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촌의 꾸밈없는 속내 - 충북 청원 지푼골
우리 농촌의 꾸밈없는 속내 - 충북 청원 지푼골
  • 미래한국
  • 승인 2003.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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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익의 국토기행 (26)
“전국의 이장님들, 힘내셔요. 그리고 부디 여든여덟까지 정정하게 일하시고, 아흔여덟 넘겨서까지 지키셔야 해요. 지푼골들 말이어요.”“웃지푼골에 두 집, 아랫마을에 열여덟 집, 그리고 장선이에 아홉 집을 합쳐 스물 아홉 집이네요, 모두 일흔 두 명이 살어유. 여자가 서른 여덟으로 네 명이 많구만요.” 연보라 꽃이 곱게 핀 장아리 밭에서 일하던 손을 툭툭 털고 나서는 홍종권 씨는 94년부터 10년째 줄곧 지푼골 이장(里長) 일을 보고 있다. “년 전엔 쉰여섯 집에 삼백 명이 넘었시유.” 초로의 농부는 밭둑에 꼿꼿이 선 채로 또박또박 그의 동네를 설명해나간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72년에 이장 수당이 오천원이었어유. 지금 십만원잉께 스무 배로 올랐나 보네유. 그런데 74년에 고추 한 근에 팔천 원하던 게 지금도 그냥 그래유.” 자재비와 비료값, 농약값이 오르고 품삯이 뛰었는데 농산물 값만 제자리걸음을 하면 어찌 되느냐고 묻는다. 생활이 쪼들리고 빚이 느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되쳐 묻는다. 딱히 할 말이 없으니 멍하니 쳐다볼 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농사 말이어유? 도무지 계획이 안 서고, 계산도 안 돼유. 땅이 있으니 놀릴 수 없어 짓는 것이지유.” 본래 농사라는 게 자연에 안겨서 하는 일이다. 날씨가 잘해주고 비가 맞춰 와주어야 한다. 때아닌 한파나 우박에 결딴나고 높새바람과 폭풍에도 피해본다. 홍수나 가뭄이 우심하면 그 해 농사는 망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갖은 풍상을 다 겪은 순천백성이 하는 말의 뜻은 딴 데 있었다.“중국이 빨리 선진국 되어야 혀유.” 수입 농산물 가격이 싸서 견디기 어렵다는 말을 지푼골 농부는 이렇게 한다. 헐값에 파는 이들, 마구 사들이는 이들과 그것을 막아주지 못하는 정부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서 잘 살게 되어서 인건비가 올라가면 우리도 같이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잘하고, 앞서가는 이들을 끌어내려야 서열 없는 평등사회가 된다고 우기는 잘난 자들이 새겨들을 말이다.말은 곧 품성이다. 검게 그을린 주름 파인 얼굴에 거칠고 투박한 손이 강인한 인상을 준다. 초등학교 3년을 다녔다는 이 초로의 농부가 어떻게 이렇게 고운 성품과 밝은 눈을 지녔을까? 코끝이 찡해와서 얼굴을 돌리니 겹겹이 쌓인 녹색이 살갗에 스미도록 곱다. 겨울 난 소나무들이 검푸른 청록이라면, 첫 봄에 먼저 난 잎새들은 이미 진초록이요, 갓 돋은 새순들은 보송보송 연녹색이다. 천연녹색이 어우러져 내는 색조의 강렬함이 무더기로 핀 진달래, 물먹은 검은 바위와 갈아엎은 밭의 황토까지 온통 녹색 계열로 편입시키고 있다. 그렇지, 그것은 자연이 주고 시간을 묵혀서 나오는 녹색의 지혜일 것이다. 먹고 살 수만 있고, 억울한 일만 좀 덜 당한다면, 역시 농사가 천하 으뜸의 직업인데…들에는 담배밭이 가지런하다. 잎사귀가 아기 손바닥만한 어린 담배들이 비닐로 덮은 이랑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지어 참으로 정연하게 자라고 있다. 여기저기 까만 비닐로 이랑을 씌운 밭에서는 배춧잎이 난들거린다. 그러고 보니 여기 고도가 삼백 미터는 족히 될 걸? 검은 천으로 그늘을 지워놓은 인삼포도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작물에 따라 열을 필요로 하는 정도가 다르니 씌우는 비닐도 달라져야 하는 걸까? 인삼같이 아예 직사광선을 싫어하는 작물도 있고. 세상도 이 같으려니, 그리하여 좋아하고 구하는 것이 다 똑 같지 않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장선이’ 마을은 골목이 휑하니 비어 있다. 길가 한 집에서 지붕을 수리하고 있기에 기웃거려 본다. 노인들 서넛이 주홍 칠이 벗겨진 시멘트 기와를 내리고 스티로폼을 덧붙인 양철지붕을 씌우고 있다. 카메라를 맨 낯선 이들을 경계하지 않나 했는데, 대뜸 막걸리 한 잔 하란다. 그제야 ‘집을 참 잘 고친다고’ 대꾸를 하고 보니, 내가 생각해도 용렬스럽기 그지없다. 대문 옆 마당 구석에 마주 쪼그리고 앉으니 플라스틱 통에서 막걸리를 대접 가득 따른다. 얼떨결에 들이킨 객이 대접을 내려놓으니, 쥔은 아직 막걸리 통을 들고 있다. “한잔 더 하시우.” 뭐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또 받았다. 안주는 된장에 무친 곰취나물이다. 촌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대신 내 가슴이 찡해온다.우루과이라운드가 한창이던 십여 년 전에 미국의 대평원을 자동차로 횡단하면서 비슷한 감정에 복받친 일이 있다. 종일을 달려도 끝이 없는 그 넓은 들판 가운데서, 소 한 마리 앞세워 지게 지고 논둑 걷는 우리 농부의 모습을 떠올린 거였다. 브라질 상공에서 수천 마리의 소가 노니는 초원을 내려다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었다.“50년을 잘 살았는데, 비가 새서요.” 멀쩡한 아파트를 헐지 못해 안달인 서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픈 얘기다. 먼지를 뒤집어 쓴 마루 문 위에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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