균의 암살 이후 일본이 이를 빌미삼아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사진은 능지처참형 후 김옥균의 목이 ‘대역부도옥균’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현장에 걸려 있는 장면.

청일전쟁의 한 원인이 된 김옥균 암살 

조선 정부로서는 대역죄인을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판단, 자객을 일본에 보내 호시탐탐 김옥균의 암살을 노렸다. 홍종우는 조선 정부가 보낸 자객에게 포섭되어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 암살에 성공한 것이다. 

쓸모없는 인물이라면서 여기저기 유배를 보내는 등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일본 정부는 막상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자 그가 일본인이나 다름없고, 조계지 내의 일본 호텔에서 살해당했으니 사건 관할권이 일본에 있다면서 시신을 일본 정부에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 암살을 방치한 청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일본 언론은 일제히 김옥균을 애도하고 의연금 모금, 시신 수습 문제를 협의하는 등 재빠르게 움직였다. 

김옥균의 참혹한 형벌 소식을 접한 일본의 지도층과 언론은 조선과 청국을 응징하자는 여론을 형성하여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당시 일본 외무차관 하야시 다다스(林董)의 <회고록>에 의하면 무쓰 외상이 청일전쟁을 결의한 이유는 김옥균의 암살과 그때의 청나라의 거동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와다 노부지로를 비롯하여 김옥균을 따르던 몇몇 일본인들은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수습하여 도쿄 아오야마(靑山)의 외국인 묘지에 매장했다. 묘 앞에는 박영효가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쓴 김공옥균지비(金公玉均之碑)라는 묘비를 세웠다. 

1912년 12월 3일 김옥균 사후(死後)에 양자가 된 김영진이 아오야마 외국인 묘지에 있던 김옥균의 유발을 옮겨와 자신이 군수로 있던 충남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에 김옥균의 부인 유 씨와 합장을 했다. 

여기서 잠시 김옥균의 암살범 홍종우로 시선을 옮겨본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암살한 후 상하이 교외로 달아나 한 농가에 숨었다가 다음날 거류지 경찰에 체포, 수감되었다. 

홍종우는 중국 경찰에 체포될 때 “김옥균은 조선의 재상으로 대역부도한 사건에 연루되어 몇 백 명을 죽였다. 그는 일본으로 도피해 이름까지 바꿨다. 

나는 김옥균을 죽여 왕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린 것이다. 이제 나라를 위해 그를 죽였으니 나는 죽어도 좋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청국 정부는 범인을 인도해 달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을 뿌리치고 홍종우를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청국 군함에 태워 조선으로 보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홍종우는 경기도 안산 사람으로 몰락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전국을 떠돌다 고금도에까지 흘러가 살았다. 그는 ‘쑥물도 버리기 어려울 정도로’ 구차한 생활을 했다. 

1850년생인 홍종우는 김옥균보다 한 살 위였다.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일본어를 익혔고, 국제 정세에 나름 식견이 있었던 그는 아사히신문에 식자공으로 취직하여 국제신문을 봐 가며 견문을 넓혔다. 

▲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조선 최초의 파리 유학생 홍종우 

홍종우는 일본에 살면서 격렬하게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본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된다면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프랑스어를 배워 40세 되던 1890년 1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기록에 의하면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다. 당시 프랑스에는 아시아 붐이 일었는데, 이 무렵 파리에 온 홍종우는 현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인 고고르당과 19세기 대표적인 사상가인 르낭 등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 와중에 홍종우는 당시 파리의 인기 소설가 로니와 함께 <춘향전>을 불어로 번역하여 <향기로운 봄>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러시아 발레계의 거장 안무가 미하일 포킨은 홍종우의 <향기로운 봄>을 원작으로 하여 ‘사랑의 시련’이란 발레극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공연되고 있다. 

<향기로운 봄>이 히트하자 심청전을 번역한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1895년 출간), 그리고  <직성행년편람(直星行年便覽) 번역>도 출간했다. 또 프랑스인들이 조선어를 배울 수 있도록 조선어 사전과 조선어 교습서를 펴내기도 했으며, 서양 요리를 배워 뛰어난 요리 솜씨를 자랑했다. 홍종우는 레가미의 소개로 기메박물관에 취직하여 외국인 협력자로 근무했다. 당시 박물관 지출내역서를 보면 홍종우의 월급은 월 100프랑이었다. 

홍종우는 파리 사교계의 중심이자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카페 드 마고의 사교 모임에도 자주 참여했다. 그는 파리에서 ‘조선의 한복 신사’로 통할 만큼 한복과 도포에 갓을 쓰고 다녔다. 심지어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하던 그 순간에도 홍종우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유럽 사상가들에게 심취해 있었으면서도 조선 문화에 대한 자부심, 동양의 가치를 존중했다. 

그가 프랑스에 체류했던 시기는 보불전쟁에서 패한 나폴레옹 3세 제정이 몰락하고, 프로이센 세력이 유럽을 호령하던 시기였다. 그는 프랑스에 체류하던 당시의 체험을 통해 조선의 개화를 위해서는 공화정보다는 프로이센처럼 황제 중심의 입헌군주국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1893년 귀국을 위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고종의 밀명으로 도쿄에 온 자객 이일직과 만났고, 그로부터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제의받았다. 유럽 외교관 부인들과 자주 어울린 명성황후는 파리 사교계의 유명 인사였던 홍종우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홍종우에게 개화당 수괴 김옥균의 암살을 지시한다. 

외세를 등에 업은 개화당을 싫어했던 홍종우는 이를 승낙하고, 김옥균과 접촉하여 파리에서 배운 서양요리 솜씨로 김옥균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김옥균에게 상하이행을 유도하여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다.

청나라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했으나 무혐의로 석방했고, 김옥균의 시체까지 내주었다. 고종은 홍종우를 크게 신임하여 예정에도 없던 과거를 실시하여 그에게 관직을 내려 공신으로 예우했다. 

그러나 역사의 회오리는 한 인간의 출세 따위는 단숨에 날려버리는 질풍노도로 돌변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동학난 진압을 명목으로 청국이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자 일본도 천진조약에 의거, 대병력을 조선에 보냈다.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 씨 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권좌에 앉혀 친일 괴뢰정권을 수립했다. 7월 25일 충청도 아산 앞바다에서 일본 초계함들이 청국의 병력 수송 선단을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 김옥균은 19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10년 동안의 일본 망명 생활 끝에 1894년 3월 중국 상하이의 한 호텔에서 고종의 사주를 받은 홍종우에 게암살당했다. 사진은 갑신정변의 주역들로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이다.

왕당파 개화주의자의 좌절된 꿈 

1894년 12월, 갑오경장에 따라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 연립내각이 들어서면서 군국기무처를 설립하는 등 갑오개혁(갑오경장)을 실시했다. 1895년 1월 22일 대역죄인 김옥균은 왕명에 의해 사후(死後) 복관(復官)되었고 김옥균의 부인 유 씨도 노비로 전락했다가 복권됐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아관파천으로 정세가 뒤집혀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면서 복권조치는 취소된다. 

아관파천은 홍종우에게는 입신출세의 기회였다. 아관파천 후 국왕을 황제로, 세자를 황태자로 높이는 한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할 것을 건의한 것도 홍종우다.  그는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어 고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고종은 홍종우에게 보부상들을 통한 여론 조성, 정보 수집 등을 하는 정보기관 운영을 맡겼다. 

당시 독립협회는 만국공법에 따라 외국인을 차별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반면, 왕당파 개화를 꿈꾸었던 홍종우는 만국공법이 강대국의 이권 침탈 앞에서는 그저 휴지조각과 같다고 생각했다. 도성의 분위기가 독립협회 쪽으로 쏠리자 홍종우는 보부상을 동원하여 황국협회를 설립하고 정치적 테러를 통해 공화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를 해산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역사는 한 인간의 입신출세 따위를 위해 행로를 제 마음대로 바꾸지 않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병합하는 절차를 추진하게 된다.

홍종우는 또 다시 몰락하여 제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 사이 김옥균은 또 다시 역사의 무덤에서 살아나온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김옥균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충달(忠達)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도쿄 아오야마 묘지의 외국인 묘역 한가운데 자리 잡은 김옥균의 묘 앞을 지키고 있는 묘비석은 개화당 유길준이 쓴 것인데, 그 비명(碑銘)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功)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 공이여.’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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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림쉐이디 2016-05-02 02:10:36
기사 재밌게 잘&#48419;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