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 (從北)의 원조 (從北)’ 조총련 누가 키웠나?
‘종북 (從北)의 원조 (從北)’ 조총련 누가 키웠나?
  • 홍형 전 주일(駐日)공사
  • 승인 2016.04.04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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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문가 특별기고] 일본 정부와 조총련

 

조총련을 키운 것은 일본이다. 일본 사회의 방조가 없었다면 조총련이 조직을 유지하고 평양의 지령대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 

 

한미동맹에 대해 핵(核) 선제공격을 위협해 온 김정은이 핵미사일 실전 배치를 선언했다. 그리고 김정은 체제와 이를 비호해온 중국이 동아시아에 냉전 구조를 본격적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중국은 특히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에 참가하면서도 한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THAAD) 배치에 집요하게 간섭하는가 하면, 한미동맹의 무력화를 겨냥하여 북한이 주장해온 미·북 간 평화협정을 밀어붙이며 한국에게 전략적 결단을 강요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현재 역사상 가장 긴밀한 관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뢰가 부족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정식 정상회담은 박 대통령이 취임하고 33개월 지나 이뤄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한·미·일 안보협력체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처럼 강력한 동맹체제로 발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한일 안보협력이 미국을 매개로 한 제한적 연대를 넘어 장기적·전략적 동맹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확신을 가지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일 관계가 상호 신뢰 속에서 NATO와 같은 견고한 가치동맹으로 발전하려면 어떤 과제를 넘어서야 하는가? 양국이 안보 협력을 하려면 지금까지 양국 간에 놓여 있는 장애의 본질을 직시하고 극복해야 한다. 

여전히 멀기만 한 한일 관계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천명한 일본은 군사정보비밀 보호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식으로 한국과의 안보 협력에 적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는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과의 안보 협력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일까? 혹은 언제부터 안보 협력을 바란 것일까? 

남북 대결 70년 역사 속에서 한일관계 발전의 한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가 조총련이다. 지금까지 잘 보이지 않았던 안보 문제에 관한 한일 양국의 모순과 갈등 국면은 조총련 문제를 보면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아시아 대륙의 공산세력이 태평양으로 팽창하지 못하도록 미국과 함께 싸워왔다. 그래서 그 결과로써 일본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지켜줬다. 반면 ‘평화국가’라는 이미지를 앞세워 온 일본은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피해왔다. 

한일 관계를 독불(獨佛) 관계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숙적이었던 독일과 프랑스의 국교 정상화도 한일 국교 정상화보다 2년 빠를 뿐이다. 그러나 한일 관계와 독불 관계는 전혀 다르다. 일본과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의 전범(戰犯)국가로 비슷하게 단죄되었으나 전후(戰後)의 행보는 전혀 다르다. 

한일은 동서 냉전 중에는 결속된 것처럼 보이다가, 냉전이 끝난 후 갈등과 마찰이 확대되었다. 독불은 양국의 연대를 기반으로 동서 냉전 후 유럽통합을 이뤄냈다. 독일이 동서 냉전 시 공산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취했던 행동을, 일본은 동서 냉전이 끝나고 중국의 대두가 현저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취하기 시작했다. 

▲ 한국인들은 한일 안보협력이 장기적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요한 이유는 북한 노동당의 전위대인 조총련의 反 대한민국 활동에 대해 방조 내지는 지지를 보낸 바 있는 일본의 이중성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해 9월 일본 경찰이 조총련 홋카이도 본부를 압수수색하는 모습.

조총련의 본질은 조선노동당 전위대 

조총련의 존재가 어째서 한일 관계, 특히 안보 협력의 한계를 설명하는 자료가 되는가? 흔히 민단(民團)을 조총련에 대비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조총련의 본질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민단은 조총련이 아닌 재일동포들을 칭하는 표현일 뿐 민단과 조총련은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다. 

조총련은 단순히 북한을 지지하는 교포 단체가 아니다. 교포 단체로 위장한 조선노동당의 재일(在日)지부이며, 적지(敵地) 일본에서 대한민국을 공격해온 기지다. 조총련은 지난 70년 간 평양의 전략과 지시에 따라 정치 모략 전쟁부터 잔혹한 비밀공작까지 수행했다. 즉 한반도 냉전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조총련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진단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일 양국이 모두 조총련의 공작에 당해왔다. 즉 한일관계가 좀 더 발전되지 못한 배후에는 조선노동당의 전위대, 즉 ‘종북(從北)의 원조’인 조총련 조직이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에 종속된 가난하고 음험한 독재국가이고, 북한은 주체적인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 확산시켜 온 것도, 그래서 한국 사회에 종북세력을 결정적으로 키워온 것도 바로 조총련의 임무였다. 

조총련이 남북한 대결에서 대한민국의 옆구리를 찌르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와 배경은 현대사 차원에서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다. 많은 재일(在日) 한국인들, 특히 조총련계 교포들은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북한이 분단 이후 김 씨 왕조라는 봉건시대로 회귀한 것처럼, 조총련 사회도 봉건시대에서 거의 한 발자국도 진화하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좌경화된 지식인들과 공산당이 해방되자마자 재빨리 손을 써 정상적 교육을 받지 못한 재일 한국인 사회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것이 재일동포들의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조총련은 일본이 키웠다 

자유민주주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던 패전국 일본 사회의 풍토에선 원시적인 민족주의 감정을 선동하는 좌익들에게 거칠 것이 없었다. ‘재일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을 누가 지도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개된 치열한 투쟁에서 평양(김일성) 측이 일본 공산당을 누르고 승리한 것은 모스크바가 김일성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의 권리, 의무, 자율, 책임 등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던 재일동포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식민지 때 천황이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에 김일성이 대신 들어섰다. 조총련 조직은 스스로 폐쇄적 민족주의의 게토(ghetto)를 만들어 재일동포들을 그 안에 가두기 시작했다. 

1959년에 시작된 북송사업은 재일동포 9만3000여 명을 김일성에게 노예 노동력으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조총련 조직의 봉건성, 맹목성, 폭력성 등이 결정적으로 고착되었고, 북한에 인질이 잡힌 재일동포들은 조총련 조직이라는 게토에서 탈출하는 게 더 어려워졌다.

그러면 조총련 조직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존속하여 김일성과 그 후손들에게 ‘의리’를 지키는 에너지는 어디서 온 것인가? 결론적으로 조총련을 키운 것은 일본 사회의 풍토다. 일본 사회의 방조가 없었다면, 조총련이 조직을 유지하고 평양의 지령대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재일 한국인, 특히 조총련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시기적으로 부침은 있으나 “꺼림칙한 집단과는 가급적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시선이 경멸과 업신여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경멸과 업신여김이 일본 사회에 방심을 초래했고, 조총련 조직은 이를 역이용해 오기도 했다. 평양과 조총련의 한일관계 파탄을 위한 공작에 많은 일본인들이 협력한 것이다. 

조총련 조직 속에서도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과협(科協·재일조선인과학기술협회)과 사협(社協·재일조선사회과학자협회)인데, 이들이야말로 전형적인 첩보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 내의 수많은 간첩사건에서 이들 간부들이 일본에서 연락 거점 역할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과협’은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본격화한 초기부터 조직적으로 지원해왔다. 러시아와 중국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체계적·조직적으로 지원했다. 

조총련 조직이 위험한 실패국가인 김일성 체제에 맹목적으로 추종, 자유세계에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쳐온 존재라는 것이 명백해진 이후에도 일본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은 조총련을 귀찮기는 하지만 방치해둬도 괜찮은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1990년 북한의 핵무장 야망이 언론을 통해 드러난 후에도 일본의 고위인사들이 “북한이 그까짓 조잡한 핵무기를 만들어봐야 무슨 위협이 되겠느냐”는 반응에서도 볼 수 있었다. 

김정일이 일본인을 대규모로 납치한 사실이 드러나도 북한과의 수교라는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소수 일본인의 조난은 모른척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인사들이 있었을 정도다. 대포동 미사일이 일본 열도 상공을 지나고,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여 일본 국민들의 공분이 폭발한 후에야 북한과 조총련에 대한 업신여김은 사라진다. 

▲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조총련 북송사업의 재일 한국인들과 대한민국에 대한 일본의 적의,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제 차원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일본 니가타항의 북송장면.

북송사업은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 추방작전 

물론 조총련 조직 내에서도 평양에 대한 맹종에 저항하는 동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저항자들은 평양의 무자비한 숙청과 똑같이 일본에서도 철저히 제압,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들 조총련 이탈 세력을 포용, 지원해야 할 재일 민단의 타락 때문에 조총련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받지 않는 상황에 놓였다. 

재일 민단은 지금 스스로를 ‘생활자 단체’라고 칭하며 조총련 동포를 ‘게토’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에는 무관심하다. 재일 한국인들은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고, 당연히 조총련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훈련을 받지 못했다. 지금 민단 사회에는 그런 제도적 장치와 과정조차 없다. 

일본 당국이 조총련을 방치해둬도 괜찮은 존재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조총련을 감시 대상으로 삼는 ‘파괴활동 방지법’이 있고, 이를 위한 조직이 있다.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들을 일본에서 추방하려고도 했다. 9만3000여명을 자유세계로부터 스탈린주의 생지옥으로 보낸 북송사업(1959~1984)이다.

이 사업을 주도한 것은 조총련과 일본 사회의 범좌파지만 대한민국이 거국적으로 반대했던 이 반(反)문명적 계획을 적극 이용, 지원한 것은 일본의 민족주의 세력인 우익과 언론 및 일본 정부였다. 

이들의 방조 없이 북송사업이 장기간 지속될 수는 없었다. 북송사업은 한일 국교정상화 6년 전에 시작되어 더 이상 북송 희망자가 없어 사업이 종료되는 1984년까지, 즉 국교정상화 후에도 19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있을 수 없는 이 부끄러운 일에 대해 많은 일본인들이 “당시에는 북한이 스탈린주의 생지옥인지 몰랐다”고 변명한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일본인 60만 명 이상이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연행되어 6만 명 이상이 그곳에서 죽었는데, 일본 사회가 스탈린주의 체제가 어떤 것인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북송사업은 일본 정부가 소련으로 끌려간 일본인들을 모두 귀환시킨 뒤에 시작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佐藤信介·아베 총리의 외조부)와 그 세대들은 시베리아로 연행되었던 일본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완전 무시한 일본 

북송사업은 재일 한국인들,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혐오와 적의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이 저들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보다 두 배 이상인 약 6년 8개월간의 미국의 점령기간을 끝내고 1952년 4월에 주권을 회복했을 때 일본의 한반도 정책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윤곽이 드러나 있다. 한반도의 영구 지배를 노렸다가 실패한 일본으로서는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를 되돌아보자. 식민지와 지배국 관계가 끝나고 20년 후에 성립된 국교 정상화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교 정상화, 즉 수교는 이념과 가치, 제도를 공유한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과 소련이 수교가 우호적이었는가? 반공(反共)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과 일본은 같은 자유진영에 속하고 있었지만, 양국 관계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실상이 드러난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동서 냉전 상황에서 미국의 종용이 없었다면 더 늦어졌을 것이다. 

사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혁명을 거친 적이 없다. 링컨이 흑인노예 해방을 선언한 후에 진행되고 있었던 명치유신은 일본 고유의 정신에 서양의 학문을 더하는 ‘화혼양재(和魂洋才)’가 바탕이며, 그 결과를 갖고 부국강병의 제국주의 길로 나갔다.

일본에서 여자가 남자와 똑 같은 참정권을 부여 받은 것은 패전 후 명치헌법이 폐기된 다음이다. 여성의 참정권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과 일본의 민주주의의 차는 1년이다. 

문제는 일본이 1965년 국교 정상화 과정과 그 이후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부분을 인정하지 않은 점이다. 일본 정부는 휴전선 이남만이 대한민국이라고 주장했고, 대한민국 헌법의 불가분의 일부인 국가보안법을 아예 무시했다.

법조문 등을 꼼꼼히 따지기로 유명한 일본인들이 대한민국의 안보 상황과 법체계의 관계를 몰랐을까?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헌법을 유지하는 필수 장치인 국가보안법을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일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대한민국 견제, 북한과는 우호관계 

일본도 파괴활동 방지법에 의해 조총련을 감시해왔다. 그러나 일본 자신에게도 위험한 감시 대상인 조총련이 대한민국에겐 반(反)국가단체, 즉 대한민국과 자유민주 체제 말살을 추구하는 조선노동당의 재일(在日)지부, 혁명의 전초기지며 ‘종북의 원조’라는 점을 일본 당국은 애써 무시해왔다. 

조총련이 앞잡이 노릇을 해온 좌파들은 물론 자민당 정치인들과 일본 당국조차도 국가보안법을 ‘정치범을 처벌하는 법’ 정도로 폄훼하고 행동함으로써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조총련을 비호 방조해왔다. 한국 내에 국보법 폐지를 부르짖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그러한 자세를 취한 측면도 있다. 

테러 단체인 조총련과 끈끈한 파이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는 정치인도 적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지금도 있다.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대한민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즉 북한에 우호적 태도를 취하는 정치적 고려에서 조총련 규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해온 경우들이다. 

일본은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에 실패하자 대신 육영수 여사를 살해한 문세광의 배후 조사 및 처벌을 요구한 한국 정부의 요청조차 거부했다. 최근 일본 당국이 허위 기사를 쓴 산케이신문 기자를 기소한 한국 정부에는 항의하면서 대한민국의 적들을 비호해온 행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된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IS와 조총련을 비교해 봐도 일본에게 어느 쪽이 더 총체적으로 위험한지, 위해를 끼쳐왔는지는 명백하다.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일본 국내의 대한민국의 적(敵)들을 비호한 것에 대한 사죄까지는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일본이 국제 테러세력과의 전쟁 이상으로, 혹은 동등한 정도로 대한민국의 적인 조총련을 대하는가를 봐야 한다. 즉 한반도의 자유통일에 일본이 전면적으로 동의, 협력한다는 확인 하에 일본과의 전략적 안보 협력을 생각해야 한다. 

3월 5일자 아사히신문 사회면에 흥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 정부가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를 발표할 때 ‘한국-조선’으로 집계해온 것을 ‘한국’과 ‘조선’으로 분리해서 공표할 방침을 정했다는 기사였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을 구별하지 않고 집계, 공표해 왔는데, 이에 대한 변경은 일부 자민당 국회의원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 의하면 일본 정부가 ‘한국-조선’으로 집계해온 것은 한반도 분단 이전부터 일본에서 살아온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출신으로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경우는 체류카드에 ‘조선’으로 기재되어 있었는데, 여기엔 남한 출신자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이 ‘북한(국적)’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1970년대부터 구별하지 않고 집계해 왔다고 설명한다. 최근 자민당 국회의원들이 “일본에 사는 ‘북한 국적자’가 실제보다 많아 보인다”고 분리 공표를 요구했다고 이 기사는 전했다. 

위 기사에 보도된 일본 당국의 설명은 정직하지 않다. 1970년대부터 구별하지 않고 집계했다는 설명은 거짓이다. 집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공표하지 않았을 뿐이다. 1960년대까지는 구분하여 집계, 공표했다가 중지한 배경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른 분석을 해왔다. 즉 일본에서 외국인 등록에서 한국과 조선(북한) 등록 숫자가 역전된 때가 1970년경이었기 때문이다. 

조총련의 악행 낱낱이 기록하자 

평양과 조총련 입장에서는 조총련 결성(1955년) 당시에 일본 내 전체 외국인의 80% 가까운 압도적 다수였던 ‘조선(북한) 국적’ 숫자가 한일 국교 정상화 5년 만에 역전된 것은, ‘수령’들이 친히 지도한 ‘재외동포사업’이 치욕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더욱이 일본을 무대로 한 남북 대결에서 북측이 패배한 사실이 구체적 숫자로 공표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조선 국적 등록수의 급격한 감소 추세가 공표되지 않도록 저지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통일일보> 등의 이러한 분석과 주장에 대해 일본 당국은 함구해 왔다. <통일일보>는 작년에 일본 법무성 당국이 중국과 대만에 대해서는 이미 2012년 통계부터는 ‘중국’과 ‘대만’을 분리 공표하고 있는 사실도 지적했다.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은 3월 11일 예고한대로 2015년 12월말 현재의 ‘조선적’ 숫자를 발표했다. 물론 이 발표는 일본 정부의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발표된 것이다. 일본 당국이 ‘한국’과 ‘조선’을 분리 공표한 것은 중국과 대만을 분리 공표한 마당에 더 이상 조총련을 비호하기 어렵게 된데다, 특히 대북 압박이라는 정치적 차원의 판단이 있었다고 보인다. 

여하튼 근 반세기만에 조총련의 실상이 마침내 공개되었다. 한국 국적자가 45만7772명, ‘조선적’자가 3만3939명. 조총련은 전체 외국인의 1.5%이며, 특히 전년도보다 5.1% 줄어들었다.  조총련 숫자가 민단의 7.4%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평양 측에는 뼈아픈 일이다. 지금 추세로는 수년 내에 민단의 5% 이내로 줄어들며 그 감소폭도 가속될 전망이다. 

▲ 육군사관학교 졸업 주일 한국대사관 참사관 및 공사 오버린대학 객원교수 통일일보 주간 (현) 와세다대학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재일 한국인들에게 강하게 남아 있는 전근대적 근성은 사라질 것인가? 조총련은 북한이 해방된 후에야 소멸할 것인가, 아니면 조총련이 먼저 소멸할 것인가?

혹은 조총련은 김 씨 왕조가 사라진 후에도 김 씨 왕조의 복구를 꿈꾸는 세력으로 남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은 대한민국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때마침 십 수 년을 끌어왔던 북한인권법이 통과되었다. 북한인권기록센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조총련도 당연히 정보 수집, 기록의 대상이 된다.

자유세계에 살면서 동족 학살집단의 하수인이 된 조총련 조직의 악행이야말로, 북한에서 어쩔 수 없이 야만적 폭압체제에 복종했던 독재의 하수인들보다 더 세밀하게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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